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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영성세미나 S1] 1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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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리향 작성일23-01-25 10:38 조회2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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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머튼 영성세미나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16명이 신청하셨고, 첫날은 자기 소개시간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토머스 머튼이 궁금해서, 불교를 공부하다 가톨릭이 궁금해서, 마침 시간이 되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모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이당에서 기독교관련 세미나가 열려서 신기했다, 제도 종교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신앙에 대헤 새로운 해법을 토론할 수 있어서 좋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저도 앞으로 이 세미나를 할 생각하니 힘이 나고 기쁨니다~~

  토머스머튼은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 소설가를 꿈꾸면서, 술집을 전전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움 속에서 성장했다. 영국에서 캠브리지 대학을 1년 다니다, 미국으로 가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석사까지 마쳤다. 영문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그의 문체는 시적이면서 아름답다. 그리고 1941년 엄격한 시토 수도회 수련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수도원 생활에 돌입했고, 1948년 칠층산을 출간하고, 1949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66년 치료차 머문 병원에서 젊은 간호 실습생과 사랑에 빠지고, 1968년 태국에서 열린 수도원 상호협력 기구에 참석했다가 감전사로 사망한다.

  머튼의 위대한 점을 꼽으라면 방황했던 삶의 배경과 많은 인간적인 고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수도승으로 남았고, 새벽 2시에 시작되는 수도원 생활로 인해 독서와 저작의 시간이 지극히 적었는데도 방대한 영적 저서를 남겼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수도승하면 별 인간적인 고민없이 수행만 하면서 살 것 같은데 머튼은 그의 저서를 통해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민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고 그것을 깊게 사유하면서 글로 남겼고 그 길을 계속 갔다. 머튼의 고민은 자신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 즉 나와 너의 고민이다. 그래서인지 머튼의 글을 읽다 보면  내 안에 있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 내가 가진 모순과 다층적인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머튼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튼은 특별한 존재로서 이야기 하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가식이나 겉치레 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들을 드러내는데 끝나지 않고 가톨릭만의 전통이나 문화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고 관상을 통해서 깊은 통찰력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가치 또는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그럼 관상이란 무엇일까? 오늘 토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이기도 한 것인데, 관상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단어다. 세미나 회원 중에 관상기도를 해봤다는 분이 계셨는데  무언가를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온전히 안기는 것이라고 했다.  어렵고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머튼에 따르면 관상이란 "잃지는 않았지만 감추어져만 있던 나의 본래적인 정체성으로의 회귀"다. 관상은 머튼의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일 텐데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내 나름대로 최근에 공부한 양자물리학과 연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대부분은 모든 것이 분리된 입자적 세계관에 따라 산다. 입자란 안과 밖의 경계가 구분되어 있고, 매 순간 특정한 장소를 차지하고, 같은 위치에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자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면  전체란 독립된 부분들의 상호작용이기에 나라는 존재도 독립된 존재 즉 입자로서 다른 입자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나를 어떤 공간에 있는 고정된 물체로, 분리된 존재로 보면서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현대 양자 물리학자인 데이비드봄에 따르면 우리의 이 분리된 세계는 숨은 질서라고 불리는 아예 다른 층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출현한다. 숨은 질서는 끊임 없는 흐름으로 존재하는 전체가 하나인 세계다. 전체와의 관계가 각 부분에 영향을 주기에 단순히 부분들끼리 상호작용을 한다고 할 수 없고, 부분들이 전체 맥락에서 존재하기에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분리된 세계로 보이는 이 세계는 사실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끊임없는 흐름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체를 품고 있으면서 각자의 인연조건에 따라 전체의 일부분을 펼치며 세상에 참여하고, 변형되는 과정 속에 있다.하지만 우린 이 숨은 질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이 세계가 분리된 거라 여긴다. 

  머튼이 말하는 잃지는 않았지만 감추어져만 있던 나의 본래적인 정체성이란, 우리의 본래적 존재의 의미를 말하는 것 같다. 우린 본래 나뉘고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를 품고 있으며 그때 그때 변형되는 존재이지만, 눈에 보이는 분리된 세계를 전부라 여기다 보니 전체적인 사고가 아닌 분리된 사고를 하게 되었고, 나를 독립된 개체로 여김으로서 에고가 출현하게 되었다. 하지만 존재는 전체성을 기반으로 하기에 전체성이란 잃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채 발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의 평소 습관과 욕심으로 인해 이것이 드러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이런 전체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상을 통해 전체로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깨달았을 때 나오는 윤리가 사랑이고 자비 아닐까?

  이렇게 보면 하느님 사랑 안에 온전히 안기는 것이란 너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 본래적 정체성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관상은 우리의 본래적 정체성이기에 삶의 모든 부분과 함께 한다. 그러니 머튼에게 관상과 글쓰기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관상과 공부, 관상과 일상이 나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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