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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참으로 난감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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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1-28 09:36 조회3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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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난감한 자유

최 숙 자(감이당)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카피에서 연상되는 것은 ‘자유’라는 단어다. 자유는 언제나 구속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가슴 설레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장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면 모든 게 다 해결 되는 것일까? 육체를 가진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질문이 꼬리를 문다.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자. 우리는 정말 자유를 원할까? 생각해보면 의외로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많은 이들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멘토를 찾아다니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지하고 싶어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사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자유라는 말은 괴로운 말이다. 자유라는 것은 어쩌면 곤란함을 동반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가 드러나는 순간

칸트는 “자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실재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다”(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22쪽)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인과법칙을 따르는 지극히 정념적인 존재다. 현실의 원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스피노자, 『에티카』, 3부, 정리6, 7)처럼 자기보존의 원리이므로 자신의 경향성과 쾌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은 선악의 구분이 없고 다분히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 세계에서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이성을 가진 존재다. 이성은 우리의 지성적 앎의 한계를 넘어 어떤 물음(영혼, 우주, 신)을 시작한다. 이 지점에 의해 인간은 물질계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가 된다. 인간의 앎은 우리의 인식주관을 넘어설 수 없는 데도 무조건자를 사유하려는 이성의 작용으로 이율배반(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326~344쪽)이 발생하고,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계 너머에 예지계를 배치한다. 현상계는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자연의 인과법칙이 적용되는 감성세계이고, 예지계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초 감성적 장소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르게 이성을 가진 존재다. 이성은 우리의 지성적 앎의 한계를 넘어 어떤 물음(영혼, 우주, 신)을 시작한다. 이 지점에 의해 인간은 물질계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가 된다.

  실천적 영역에서 우리의 의지는 자유롭다. 자유가 “확보됨과 동시에 도덕법칙은 감성세계의 일체의 여건과 모든 이론적 이성 사용의 범위로부터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순수한 예지적 세계를 고지”(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88쪽)한다. 자유라는 이념은 생각만 할 수 있지 경험 대상으로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실천적인 영역에서는 자유의 법칙을 의식한다. 정념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도덕법칙을 강력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는 예지계로 가는 통로이자,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으로 이뤄진 순수이성의 전체 건물의 마룻돌 역할”(같은 책, 22쪽)을 한다.

   초월적 자유는 일체의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자유 없이는 그 어떤 도덕법칙도 가능하지 않”(같은 책, 165쪽)다. 자유가 가능해야 도덕법칙이 우리 의지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이성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자유는 “이성적 존재자에게 주어진 근원적인 능력”(같은 책, 97쪽)으로, 우리에게 시공간이라는 선험적 직관 형식이 왜 주어졌는지 인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직접 접근할 방법은 없다. 칸트에게 도덕법칙은 이미 경험적 질료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하는 것이고 우리의 자유는 도덕법칙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의지로 행사되는 도덕은 현상계의 행복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니 행복 따위는 전혀 돌보지 않아야 진정한 도덕의 지위를 얻는다. 만약 도덕이 현실원리로 작동한다면 오직 누구의 감각과 취향이 더 강한 힘을 갖느냐는 권력의 문제가 될 것이고, 도덕성의 가치는 훼손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 표현으로서의 도덕은 자연적 욕망을 뿌리치고, 예지계의 명령을 따르려는 투쟁 속에서 발생한다. 경향성과 도덕법칙 사이에서 질문하고 고뇌하는 자리가 바로 자유의 자리인 것이다. 필연적인 사건이었지만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이런 “분열이야말로 자유가 드러나는 순간이다.”(같은 책, 233쪽)

