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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궁금하다] 공동체를 구성하기- 국가 밖에서, 폭력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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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9-06 19:13 조회3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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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구성하기- 국가 밖에서, 폭력 없이

이 윤 하(남산강학원)

길고 울퉁불퉁했던 연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마지막이니 ‘인류학’이라 불리는 공부를 하면서, 제가 하고자 했거나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를 떠나는 것만이 목적지라고 생각하신 스승님과 함께 수렵채집민의 삶이 보여주는 호모 사피엔스의 마음을 이해해보고 싶었고,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더 많은 것을 주고 더 많은 관계를 떠안으려는 추장, 그리고 강제적 권력을 만들지 않기 위해 도주하고 ‘파쇄’되려고 하는 부족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글에는 아쉬운대로 그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과거의 다른 부족들, 혹은 과거의 모습을 아직 갖고 있는 부족들의 삶을 주로 연구합니다. 그곳은 과거라는 점에서 ‘지금’과도 거리가 있고, 다른 지역이라는 점에서 ‘여기’와도 거리가 있죠. 인류학은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곳, 나와 다른 사람들로 나아가서 시작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여기로부터 가장 먼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시원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시원이라고 해서 돌아가야 할 무엇이라거나, 우리가 떠나온 무엇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명’ 이전, 철기 발명과 산업 혁명 이전, 다시 말해 인간 자신의 의식이 인간 세계를 구축하고 인위적 동기들이 삶을 밀어가기 이전, 인간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현대인들을 보면 문명과 함께 자의식적 세계에 갇혀,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다른 존재들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전혀 감각하지 못한 채 깜깜한 무지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학은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발굴해냅니다. 우리가 꼭 이렇게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만 살았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살지 않을 능력도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하며 우리 역시 호모 사피엔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곧바로 인류의 시원과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의식을 갈고 닦는 대신 더 넓고 큰 지혜인 무의식과 접속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삶과 관계를 더 ‘인간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변과 맺는 관계를 바꾸며 변신하기를, 세계도 흔들리게 하기를 꿈꿔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멋진 세계를 보게 해주신 선민샘과 인류학 세미나 도반들, 그리고 인류학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인 공동체의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글을 썼습니다. 

너와 나를 ‘우리’로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길다면 긴 공동체 생활 동안 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배우는 중이고) 그러기 위해서 고민도 하고 나 자신의 습과도 싸워야 했다(싸우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수렵채집민들의 부족 정치는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 알아서 살기로 한다면 ‘공동체’ 혹은 ‘부족’의 결성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그 역시 공동체 혹은 부족의 파괴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너와 어떻게 ‘함께’를 말할 수 있을까?

1. 강제성 없는 권력

21세기, 신분도 없고 소명도 없는 시대. 우리는 이전과 달리 수많은 ‘우리’ 속에서 산다. 가족, 학교, 회사, 국가 등등. 나는 궁금하다, 무엇이 인간을 모이게 하는지? 현상적으로 보자면 돈이다. 또 제도다. 제도가 우리를 ‘우리’로 만들고, 돈이 우리를 모이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관계는 병이 들고 있다. 돈 많은 집안은 의가 상하고, 학교 폭력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제도는 만들 수 없으며, 겨우 만든 학폭위 역시 만만찮게 폭력적이다. 회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동료나 상사와는 친구가 되기 어려우며, 국민 의식은 스포츠 경기에서나 발휘되지 일자리 문제나 돈 문제 앞에서는 그런 것(우리 같은 한국 사람이잖아! 같은…;)을 본 적이 있나 싶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우리’의 영역은 결국 나의 이익에 따라 이리 저리 갈아치울 수 있는 표딱지 같은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어딜 가든 외롭고 불안하며, 운이 좋은 경우 작은 혈연관계 하나를 지키고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있는 공부 공동체는 특이한 곳이다. 제도 밖에 있으며, 훌륭하신 수장님이 계셔 돈이 모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돈이 우리를 모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공동체 안에서 ‘매니저’ 활동을 하고 있는 ‘청공자’의 멤버십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세미나들의 멤버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부 공동체이기 때문에 뜬금없이 농사에 주력한다거나 영상편집을 16시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공동체원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 또 공부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하게 하는 윤리들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무엇이 공동체원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하며 윤리를 지켜가도록 만드는가? 제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돈도 안 나오는데? 다시 말해, 무엇이 ‘우리’를 만드는가? (사람들이 왜 공부를 하고자 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강제성 없이, 경제적 이익 없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이 질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먼저 폭력과 별개인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들의 예는 정치권력이 없는 사회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중략) 권력의 개념이 무엇보다 강제에 의해 규정된다는 자민족 중심주의적 확신을 거부하고자 할 뿐이다. 사실상 권력은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원시 문화에서도) 폭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위계질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는 고대적 사회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치적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이학사, 29쪽)

