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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안녕, 나는 인간이고,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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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3-25 16:08 조회7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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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인간이고, 너는…
이윤하(남산강학원)

만난지 얼마 안됐을 때 올리버가 브롱크스에 있는 뉴욕 식물원에 산책하자며 저를 데려가 자신이 얼마나 고사리류를 사랑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양치류는 생존자니까”라고 답하더군요. 생존이 바로 올리버의 주제였습니다. “깨어남”에 수록된 환자들, 그들의 엄청나고 감동적인 생존이 바로 주제였죠. 올리버와도 관련 있는 주제고요. (빌리 헤이즈, 다큐 『올리버 색스 그의 생애』中)

신경학자이자 작가이고 그 자신이 환자이기도 했던 올리버 색스. 그의 친구 빌리 헤이즈는 올리버와 함께 식물원에 갔던 기억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생존’이 바로 올리버 색스의 주제였다, 라고. 올리버 색스는 온갖 독특한 신경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로 썼다. 글의 장르는 ‘병례사’(病例史/case histories). 신기하게도 그 ‘이야기’들이 환자들 각각에게 독특한 삶의 가능성을 선물했다. 환자들은 자기 삶을 인정, 혹은 긍정받는다고 느꼈고, 글을 읽은 다른 환자들은 용기를 얻었다. 그는 병을 없애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의사가 아니라, 존재 각각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의사였다.

삶은 불안정하고, 생명은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죽는다. 그것을 간과하며 사는 ‘인간’에게 ‘생존’이라는 말은 폄하되어왔다. 더 강렬(하게 보이는 듯)한 가치를 좇느라 바쁜 근대인들은 ‘생존’이라는 것의 경이, ‘살아있다’는 것의 경이를 잊고 산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구에 ‘생명’이라는 형태로, (그 생명이라는 것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약 30~40억 년 전에 등장해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당장 너무 추운 혹은 더운 곳에 떨어지거나, 물에 빠지거나(육지에서 폐호흡을 하는 경우), 물을 얻지 못하게 되면 금세 죽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 생명임에도 몇 십억 년이라는 시간을 생명은 대를 이어 건너온 것이다.

ocean-gfd052a5fc_640더 강렬(하게 보이는 듯)한 가치를 좇느라 바쁜 근대인들은 ‘생존’이라는 것의 경이, ‘살아있다’는 것의 경이를 잊고 산다.

지구라는 이 한정적인 공간에는 인간뿐 아니라 대를 이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들이 우글거린다. 동물과 식물과 균류들(현대 분류법에 따르면 원핵생물과 원생생물들도 있다), 오늘은 그중 프란스 드 발 선생님의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따라가며 동물들의 생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1. 진화인지학의 질문, 우리는 얼마나 똑똑할까?

프란스 드 발 선생님은 주로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를 연구하시기 때문에 인류학자보다는 ‘동물행동학자’, 혹은 ‘영장류학자’라고 불리신다.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라는 질문이 끌고 가는 책,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드 발 선생님은 이 모든 영역을 포괄한, ‘진화 인지(evolutionary cognition)’라는 용어와 함께 자신의 연구 방향을 보여주신다.

진화인지학은 인간도, 특정 동물도 아닌 ‘인지’ 그 자체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들은 까마귀라든지, 침팬지를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허공에서 ‘인지’라는 것을 연구할 수는 없기 때문에 특정 종을 연구하는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인지’라는 것 자체, 진화의 과정에서 ‘인지’가 한 역할들, ‘인지’가 만들어져온 과정 따위들이다. 따라서 진화인지학은 ‘인간’ 혹은 ‘영장류’를 지능의 정점에 은근슬쩍 놓으려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인 욕망과는 참 멀고 먼 학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진화인지학이 ‘인지’의 정체를 밝혀낸 학문이라기보다는 한창 진행 중인 학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알아낼 것’이 정해져 있는 학문이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하고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진화인지학은 굳이 ‘비인간주의’(드 발 선생님의 입장은 어떤 동물을 ‘비인간’이라고 할 거라면 동시에 ‘비표범’, ‘비돌고래’라고도 하지 그러냐는 입장이시다)를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중심주의에서 멀어지는 운동을 하는 학문이다. 진화인지학에서는 인간도 ‘인지’를 가진 다양한 생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brain-g1e3b0d1b2_640진화인지학에서는 인간도 ‘인지’를 가진 다양한 생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진화인지학자’ 드 발 선생님의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라는 발랄한 질문은 제기되는 것 자체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똑똑하다’는 명제가 흔들린다. 우리는 동물이 ‘똑똑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가? 그들의 똑똑함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알려는 노력, 즉 ‘인간이 제일 똑똑해!’라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인간적 인지’밖에 모르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은 왜 필요할까?

2. 다른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위 질문에 답하기 전에 드 발 선생님이 연구하시는 인지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인지cognition’는 “감각 입력 정보를 환경에 대한 지식으로 변환하는 정신 능력과 이 지식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능력”(p24)이다. 인지라고 하면 지능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인지는 신체적인 ‘지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동물들은 각기 다른 신체를 가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인지는 지각한 것을 세상에 대한 ‘앎’으로 변환시키고, 그 앎을 기반으로 ‘학습’할 수 있게 한다. 어디 물질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니 모호하게 들리긴 하지만, 생물학적 특성(본능)과 학습 사이의 영역이 인지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을 배우고주변의 방대한 정보를 걸러내는 나름의 전문화된 방법이 있다동물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고 모으고 저장한다동물은 음식물을 숨기고 기억하거나 포식 동물을 속이는 것처럼 한 가지 특정 과제에 놀랍도록 뛰어난 능력을 자주 보여주지만일부 종은 광범위한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프란스 드 발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세종, p425)

