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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3] 삶이 편리하지만 불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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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6-01 09:08 조회2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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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편리하지만 불안하다면…

근 영(글공방 나루)

 風山漸(풍산점)

漸, 女歸吉, 利貞. 점, 여귀길, 리정

점괘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이 길하니,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六, 鴻漸于干, 小子厲, 有言, 无咎. 초육, 홍점우간, 소자려, 유언, 무구

초육효, 기러기가 물가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소인배는 위태롭게 여겨 말이 있으나 허물이 없다.

六二, 鴻漸于磐, 飲食衎衎, 吉. 육이, 홍점우반, 음식간간, 길

육이효, 기러기가 넓은 바위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이 즐겁고 즐거우니 길하다.

九三, 鴻漸于陸, 夫征不復, 婦孕不育, 凶, 利禦寇. 구삼, 홍점우육, 부정불복, 부잉불육, 흉, 리어구 

구삼효, 기러기가 육지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남자는 가면 돌아오지 않고 부인은 잉태하더라도 기르지 못하여 흉하니 도적을 막는 것이 이롭다.

六四, 鴻漸于木, 或得其桷, 无咎. 육사, 홍점우목, 혹득기각, 무구

육사효, 기러기가 나무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혹 평평한 가지를 얻을 수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九五, 鴻漸于陵, 婦三歲不孕, 終莫之勝, 吉. 구오, 홍점우릉, 부삼세불잉, 종막지승, 길

육오효, 높은 언덕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부인이 3년 동안 잉태하지 못하니 끝내 구삼과 육사가 이기지 못하니 길하리라.

上九, 鴻漸于陸, 其羽可用為儀, 吉. 상구, 홍점우육, 기우가용위의, 길

상구효, 기러기가 허공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그 날개가 본보기가 될 만하여 길하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중국 송나라에 원숭이들을 기르고 있던 저공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생활이 궁핍해지자 원숭이들에게 줄 먹이가 부족해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밖에 줄 수가 없구나. 원숭이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자 다시 저공이 제안했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면 어떻겠니. 원숭이들은 그 말에 기뻐하며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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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저공의 간교한 술수와 원숭이의 어리석음으로 조삼모사를 읽는 거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나,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는 결국 일곱 개로 똑같다. 한 마디로 원숭이들이 먹는 양은 이러나저러나 같다. 그럼에도 원숭이들은 좋아라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삼모사에 접근한다. 아침으로 세 개를 먹고 저녁으로 네 개를 먹는 것은 아침과 저녁으로 각각 네 개, 세 개 먹는 것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거다. 앞의 첫 번째 해석은 양적인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반면 두 번째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의 차이다. 3+4와 4+3은 같지만, 3 다음에 4가 오는 것과 4 다음에 3이 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거다. 예컨대 다이어트 중인 사람은 하루에 같은 양을 먹더라도 저녁에 덜 먹는 법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간헐적 단식이란 것도 그렇다. 당뇨병 치료를 위해 개발된 이 식사법은 식사의 총량을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루에 공복 시간을 16시간 정도 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먹는 방식으로 당을 치료한다. 여기서도 관건은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인 것이다.  

둘 중 어느 쪽 해석이 마음에 드시는지. 주역의 ‘풍산점風山漸’ 괘라면 두 번째 해석에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점(漸)’은 점점, 차츰, 또는 천천히 나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느리게 나아감이란 단지 속도가 늦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나아가기를 순서대로 하는 것이 점차적인 진입이다. 요즘 사람들은 느리게 나아가는 것을 점차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나아가기를 순서에 따라 해서 차례를 뛰어넘지 않기 때문에 느린 것이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1046쪽) 요컨대, 점괘의 핵심은 ‘순서’다. 

현대인들에게는 이 순서라는 면모가 잘 와닿지 않는다. 모든 것을 양으로 환원해서 계산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1시간이나, 저녁에 1시간이나 모두 그냥 1시간으로 동일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이제 막 깨어난 몸이 겪는 1시간과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몸이 느끼는 1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마치 봄의 시간이 가을의 시간과는 다르듯이 말이다. 우리가 듣는 음악도 순서가 가진 그 힘을 잘 보여준다. 도-미-솔은 미-도-솔과 다르고, 솔-미-도 하고도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해서 음들의 배열이 달라지만 완전히 다른 음악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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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점은 이처럼 순서를 상징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괘사의 경우에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으로 그 순서의 의미를 풀고 있다. 고대에 여자가 시집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섯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사통하다고 여겨 흉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효사에 나오는 기러기 역시 순서에 대한 상징이다. 철새인 기러기는 오는 때와 가는 때를 지켰으며 이동을 함에 있어서는 무리가 질서 있게 움직였다. 또한, 여섯 개의 효사는 물가에서 바위로, 다시 육지에서 나무로 올라가 구릉을 거쳐 하늘로 나아가는 순서를 차례대로 담고 있다. 

