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통해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킨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의 완전한 보증자로서의 ‘신’을 찾기 위해 자신의 저작 「성찰」의 대부분을 ‘신 존재 증명’(데카르트, 최명관 옮김, 『방법서설·성찰 데카르트 연구』, 「성찰」 중 성찰3, 성찰5)에 할애한다. 데카르트의 경우는 생각하는 나의 근거 없음이라는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든 셈이다. 그러나 칸트는 보증자 없이 주체에게 신적인 지위를 부여함으로 무한자유와 함께 무한책임이라는 짐을 지게 만들었다.
스피노자의 경우 인간은 “다른 원인에 의하여 존재와 작용으로 결정되”(스피노자, 『에티카』, 1부, 정리28)므로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오직 신(같은 책, 1부, 정의3, 정의6)만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 신은 자연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므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철학에서는 자유와 필연이 대립되는 말이 아니며, 자유는 어떤 법칙적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인간도 이성을 이용해 자신의 인식을 확대해 나가기를 거듭하여, 신적 직관에 이르는 3종 인식 단계에 도달하면 자유에 가까워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한 자유는 어떤 거대한 자동기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일 따름이다.
이성적이지만 정념적이기도 한 유한한 존재자인 우리는 최고선을 향해 무한히 전진해 갈 수 있을 뿐이다. 이 무한성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도덕법칙과 일치하고, 우리의 희망이 신의 의지에 합치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결국 자유의지에 따른 선을 향한 전진은 믿음의 영역에 도달하고 말았다. 최고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피조물에게 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마음씨가 시련 받고 있다는 의식”, “악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 더 한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북튜브, 2021, 193쪽)뿐이다. 결국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도덕적 선택은 현실의 절망으로 나타날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