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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 수업후기-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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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샘 작성일16-03-05 23:57 조회2,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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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스쿨 3주차 후기/ 변은영/ 2016.3.5.


<우주 삶을 만나다-육친의 관계망>


사주명리학 세 번째 시간은 사주명리의 ‘꽃’이라고 하는 육친이다. 지난 시간까지 음양오행, 천간과 지지를 배웠다. 음양오행을 품은 천간과 지지가 내가 첫호흡을 한 순간 내 몸에 8개의 글자로 새겨졌다. 그런데 이 글자들이 각각의 운동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음양오행은 상생상극하며 운동을 한다. 이러한 생극의 작용을 인간사에 적용한 것이 육친이다. 그 시작은 일간 ‘나’에 해당하는 오행으로 시작한다. 일간이 정화(丁火)면 화에서 시작하는 오행의 리듬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극 관계에 따라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라고 한다. 이것이 나(일간)를 포함하여 육친이 된다. 인간관계망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 음양으로 쪼개지면 10개가 된다. 그리하여 십신이라고도 불린다. 십신의 신(神)은 정신, 방향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니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나도 모르는 내 욕망을 은근슬쩍, 아니 대놓고 보여주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다.

식상이 과다한데 이를 제어하는 인성이 없으니 난 식상 울트라 과다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걸 좋아한다. 이것저것 시작을 잘한다. 시작만 하다 끝난다. 아니 재성으로 어느 정도 끝내거나 관성으로 책임이 주어지면 어떡하든 해낸다.(수틀리면 박차고 나올 때도 있고) 하지만 이것을 응축하는 인성이 없으니(지장간에는 있지만) 다져지지 못한다. 그래서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장인들을 좋아하는 걸까, 내게 없는 기운이니까. 사주에는 이렇듯 여러 삶의 양태들이 담겨 있다. 어떤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이 큰지 그로 인해 어떤 장이 펼쳐지는지가 말이다.

육친은 배워서 뭐하냐고? 결국 우리네 삶이란 게 대부분 관계의 문제이다. 뭐 그리 거창한 이념 논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는 살고 있었다. 친구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 어머니와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등등. 이 관계망에 음양오행의 상생상극 순환의 원리가 담겨 있다. 어떤 운이 들어오면 어떤 운은 쇠하는 법! 겨울이 왔다가도 봄이 오는 법! 좋고 나쁨은 없다. 단지 그러할 뿐이다. 하지만 늘 같은 기운만 쓰면, 같은 근육만 쓸 때처럼 탈이 난다. 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기운을 좀 다르게 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육친을 배우는 이유이지 싶다. 채운 쌤의 글을 빌리면 “우주 질서를 따르는 어떤 것도 변환 능력이 없다면 연속이 가능하지 안”으니 말이다. 내 경우는 타인의 말을 새겨듣기, 하고픈 게 있어도 걸러내기 등... 길은 많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일상을 돌아보고 거기에서 내스스로 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명리학자가 말한 ‘만인의 명리학자 되기’와 연관된다. 누구나 내 삶을 내가 읽어내고 내가 쓰는 것 말이다.


<문체가 뭐길래-나를 구성하는 문제>


2교시는 이옥을 만나는 시간이다. 두 번째로 만나는 시간이다 보니 이옥이 좀 더 친근해졌다. 그런데 눈길이 새롭게 간 것은 오히려 정조였다. 호학군주로서 추앙받는 정조도 있었고 문체반정을 일으키며 자신의 정통성 곧 권력의 기반을 지키려는 정조도 있었다. 헌데 나와 같은 인간 정조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급화시키면 정조가 기분 나빠 하려나^^) 누가 니 행동은 틀렸어 하면 더욱 그 행동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주장하거나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게 마련이다. 또한 어떤 것의 원인을 내가 잘 알거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환원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규장각을 재정비하고 문체의 법식을 편찬하며 자신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리고 그는 정학이 흔들리는 거나 서학이 퍼지는 이유도 모두 문체 때문으로 환원한다. 정조도 인간인지라 초계문신들까지 소품에 홀딱 빠져있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불안했을 것이다. 임금 자리가 가뜩이나 위험한 자리가 아니던가. 그렇더라도 그가 만일 기존 질서의 균열을 두려워하는 대신 새로운 문물이 자연스레 흐르는 것을 두었으면 어땠을까. 이후 서양 ‘문명’의 돌격에 그리 처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새로운 사고가 들어올 때, 전혀 다른 문화의 타자를 만날 때 나도 정조와 같다. 정조의 패착이 남일 같지 않다.

