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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3] 사람과 사람-아님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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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5-26 08:03 조회2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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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아님의 갈림길에서

근 영(글공방 나루)

 天地否(천지비)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비지비인, 불리군자정, 대왕소래

비괘는 인간의 길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지킴에 이롭지 않으니,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

 

初六, 拔茅茹, 以其彙, 貞, 吉, 亨. 발모여, 이기휘, 정, 길, 형

초육효는 띠풀을 뿌리째 뽑듯이 그 동류와 무리지어 바르게 지키면 길하고 형통하다.

六二, 包承, 小人吉, 大人否, 亨. 포승, 소인길, 대인비, 형

육이효는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윗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소인의 경우에는 길하고 대인의 경우에는 막힌 것이니 형통하다.

六三, 包羞. 포수

육삼효는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九四, 有命无咎, 疇離祉. 유명무구, 주리지

구사효는 군주의 명이 있어 행하면 허물이 없으니 동류가 복을 누린다.

九五, 休否, 大人吉, 其亡其亡, 繫于苞桑. 휴비, 대인길, 기망기망, 계우포상

구오효는 막힌 것을 그치게 하니, 대인의 길함이다. 나라가 망할까, 망할까 염려하여 뽕나무에 칭칭 동여매고 묶어 놓듯이 하는 것이다.

上九, 傾否, 先否後喜. 경비, 선비후희

막힌 것이 기울어짐이니 우선은 막히고 나중에는 기쁘리라.

주역을 공부하다 보면 유독 머리에 남는 괘가 있다. 천지비天地否 괘가 그렇다. 비否괘의 괘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否之匪人비지비인.” 아닐 ‘비匪’에 사람 ‘인人’. 그러니까 비괘란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사람이 아니므니다’라는 말이 떠올라서였을까. 아니면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직설 화법의 시원함 때문이었을까. 난 무언가 허를 찔린 듯한 느낌, 예기치 못한 반전을 만난 기분이었다. 

doubts-3747362_640“否之匪人비지비인.” 아닐 ‘비匪’에 사람 ‘인人’. 그러니까 비괘란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모름지기 《주역》이란 하늘의 도를 배워 인간의 길을 찾는 지혜라 할 수 있다. 그런 책에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는 괘가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경우는 지독히 악한 행위와 마주했을 때다. 즉, 거기에는 도덕적 의미가 담긴다. 하지만 주역은 좀 다르다. 비否는 막힘이다. 막혀서 통하지 않고, 통하지 않아 세상과 단절된 상태. 이것이 주역이 말하는 사람-아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비괘의 위에는 하늘이, 아래에는 땅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보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 하늘과 땅이 자기 위치에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괘는 형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주역은 이처럼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는 모습을 매우 좋지 않다고 얘기한다. 사람-아님이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왜일까? 역설적이게도 그건 하늘과 땅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위에 있고자 한다. 그리고 땅은 아래에 처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미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있다. 하여 하늘과 땅은 더는 움직이고 변화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하늘은 하늘대로 더욱 위로 올라가려 할 뿐이고, 땅은 땅대로 더욱 아래로 향할 뿐이다. 하니 위와 아래가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지 않는다. 요컨대 막힘이다. 

비괘에 앞서서 나오는 태泰괘는 이와는 정반대다. 지천태地天泰,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다. 하여 땅은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하늘은 위로 올라가려 한다. 이 과정에서 땅과 하늘이 만난다. 서로 엉키고 뒤섞여 함께 하게 된다. 이 활발발한 교통과 변화가 태괘의 길하고 형통한 시공간을 만든다. 

사람이란 소통을 해야 살맛 나게 산다. 불통으로는 도대체 살 수 없다. 아무리 물질적 풍요를 누려도, 사회적 성공을 이뤄도 삶이 허망한 이유, 마음이 불안한 이유. 그건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된 삶. 이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삶의 의미를 앗아가는 것이며, 나아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이 아무리 위대하다해도, 땅이 아무리 넓다해도 하늘 혼자만으로는 땅 혼자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 이러한 분리야말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gozha-net-xDrxJCdedcI-unsplash이미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있다. 하여 하늘과 땅은 더는 움직이고 변화할 이유가 없다.

