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자래도 병이 걸렸습니다. 가쁘게 숨을 쉬는게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자리가 문병을 가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쉿, 저리 가세요. 죽어서 돌아가는 자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자리는 문에 기대 자래에게 말했습니다. “위대하군, 이 자연의 조화가! 자네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자네를 어디로 보내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나? 자네를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나?” (같은 책, 190쪽)
‘죽어서 돌아가는 자를 놀라게 하지 마세요.’ 이 구절의 원문을 찾아보니 ‘무달화(無怛化)’라고 되어 있었다. 달(怛)은 ‘놀라다, 슬프다, 근심하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에 놀라워하지 말라.’ 변화는 곧 죽음이겠지. 그런데 뒤 구절도 내게는 의미심장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냥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쥐의 간이 될 수도, 벌레의 팔뚝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죽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 이제야 ‘팔이 변해 닭이 되면 새벽을 알린다.’라는 앞의 구절이 어느 정도 와 닿는다. 죽음이 되었든, 무엇으로 변화하던지 그 상황을 긍정할 수 있다! 이것은 태어난 것도 하나의 때를 만난 것(得者, 時也)이고,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失者, 順也)으로, 내게 어떤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그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내가 죽음 앞에서 당당하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다. 나는 죽음을 내 현재 조건에서 도피처 정도로 생각했다. 만약 지금 당장 복권이라도 된다면 빨리 죽겠다는 소리를 할까? 당장 건강검진 받으러 달려가지 않을까? 어디 감히 진인들이 변화를 긍정하고, 죽음조차도 자연의 조화로 받아들이는 것에다가 “나는 죽는 것 따위는 겁나지 않아!”라며 묻어가려 했는지.
1995년, 가평에 있는 꽃동네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노인 병동에서 뒷수발을 들었는데, 거기에 청년 한 명이 있었다. 사고로 허리 밑으로는 감각도 없다고 했다. 또래여서 꽤 친하게 지냈고, 날씨가 좋으면 휠체어에 태워 바깥 공기를 마시러 가곤 했다. 나란히 앉아 5월의 햇볕을 쬐며 담배 한 대 태우면 그렇게 좋아했었다. 평생 걷지 못할 상황에서도 항상 웃던 그가 이제야 새삼스럽게 생각이 나는 것은, 그 청년에 비해 나는 얼마나 다채롭게 살아왔을 법한데 아직도 나를 인생에 실패한 노동자로만 규정짓고서, 틈만 나면 내 지나간 삶을 부정하고 우울해하는 것을 「장자」를 읽으며 또다시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몸은 온전한데 결핍하고, 그는 결핍한 몸을 긍정했다.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인 것. 그가 「장자」를 읽었을 일은 만무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는 그는 진인이나 다를 바 없다.
올해 꽉 찬 50세가 되었다. 언급했듯이 나는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른 육체노동자다. 도대체 뭘 하며 먹고 살아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 많고 앞으로도 계속 그 고민은 안고 가야 한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 또 「장자」를 읽어가면서 고민은 하되, 불안에 떨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나는 때를 만나 태어나 이러저러하게 살아왔고, 변화의 때가 되면 그 변화에 몸을 맡기면 된다. 내 팔이 변해 닭이 된다면, 동영상 찍어 유튜브에 올리면 되지, 징징거릴 것은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