클라스트르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곳에는 권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권력이 강제적 권력과 비강제적 권력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보통 ‘권력’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강제로 무언가 하게 하거나 못하게 하는 강제적 권력이다. 그렇다면 비강제적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비폭력적 정치를 말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힘인데, 아무런 강제성이 없는 힘인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부족정치에서 추장의 역할이다. 부족정치는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치와도 다르고, 고대 중국의 전제국가와도 다르다. 추장은 대통령도 왕도 아니란 소린데, 그렇다고 추장과 부족민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추장은 부족 내에서 가장 위신이 높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누가 추장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추장에게는 아무런 강제권이 없다. 클라스트르는 “무력에 가까운 권력, 권위 없는 추장권, 공허한 기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클라스트르가  추장의 세 가지 특징으로 꼽는 것은 이러하다. 첫째,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다. 둘째, 추장은 관대하다. 셋째, 말을 잘해야 한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자. 추장의 첫째 역할은 명령이 아니라 중재다. 추장은 집단의 평화를 지키고, 구성원간의 관계를 조율해 집단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제적 권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강제로 타협시키거나 화해시킬 수 없다. 오로지 설득! 만이 그의 무기다. 둘째, 관대하다는 것은 자기 재화를 축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많은 것을 받지만, 가장 많은 것을 주는 자이다. 추장의 위신은 많은 재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적절한 분배와 사용에서 온다. 셋째,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설득의 기술과도 관련이 있고, 노래를 잘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듯이 언변이 화려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족민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한다는 것이고, 또 부족민들을 말(과 노래)로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의 근저에 있는 추장의 조건은 ‘지혜’에 다름 아니다. 이 지혜는 집단 전체를 고려하고 사고할 수 있는 지혜이며, 동시에 부족의 주변(옆 부족, 날씨와 동물들, 식물군락 등등)과 부족을 조율해내는 지혜이다. 추장은 가장 많은 것을 보고, 가장 많은 것을 느끼고 있는 자다. 그렇기에 그는 부족민들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부족민들을 중재하고 설득하는 말을 할 수 있다. 부족민들은 추장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의무가 없다. 하지만 추장의 말이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혹은 하려고 했던 말이었을 뿐이다. 부족정치는 만장일치의 정치고, 추장은 그것을 끌어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다.

  이렇게 추장의 권력은 집단의 요구와 분리되지 않는다. 집단이 원하지 않는 것을 추장이 명령할 도리가 없으며, 집단은 추장을 떠나거나 교체할 수도 있다. 이런 추장의 ‘권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모여있는 집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2. 폭력은 권력을 파괴한다

한나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에서 폭력과 권력을 다른 것으로, 아니 오히려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폭력이 정치하는 장은 권력이 파괴된 장이다. 정치의 장에 폭력이 들어오는 순간, 전제정치가 시작되고, ‘권력’은 무너져 버린다. 그 아무런 강제성도 폭력성도 없다는 권력은 무엇일까?

권력의 발생에 유일하게 필요한 물질적 요소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가깝게, 함께 살아서 행위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 곳에서만 사람들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중략) 행위의 일시적 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을 함께 묶어두는 것은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함께 머물게 함으로써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권력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고립되어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그의 힘이 아무리 강하고 고립의 이유가 아무리 타당하다 할지라도 권력을 잃고 무능해진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302쪽)

폭력은 독점, 소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권력은 다수성(“사람‘들’이 함께 살아감”)과 관련되어 있다. 폭력은 그 수단(무기, 자본)을 소유한 자가 다른 이에게 가할 수 있는 강제성이다. 반대로 권력은 누군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현”될 때에만 존재한다. 권력은 ‘함께’를 구성하는 힘,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힘이다. 공자님도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한다고 하셨다. 이 ‘함께’는 조화[和]이지 동일해지는[同] 것이 아니다. 동일한 것들끼리는 조화를 이룬다고 하지 않는다. 다르기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추장은 권력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폭력을 쓰는 순간, 자기 자리도 잃고 만다. 추장의 관대한 행위와 중재하고 설득하는 말은 모두 권력의 장을 계속 실현시키고자 하는 가장 가시적이고 높은 차원의 노력이다. 추장의 말이 옳다면 추장이 말해서 옳은 것이 안라 옳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추장이다. 추장이 권력의 장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많은 의무를 안고 있다면, 부족민들 모두도 그 권력의 장을 현상하는 각각의 주체들이다. 그들 역시 집단을 이루고자 하는 필요성과 압력을 가진다. 그것이 없다면 부족을 떠나도 좋다. 각자의 자리에서 ‘부족을 이루고자’하는 행위는 서로 다르고, 심지어 반대될 수도 있고, 투쟁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때에는 투쟁 자체가 조화다.