근래 들어 유행하는 SNS는 분리된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SNS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SNS는 불통의 첨단이 되어버린 듯하다. SNS에 있다 보면 나는 나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과는 거의 만나지 못한다. 나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이야기들에 ‘좋아요’를 누르게 되고, 그러면 다시 그런 경향성을 가진 추천물들이 뜨게 되고, 다시 나는 그런 이야기들에 ‘좋아요’를 누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내 주위에는 온통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 남게 된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내 입맛에 맞는 것들을 쏙쏙 골라주는 AI 덕분에 나는 내 귀에 편안한 이야기들만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내겐 그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양 느껴진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사회적 사건이나 정치적 이슈가 생기면 돌연히 그 지워진 세계가 출현한다. 하지만 이미 내게는 그런 타자들을 이해할 단서가 거의 없다. 수많은 ‘나들’로 둘러싸인 삶에서 나의 의견이 곧 진실이요, 타자는 온통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집단이다. 양극단으로 나뉘어 불통이 되어버린 상태. 서로가 서로에게 몹쓸 존재, 쓸어버려야 할 존재로 여겨지는 이 상황에서 불통은 증오로 이어진다. 

모든 막힘은 폭력을 품고 있다. 지난 시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있던 냉전 시대가 그러했고, 드높은 이상만을 앞세워 문화적 지반을 초토화해버린 중국의 문화혁명이 그랬다. 육체를 터부시하며 순수정신을 내세운 중세 기독교, 마음의 길을 잃어버린 자본의 물질만능주의,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이성 등. 이 모두가 삶을 황무지로 만든다. 

생명은 막힌 채로는 살 수가 없다. 소통과 교류가 생명을 생명이게 한다. 그런데! 그 흐름을 만드는 힘은 묘하게도 생명이 가진 ‘불균형’에서 온다. 태괘가 말하듯, 하늘이 아래에 땅이 위에 처하는 그 자리의 어긋남이 둘의 만남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여 비괘처럼 하늘과 땅이 자기 자리에 머물며 오직 자기 동일성만을 지키고 유지하려 들 때 생명의 흐름은 멈춰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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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조직하는 우주》를 쓴 물리학자 에리히 얀치는 이러한 생명 활동의 동력을 ‘비평형’에서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생명의 활발발한 운동은 “평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사람이 계속해서 앞으로 뒤뚱거리며 나아가야만 비로소 콧방아를 찧으며 고꾸라지지 않을 수 있는 광경”과 같다고. 재밌지 않은가. “평형이란 정체 및 죽음과 같은 말이다. 자기 조직 과정들을 유지하는 고도의 비평형성은 다시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의 계속적인 교환, 바꾸어 말하면 대사(代謝)에 의해 유지된다.” 비평형이 만드는 끝없는 순환. 이것이 우주가 움직이는 기본원리다. 생명은 모두 이런 어긋남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불완전함이다. 하지만 불완전하기에 생명은 생명일 수 있다. 

하여 생명에게 자기 동일성을 고수하는 것은 치명적 위험이 된다. 거기에는 어떤 운동과 변화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견고한 경계야말로 반생명적이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아 속에, 자기 세계 속에 들어앉아 있는 이 막힘으론 살아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살고 싶다면 우리는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숨구멍을 내야 한다. 타자가 들어오고, 내가 흘러나갈 수 있는 그런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는 산다!

그렇기에 주역은 막힘이란 오래될 수 없고, 반드시 경계를 뚫고 소통하려는 힘을 불러들인다고 말한다. 그래서 비괘의 효사는 괘사와는 달리 그다지 나쁘지 않다. 우리가 생명인 한 이 비색한 시공간을 여는 기운들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려 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괘의 효사들은 길(吉)이나 형(亨), 또는 무구(无咎)나 기쁨[喜]으로 끝을 맺는다. 단, 삼효만 빼고! 