현실에 대한 절망

칸트는 자연계에서 인간이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은 예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해진 매커니즘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자유를 실행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자유의 실현으로서 도덕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일체의 대상(경향성, 쾌의 원리, 행복주의, 기독교)을 떼어낸 텅 빈 형식, 그 공백에서 울려 퍼지는 의무와 강제의 목소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은 어떠한 당위와 강제의식 같은 것으로 무조건적 명령이다. 때문에 “인간이 의무감과 숙명의 느낌 없이 도덕법칙을 마주한다는 것은 불가능”(같은 책, 77쪽)하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A54)는 정언명령은 현실에서의 적용원리인 준칙이 예지계의 법칙과 일치가 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도덕법칙은 현실의 행동원리인 “준칙 주위에 머물면서 우리를 고뇌”(같은 책, 67쪽)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덕법칙을 따르는 이유는 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칸트의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 채택된 준칙의 보편성은 절대 외적인 조건이 아니다. 선택은 원리는 나의 의지 밖에 없다. 자기 자신 속에서 도덕적 법칙을 자율적으로 입법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된다. 오직 스스로 정립한 법칙에 자기 자신이 복종하는 것이 도덕적 인간의 자율이다. 스피노자에게 “자기 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스피노자, 『에티카』, 1부, 정의1)으로 신만이 자기원인이다. 그러나 칸트에 이르러 인간은 예지계적 존재로 “언제나 자신을 원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166쪽)가 된다. 인간이 신적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인간 위엄의 근원은 감성세계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무조건적 실천법칙을 따르는 인격성(personality)에 있다. “인격성은 자유이자 전 자연의 기계적 성격으로부터의 독립성”(같은 책, 153쪽)으로 고귀한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이 예지계적 존재로서 신성성을 갖는다는 말에는 근원적 비극성을 함축한다. 도덕이 자연세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연적 세계 속에 무기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예지적 존재로서의 숭고함은 자연적 인과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유는 현실에서 어떠한 결과도 약속해 주지 않으며, 끝없는 불안 속에 우리를 서성이게 한다. 더불어 이 자유의 덕목은 종교, 전통과 미풍양속 법률과 규칙의 이름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를 억압하고 제한하려는 모든 것을 거부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모든 안전판을 제거하고 오로지 추상같은 정언명령의 목소리에 따라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만약 최고선이 현상계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광신에 빠지는 것이다.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사이비가 된다. 

자유는 현실에서 어떠한 결과도 약속해 주지 않으며, 끝없는 불안 속에 우리를 서성이게 한다. 더불어 이 자유의 덕목은 종교, 전통과 미풍양속 법률과 규칙의 이름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를 억압하고 제한하려는 모든 것을 거부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통해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킨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의 완전한 보증자로서의 ‘신’을 찾기 위해 자신의 저작 「성찰」의 대부분을 ‘신 존재 증명’(데카르트, 최명관 옮김, 『방법서설·성찰 데카르트 연구』, 「성찰」 중 성찰3, 성찰5)에 할애한다. 데카르트의 경우는 생각하는 나의 근거 없음이라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든 셈이다. 그러나 칸트는 보증자 없이 주체에게 신적인 지위를 부여함으로 무한자유와 함께 무한책임이라는 짐을 지게 만들었다.

  스피노자의 경우 인간은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와 작용으로 결정되”(스피노자, 『에티카』, 1부, 정리28)므로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오직 신(같은 책, 1부, 정의3, 정의6)만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신은 자연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므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철학에서는 자유와 필연이 대립되는 말이 아니며, 자유는 어떤 법칙적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성을 이용해 자신의 인식을 확대해 나가기를 거듭하여, 신적 직관에 이르는 3종 인식 단계에 도달하면 자유에 가까워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한 자유는 어떤 거대한 자동기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일 따름이다.

  이성적이지만 정념적이기도 한 유한한 존재자인 우리는 최고선을 향해 무한히 전진해 갈 수 있을 뿐이다. 이 무한성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도덕법칙과 일치하고, 우리의 희망이 신의 의지에 합치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결국 자유의지에 따른 선을 향한 전진은 믿음의 영역에 도달하고 말았다. 최고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피조물에게 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마음씨가 시련 받고 있다는 의식”, “악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 더 한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193쪽)뿐이다. 결국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도덕적 선택은 현실의 절망으로 나타날 확률이 높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자유

우리의 자유는 내면의 경향성과 싸우는 내면의 자발성이다. 현실의 행복을 위해 자유를 원한다면, 칸트의 자유는 참으로 난감한 자유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행복 따위는 버려야 하는 자유인 것이다. 때문에 칸트의 분열적 주체는 진정한 허무주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자유를 실행해야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삶을 산다는 것은 깜깜한 암흑 속에서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정언명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실세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어쩌면 천 길 낭떠러지일지도 모를 곳을 향하여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것이다. 신의 명령에 순종해 100세가 넘어서 얻은 아들 이삭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복종과 같은 단순함으로,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며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애원하면서도 숙명처럼 신의 명령에 따르는 예수처럼 자신의 육체성을 버려야 하는 지도 모른다. 예수는 선의 완성자였지만 현실의 패배자였고, 세계에서 추방됨으로서만 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선은 현실에 배반당하기 쉽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선이 애당초 자연계에 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행자로 어떠한 결단 속에서만이 인간은 인격성을 획득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정의롭게 홀로 외로운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 순정한 존경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이 인간의 길을 걸어갔으므로. 영혼의 순례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 키스의 묘비명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이다. 아마도 이 작가는 칸트 자유의 비밀을 알고 있었나 보다. 자유에게 기대할 현실적 이익이란 없다는 것을. 아니 기대 따위는 버려야 자유인이 된다는 사실을. 아무런 기대 없이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명랑할 수만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 부르리라. 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자유의 실행자로 어떠한 결단 속에서만이 인간은 인격성을 획득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정의롭게 홀로 외로운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에게 순정한 존경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이 인간의 길을 걸어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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