추장은 권력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폭력을 쓰는 순간, 자기 자리도 잃고 만다. 추장의 관대한 행위와 중재하고 설득하는 말은 모두 권력의 장을 계속 실현시키고자 하는 가장 가시적이고 높은 차원의 노력이다.

  아렌트가 모델로 삼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클라스트르가 관찰한 남아메리카 수렵채집민 부족은 결국 서로 다른 정치 구조를 가진다. 여기에 남산강학원이라는 공부 공동체도 끼워넣는다면 더욱이 ‘이렇게 모여있는 집단’은 서로 너무 다른데, 이를 모두 충족하는 ‘정체’에 대해 답을 내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역시 강제성 없는 권력이 갖는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폭력정치는 어디에 가나 똑같은 모습의 집단을 구성한다. 하지만 폭력 없이 구성된 집단은 그것을 모으는 권력의 모습이 다양하기 때문에 집단의 모습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집단들의 모습은 현대의 민주주의가 억지로 받아내는 동의와 자발적 권력 이양 모델과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집단 내에서 권력은 어디에서 어디로 양도되거나 이양된 적이 없다. 모두가 권력을 실행하는 자이고, 가장 많은 의무를 떠안은 자가 권력의 장을 더 힘들여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세 가지 공동체 모델은 폭력과 강제성 없이도, 더 나아가 그것이 없어야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집단과 구성원이 분리되지 않는 원시 사회의 법

남산강학원에서는 1년짜리 장기 프로그램을 들어야 주방에 밥당번으로 진입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세미나만 몇 개 들어서는 주방에 발도 못들이고 공동체를 떠나기 십상이다. 강제성이 없다고 해서 공동체에 문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공동체는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개체고, 안과 밖의 경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밥을 남기지 않고 먹고, 마지막엔 접시를 식빵으로 닦아 먹어야한다. 조금 남았다고 음식을 버리거나, 식빵으로 접시 닦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아무리 에세이를 잘 썼다고 해도 외부인이다. 그대 마음대로 하는 것을 어찌 강제할 수는 없지만, 이 문턱을 넘어오지 않으면 공동체원이 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부족 사회에서 공동체의 문턱을 볼 수 있는 지점은 입문 의례(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이라고도 불린다)다. 입문 의례는 남아메리카뿐 아니라 대부분의 원시 사회에서 행해진다. 공동체에서 자란 청년이 성인이 되려면, 즉 하나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면 모두 거쳐야 한다. 그 의례의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부족마다 실행하는 의례와 그 의례가 갖는 논리는 다르지만 정신을 잃을 때까지 신체에 고문을 가하는 것은 동일하다. 단식과 잠을 자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몸에 구멍을 뚫거나 신체를 절단하기도 한다. 이 고문 속에서 살아남아야 청년은 비로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자, 이 문턱은 강제적 폭력과 어떻게 다를까? 클라스트르는 이를 근대 국가의 법과 비교하고자 한다. 그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인 우리 공동체의 윤리들도 그것이 ‘강제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모든 법은 ‘쓰기’와 관련 있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지속되고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과 전제군주, 황제는 자기 말을 돌, 가죽, 종이에 써야 했다. 법은 쓰여있기 때문에 힘을 가지고 지속되며 정당해진다. 군주도 문자도 없는 원시사회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원시사회의 법은 군주의 명령이 아니라 사회 자체이고, 그 법은 부족민들 각자의 신체에 쓰인다. 입문 의례가 바로 그 쓰기의 현장이다.