사랑이 뭐길래, 아니 문체가 뭐길래 그리 문체를 고수하려 했던 걸까. 문체에 대한 의문을 풀기위해 동아시아에서의 문(文)의 위치를 살펴보는 대목에 주의가 갔다. 문을 다룬다는 것, 그러니까 읽고 쓴다는 것은 통치와 연관이 된다. 글이 권력인 셈이다. 이 지형에서는 고문을 배워 시대에 합당하게 ‘변환’시켜 내는 주체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학문이다. 어라, 낯설지 않은 걸~ 그러고 보니 고전을 배워 일상을 새롭게 구성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우리의 ‘에세이’네.

이옥과 그의 친구 김려의 글은 유배라는 막다른 길을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길로 만든다. 그 어떤 황무지도 꽃을 피워내는 능력처럼 보인다.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 말이다. 굳이 이벤트도 필요 없고 특별한 곳을 갈 필요도 없다. 그저 이곳을 그대로 느껴 삼키고 몸을 통과해 글로 토해낸다. 그런데 어떤 이벤트보다 더 감동적이고 어떤 여행지 보다 더 새롭다. 힘 빼고 무심하게 쓴 글에는, 그런 삶에는 교훈도 이념도 없다. 공부의 장에 와서 내가 얼마나 관념적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이 대목도 특별했다.(안 와닿은게 뭐니?!) 그렇다면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는 이옥처럼 길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물, 인물들에 시선을 두는 것이지 싶다. 저 높은(?!) 곳 말고!


<균형과 변주의 달인 소동파(1)>


『소동파의 산문선』을 도반과 같이 소리 내어 읽었지만-혼자 눈으로 읽을 때보다는 확실히 재미있다-소동파라는 인물은 당송팔대가라고 하는데 이러저러한 글들을 썼구나 정도지 공감을 느낄 대목을 못찾았다. 이순간 필요한 건? 강의다. 강사분이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를 건져 올려서 전달해 주실까.

소식은 이름부터가 남달랐다.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나란히 올린 아버지 소순의 삶의 철학이 그래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레에서 부각되지는 않지만 없으면 허전한 ‘수레 앞턱’을 가리키는 ‘식’자를 이름자에 쓰다니. 유용함 대신 무용함을 택하여 화를 입지 말고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눈에 띄지 않는 수레 앞턱처럼~ 장자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니 갈등의 대부분은 유용하고 싶어서 부딪히는 마음장이다. 잘나고 싶고 이기고 싶고 그래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말이다. 소식의 이름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첫 항목,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소식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바람에 죽음에 처한다. 그러한 처지에서 쓴 문장에도 원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주위를 걱정하고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자신을 돌아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대목은 단지 선택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삶의 연유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인과를 스스로 짓는 것. 원망 대신 통찰로~ 소식의 이름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둘째 항목,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통찰하라!

“만약 우리에게 다시 백성을 복되게 하고 군주께 충성심을 바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우리는 일신의 안위를 개의치 아니하고 진력할 것이오. 화복은 조물주의 뜻에 맡길 뿐이지 않소?”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회신이 가장 인상적이다. 어떤 운명이든 받아들일 것이오. 화복은 내영역이 아니니 훌훌 벗고 ‘도’를 따라 힘쓸 것이라는 의미이다. 니체의 운명애이다. 험난한 인생도 한 번 더 돌 수 있다는 생의 의지!

그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자다. 그가 말하듯 모든 물건에는 모두 볼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너와 나를 가르는 그 경계를 통해 두려움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러면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없다. 경계는 시비선악미추를 나누고 거기서 한쪽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는 얼핏 복을 구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한쪽을 고집하면 실상은 기쁨과는 멀어진다. 얼마 전 기사에서 본 실험이 인상적이었다. 삶의 만족도가 높은 그룹은 부정적 정보가 주어졌을 때 뇌의 활성도가 커졌다는 내용이다. 앞시간의 ‘음양오행을 품은 육친’에서 보자면 상극을 당하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때 상생을 낳는 것과 연결된다. 세 번째 항목, 경계를 내려놓고 상황 그대로에 접속하라!

소식은 덜컹거리는 수레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균형을 잡으며 몰고 있었다.

덕분에 낚시 주머니가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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