비괘의 삼효에는 길도 흉도 무구도 없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六三, 包羞. 육삼, 포수. 육삼효는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삼효는 음유한 데다가 자리가 바르지 않고 중하지도 않다. 정이천은 이를 “윗사람과 매우 가까워서 정도를 지키면서 자신의 운명에 편안해할 수 없으므로 궁색해지면 이에 온갖 욕심이 끓어 넘칠 것이니, 소인의 모습의 극치다. 그 마음속에 품은 모략과 사려들이 올바르지 못하고 욕심에 차서 하지 못할 일이 없으니, 수치스럽다”라고 말한다. 《주역 전해》의 김경방은 “육삼은 남을 미혹시키거나 남을 농락하려 하여도 쉽게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육삼은 부끄러움을 참고 자리를 견고히 하여 떠나갈 마음이 없으며, 자리만 차지하고 녹만 먹으며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끄러움을 품는다는 것이다”라고 푼다. 한편 소동파는 “삼효는 본래 양의 자리이기 때문에 양의 무리를 덮어 싸고 받들면서도 부끄러운 일임을 아는 것”이라고 읽는다. 모두가 대동소이하게 육삼은 무언가 부끄러운 짓을 하여 흉한 효사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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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왜 ‘포수包羞’라는 말 뒤에 흉이나 유회(有悔, 후회할 일이 있다) 등의 말이 따라붙지 않는 것일까. 음유하다는 것을, 자리가 바르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을까. 음유함은 속이 시커먼 음암한 기운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삼가고 겸손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낮추는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자리가 바르지 않아서 자신의 기운을 멋대로 쓰지 않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삼효는 중하지 않다. 해서 적중하는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 게다가 삼효는 하체의 맨 위에 있어서 자신이 아랫자리에 있음을 망각하고 윗자리를 탐하고 치받는다. 한마디로 오만함으로 욕심을 부리기 쉬운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삼효를 흉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삼효에 음이 오는 경우, 오만함의 기운이 수그러들어 자신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괘의 삼효에 음이 온 것을 무작정 나쁘게만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삼효는 분명 어려움 속에 있는 효다. 그 어려움은 삼효가 하체에서 상체로 올라가는 변곡점에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즉, 전체적인 장이 완전히 바뀌는 때이자, 새로운 장으로 도약해야 하는 순간이 삼효인 것이다. 이때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상체로 올라가 자기 뜻을 펼칠 수도, 사사로운 마음으로 가득해져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비괘의 삼효를 이런 변곡점으로 읽으면 어떨까. 길과 흉이 갈라지는 그 기로에 서 있는 것으로 삼효를 바라보면 어떨까. 해서 길흉을 의미하는 어떤 말도 거기에 붙지 않은 것은 아닐까. 

막힘의 때, 삼효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욕심이 드글드글해서든,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무능력에서든, 여하튼 삼효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 부끄러워하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자신이 가진 마음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맹자는 이를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부르며, 인간다움의 씨앗이라 말한다. 불교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부끄러워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지금 자신의 무엇인가가 잘못되어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다. 

joshua-earle-qNX5sxNGbHI-unsplash부끄러워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지금 자신의 무엇인가가 잘못되어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다.

부끄러울 수(羞)는 외부의 시선에 의해 생기는 창피함과는 다른,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자각. 자기 안에 들어앉아 꽉 막혀 있는 자신에 대한, 사람이 아닌 길을 가려는 자신에 대한 생명의 목소리. 요컨대, 부끄러움은 우리 내면에서 발생한 ‘비평형’의 울림이다. 포수包羞, 그건 도덕적 책망이 아닌 생명이 생명으로 살기 위한 신호다.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건 감춰야 할 치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의 징표다. 그러니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난 그 균열은 상처가 아니라 숨구멍이다. 

하여 비괘의 삼효는 하나의 물음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아님의 갈림길. 그 부끄러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부끄러움을 직면하고 자신의 세계 밖으로 한 발 나아갈까. 아니면 그것을 감추고 가리며 더욱더 깜깜한 정체 상태가 되어갈까. 어느 쪽이 되었든 하나는 확실하다. 삶은 오직 비평형의 길을 통해 열린다는 것. 들숨과 날숨처럼 끊임없이 나를 내보내고 타자를 받아들여야 살 수 있다는 것. 비否는 비인匪人일 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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