입문 의례를 통해 사회는 젊은이들의 신체에 사회의 각인을 새겨 넣는다. 이제 상처, 흔적, 각인은 없어질 수가 없다. 살갗 깊숙이 새겨진 그것은 고통이 단지 나쁜 기억으로 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그 고통이 공포와 전율과 함께 경험된 것임을 영원히 증명해준다. 각인은 망각에 대한 장애물이고, 신체 자체가 기억의 흔적을 간직하고 신체가 기억이 된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228쪽)

클라스트르는 부족사회의 입문 의례가 ‘국가의 법’에 대항하기 위한 절차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근대국가에서 법의 속성은 법과 그것의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법은 군주의 입에서 나오고, 돌이나 종이에 쓰인다. 그리고 그 법은 인민을 향한다. 이렇듯 명령과 그것을 수행하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폭력의 행사가 가능한 강제적 정치의 장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뭐가 ‘법’이라고 쓰였는지 인민이 어찌 아냐고? 그래서 초기 국가보다 더 똑똑해진 근대 국가는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국민은 책상 앞에서 국가의 법을 스스로에게 교육시킨다.

  원시 사회의 법 쓰기인 입문 의례는 부족민의 신체에 “사회의 각인”을 새기는 일이다. 신체 고문을 통해 의례는 청년들의 신체에 잊지 못할 자국을 남긴다. 여기에서 법은 부족민 개개인의 신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원시 사회의 법은 부족민의 신체 이외의 곳에 쓰일 수 없다. 기억 자체가 된 신체는 사회의 법을 구현하고, 법 자체가 된다. 법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신체의 에토스가 된다! 

  공동체의 문턱인 이 입문 의례를 거쳐갈 때 입문자들이 지켜야 할 것 하나는 ‘침묵’이다.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청년은 공동체의 의례와 타협할 수 없고,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이 오더라도 침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폭력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명령하는 자와 수행하는 자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령하는 자는 부족이고 수행하는 자도 부족이다. 그렇게 어린아이였던 청년은 부족의 구성원이 된다.

  이것이 남산강학원의 용어로 하면 ‘자기 윤리’가 된다. 명령하는 자는 자기고, 수행하는 자도 자기다. 이들의 입문 의례만큼 잔인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윤리가 곧 자기 윤리가 되려면 신체가 변해야 하고, 공부하는 신체가 되는 일도 여러모로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선배나 튜터 선생님은 절대군주가 아니기 때문에 신입 구성원들에게 무엇도 강제할 수 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면 제시된 문턱을 넘는 입문 의례를 거쳐야 한다. 식빵으로 접시를 닦아먹는 공동체의 윤리들을 지키는 것부터 중독된 것을 끊는 등 함께 공부할 수 없는 습을 버리는 일까지, 다양한 에토스들이 요구되고, 자기 윤리를 만들어가는 나는 구성원이면서 집단 자체가 된다. 공동체의 윤리 역시 어디 따로 쓰여있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윤리 위에서만 현상되는 중이다.

  공동체의 문턱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같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집단과 분리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개개인이 모여 공동의 의견을 만들어내는, 모든 구성원들과 분리되어 초월된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사는 현장이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개입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이 운동 자체가 내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가는가와 따로 떨어져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옆 친구가 공부하는 모습이 나 자신과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동체의 윤리 또한 절대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장 위에서 매번 실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중심을 파쇄하기

클라스트르는 원시 사회에서 신체에 새기는 법이 “너는 그 누구보다 낫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다”는 불평등 금지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명령하지 않으리라는 법을 신체에 새기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전제군주가 출현할 수 없다. 그럼 국가는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국가의 기원과 그 발생의 차서에 대해서는 가설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인구수/인구밀도와 국가 기원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구체적인 국가 발생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공동체가 어떻게 국가화 되어버릴 수 있는지 그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있는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전제군주가 있는 듯이 살 수 있으며, 관료가 된 듯이 활동할 수 있고, 제도 속에서 공부하듯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집단을 국가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지구적 인클로저가 진행되기 이전, 사람들은 국가의 신민이 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은 국경과 국경이 맞붙어 국민이 아닌 사람들은 난민으로 분류되고, 생존이 쉽지 않아 또 다른 국제적 문제로 여겨지지만, 지구 전체가 ‘국토’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이때 국가-기구의 침투가 어려운 지역으로 도주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임스 c.스콧은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남아시아에 걸쳐있는 고지대(이하 ‘조미아’)에서 살아간 소수민족을 통해 국가 바깥의 삶을 연구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유명한 인류학 저서 『총, 균, 쇠』가 국가 중심의 문명사를 파고 든다면 스콧의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구성된 국가에서 도주한 사람들의 흔적을 파고든다.