지금보다 동물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을 때, 학문의 영역에서 동물과 인지는 붙어있지 못했다고 한다. 동물도 생각하고, 욕망하고, 계획한다고 이야기하기까지는 많은 투쟁이 필요했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다른 동물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욕망하고, 계획하는지 모르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눈이 아니라 귀로 보는 박쥐가 감각하는 세상을 알 수 있을까? 몸에서 줄을 뽑아내고, 줄의 흔들림으로 먹이를 가늠하는 거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cobweb-g20c9881f5_640몸에서 줄을 뽑아내고, 줄의 흔들림으로 먹이를 가늠하는 거미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학계는 오랜 시간동안 다른 종의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오만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동물을 보상에 따른 행동 학습 기계 정도로 생각했다. 이렇게 인간과 동물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진행되는 연구는 적어도 인지학의 측면에서, 동물이 인간보다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매번 증명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한 편 가정에서는 자신들이 키우는 동물들이 생각할 줄 모르는 기계라고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동물들, 특히 포유류와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며 과도한 의인화의 오류를 저지르곤 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지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또다시 인간중심주의로, 동물들의 똑똑함을 얼마나 ‘인간’스러운지에 따라 평가하고 줄 세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다르게 생긴 저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저들이 살아가는 방식, 저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알 수 있을까?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이 질문은 성립한다. 나는 다른 개체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다른 개체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드 발 선생님은 그렇다, 아니 노력할 수 있다고 했다. 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상상력을 확대할 수는 있다, 라고 말이다.

colour-g582494a48_640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상상력을 확대할 수는 있다, 라고 말이다.

3.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나의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진화인지학은 관찰하고, 자연사를 연구하고, 그 위에서 제한된 조건의 실험을 고안하여 질문하고 답을 듣는다. 말로는 간단해보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왜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자가 되었는지 좀 알 것 같은 부분이랄까?^^).

진화인지 분야는 모든 종들을 빠짐없이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손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하든 아니면 코끼리 코의 다기능성이나 얼굴 인식 또는 인사 의식을 연구하든그 정신 수준을 짐작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해당 동물의 모든 측면과 자연사를 잘 알 필요가 있다그리고 우리가 특히 잘 하는 능력(예컨대 우리 종이 지닌 마법의 우물인 언어)을 대상으로 동물을 테스트하는 대신에 그 동물의 전문화된 기술을 테스트하는 게 어떨까그렇게 하면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의 계층 구조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지가 많이 달린 관목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같은 책, p41)

첫째, 관찰하기의 경우, 원래 살던 장소, 자연 상태에서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무엇을 발견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에 더해 실험실이나 동물원 같은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관찰을 한다. 적어도 총 2만 시간(?!)이라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을 쫓아다니고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구성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둘째, 자연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의 진화계통수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하나의 개체이지만, 그 개체가 출현하는 배경, ‘종’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언제쯤 어떤 종과 분화했고, 어떤 가지에 앉아있는지를 알아야 그 종의 신체와 인지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다른 종과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해서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종은 고정되고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진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가까운 조상을 공유할수록 서로 비슷한 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의인화를 어디까지 적용할지도 결정할 수 있다.

human-evolution-gff283dbbd_640가까운 조상을 공유할수록 서로 비슷한 인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의인화를 어디까지 적용할지도 결정할 수 있다.

셋째, 실험을 통해 질문하고 답을 듣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말’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과 함께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진화인지학자들은 동물과 ‘말’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해서, 단순한 직관이나 느낌을 가지고 동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험’이라는 언어를 사용해서 동물과 대화하기를 시도한다.

이를테면 어떤 실험을 고안해야, 침팬지가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실험이라는 언어로 인간은 질문하고, 동물은 그에 응답해준다. 인간이 가진 말도, 동물이 가진 소통 방식도 아니고, 둘 사이의 새로운 언어를 고안해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실험에 응답해준 동물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아니 이쯤 되면, 알게 되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은 종을 넘어, 자기 세계를 넘어 관계를 만들고 있다.

4. 종적 다양성의 세계에서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절대적인 노력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 다른 종 혹은 다른 개체의 인지에 대해 인간중심적으로 혹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나아가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지구 위에서 동물들은 그 종의 수만큼 다양한 인지를 갈고 닦으며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그것에 대해 더 훌륭하다, 덜 훌륭하다를 말할 수는 없다. 신체를 포함한 자기 조건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인지가 바로 그 생명을 살린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우리를 생존하게 한 모든 인지는 동등하게 훌륭하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 속에서 지구와 이 모든 생명이 함께 만들었다. 그렇다, 생존은 모호하고도 경이로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어째서 다른 종의 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내(인간의) 인지 방식에서 다른 종의 인지 방식을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을 넓혀가려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도덕적이거나 필연적인 방식으로 답을 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아마 그것이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충분히 느끼고 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생각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가? 라고. 내가 아는 것, 나에 대한 것, ‘나’로만 가득 채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 이질적인 것들, 다른 방식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채울 것인지 말이다.

diversity-g35ede4d36_640내가 아는 것, 나에 대한 것, ‘나’로만 가득 채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종, 이질적인 것들, 다른 방식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채울 것인지 말이다.

나는 아직 이것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 또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알기로 전자의 방법은 타자에 대한 무지한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고, 후자의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것만이 전자의 방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과 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또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인류에게 가장 중요했던 질문이다. 그 질문이 인간을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왔고, 생존하게 했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우리, 이 질문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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