  국가 밖에는 세금과 부역, 징집 등의 수탈을 피해서 산지로 자발적으로 도주한 사람들도 있었고, 애초에 국가 중심과 먼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삶의 양식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다. 국가의 수탈을 피해서, 국가 밖에서 생존하는 법은 국가가 유지되는 방식과 반대로 집단을 운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곳에서 한 번에 익는 곡류 작물 대신, 이동적이고 익는 시기가 서로 다른 뿌리 작물을 재배한다. 정착지를 갖는 대신 이동한다. 왕처럼 고정적인 우두머리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든다. 변방에서도 어느 정도의 연합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중심을 유지하기 위한 착취, 수탈에 용이하게 구조화된 국가와 반대로 이들 연합체는 이동성과 파쇄성을 계속해서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국가 아닌 집단을 유지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이 글의 앞부분으로 돌아가게 한다. 수탈이 불가능하게 와해되기. 즉 ‘폭력’ 행사가 불가능한 다수성의 집단을 유지하기. 

이것(정체성의 유동성과 애매모호함)이 불안정한 국가 체계들의 틈에 존재했던 파쇄 지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고, 그곳에서 나타나는 정체성은 변화무쌍했다. 공간과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길을 나서기 위해, 말하자면 대부분의 산악 문화는 이미 여행 가방에 짐을 싸둔 셈이다. 그들의 다양한 언어와 종족 소속감의 레퍼토리, 종교 운동을 통한 재창조 능력, 짧으면서도 구술로 전달되는 족보, 분화하는 능력 등 모든 게 그들의 각별한 여행 가방에 들어가 있다. (중략) 그들은 상황에 따라 독자적으로 또는 결합하여 활용할 수 있는 온갖 역사를 갖고 있었다. (제임스 c.스콧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삼천리, 553쪽)

그들의 다양한 언어와 종족 소속감의 레퍼토리, 종교 운동을 통한 재창조 능력, 짧으면서도 구술로 전달되는 족보, 분화하는 능력 등 모든 게 그들의 각별한 여행 가방에 들어가 있다.

뿌리 작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정치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체성의 유동성과 애매모호함”이다. 정체성을 유동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갖는 것은 국가가 통일화된 역사를 찍어내는 것과 반대된다. 평야지대에서 국가가 ‘모국어’와 ‘민족’ 따위의 개념으로 사람들을 동일성의 장에 묶어두려 한다면, 조미아인들은 구술로 전해지는 유연한 역사, 다양한 종족에 연결될 수 있는 레퍼토리를 갖는다. 정체성이 유연하고 애매모호하면 어디로 이동해서든 다른 이들과 연합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이런 언어를 쓰고 저쪽에 가면 저 언어를 쓸 수 있어야, 이들과는 이렇게 친척, 저들과는 저렇게 친구를 할 수 있어야 왕 없이도, 국가라는 중심 없이도, 제도의 보호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조금 급하게 논의를 다시 끌어오자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곧 반-국가 운동이 된다. 물리적으로 국가가 아닌 곳에서 살 수 없는 21세기다. 그렇지만 우리가 맺는 관계를,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장을 국가 모델 없이 사고할 수 있으면 서로를 수단화하고 착취하는 폭력의 장에서 벗어나 권력과 행위의 장을 일시적이나마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에는 문턱이 필요하고 어떤 공동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필요하지만, 그 정체성이 날이 갈수록 축적되고 강화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도착해야 하는 곳을 설정하지 않는다. 남산강학원의 비전이 공동체의 확대라던가, 뭐라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청년들을 물심양면 키워주시는 곳이지만 청년들이 뭐가 안 된다고 해서 그 실적(?)에 실망하기만 하시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어떤 신입 구성원이 오더라도 그에 맞는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고, 어떤 책을 만나더라도 공부해버릴 수 있는 지성을 연마하기를 바란다. 중심이 도그마가 되지 않고, 원칙이 제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오로지 말(=지성)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정체성이라는 것이 영원히 고정된 말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이 공동체가 외부와 또 구성원과 맺어가는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세밀하게 포착해가야 한다.

  나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것은 타자들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군주가 아닌 것처럼, 군주가 아니다. 이렇게 도착해야만 하는 곳 없이, 되어야 하는 나 없이 공부한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국가 안에서 사는 것보다 불안한 일일 수 있다. 대신 조미아인들처럼 어떤 땅에도 뿌리를 내려 생존할 방도를 찾아내고, 그를 위해 옆 사람들과 ‘함께’를 구성할 수 있으면 된다. 유연한 정체성은 많은 부족민 친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이번 화를 마지막으로 <‘인간’이 궁금하다> 연재가 종료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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