점괘는 이처럼 순서, 즉 과정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하는 때다. 다시 말해 점괘는 나아가서 이르게 되는 그 도착점, 혹은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점괘의 시공간에서는 성취에 대한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결과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순서를 무시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조급해지기 십상이다. “사람이 나아가는 데에 욕심이 동하면 조급하여 점차적인 순서를 따르지 못하므로, 곤궁하게 된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1051쪽) 

현대 사회가 가진 빠른 속도감의 정체도 이런 조급함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손에 쥐게 될 그것에만 마음을 빼앗긴 상태. 해서 과정이란 생략될수록 좋은 거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무엇이 되었든 그 길을 단축할 수 있다면, 아니 건너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능력이라 이야기되곤 한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꿈은 마치 로또나 대박이 된 듯하다.  

하지만 어디에 그런 길이 있을까. 어떻게 과정 없이 도착지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시대는 마치 그것이 가능한 일인 듯 말한다. 입시학원들은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여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내세우고, 다이어트 광고들은 운동과 식사량을 조절하는 그 지난한 시간 없이 한 알의 약으로 쫙쫙 살을 뺄 수 있다고 선전한다. 온갖 유통사업망은 또 어떤가. 손가락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상품을 신속하게 우리 품에 안겨준다. 사실, 여기 어디에도 중간과정은 생략되지 않는다. 대신 그 모든 과정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과정조차도 상품화해서 돈을 지불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럼으로써 덩달아 소비의 사이클 또한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다. 이번 택배 상자가 채 열리기도 전에 또 다른 택배가 도착할 수 있도록. 

mealpro-efgpRGeu9tg-unsplash자본주의는 이제 과정조차도 상품화해서 돈을 지불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럼으로써 덩달아 소비의 사이클 또한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상품 경제는 과정을 서비스화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될 수 있는 한 과정이란 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 든다는 점이다. 어떻게 닭이나 소, 돼지가 키워지고 살아가는지는 베일 속에 감춰놔야 한다. 그래야 죄책감 때문에 육류소비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까. 택배 기사님들이 주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 게 아파트의 품격(?), 아니 가격을 만들고, 건물의 청소노동자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에 일하고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쉬어야 한다. 과정은 단 한 번도 생략된 적이 없다. 단지 누군가가, 어떤 존재들인가가 그림자가 되어 그곳을 채워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회 속에 살면서 우리는 과정이란 것에 무감각해졌다. 최종적으로 손에 넣게 되는 그 결과에만 시선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해서 어떻게 그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 요컨대 절차나 과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문제는 과정에 대한 이런 무지가 단지 지갑을 텅텅 비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건 결국 존재의 곤궁함, 즉 삶에 대한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그 앞에서 느껴지는 막막함.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걸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 삶의 문턱들을 직접 겪고 통과할 힘을 잃어버린 채, 이를 대신할 능력자를 찾아 의존하거나 두려움 속에서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좇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절차를 건너뛰고,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은 허위다. 허위 위에 있는 삶은 결코 평안할 수 없다. 해서 상품 경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삶은 몹시 편리하나, 몹시 불안하다. 풍산점의 괘상은 이에 대한 하나의 경계다. 점괘의 위에 있는 풍(風, 바람)은 오행(五行)상 나무를 나타낸다. 하여 점괘는 하체에 있는 산 위에 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다. 요컨대, 산꼭대기에 우뚝 솟은 나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나무가 높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산 덕분!. “나무가 높은 것은 그것이 산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높음은 거저 높은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높음의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나아감의 순서를 밟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점漸이라고 한 것이다.”(도올 김용옥, 『도올 주역 강해』, 통나무, 649쪽)

나무는 홀로 저 높은 곳에 자리할 수 없다. 나무가 높이 서 있는 것은 오직 산이 있기 때문이다. 3층 집을 짓고 싶다면 1층과 2층을 지을 수밖에 없다. 뛰고 싶다면 우선 네발로 기고, 다시 두 발로 걷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금 뭔가 중간을 건너뛰었는데 결과에 도착해 있는가. 그렇다면 그건 반드시 누군가 그 중간의 일을 해줬기 때문이다.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 하지만 모두가 잊고 지내는 진리. 점괘는 이를 곱씹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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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점괘의 오효는 점진적 나아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九五, 鴻漸于陵, 婦三歲不孕, 終莫之勝, 吉. 구오, 홍점우릉, 부삼세불잉, 종막지승, 길. 육오효, 높은 언덕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다. 부인이 3년 동안 잉태하지 못하니 끝내 구삼과 육사가 이기지 못하니 길하리라.” 오효는 풍산점 괘에서 상황이 가장 좋은 효다. 군주의 자리에 중(中)하고, 강함의 자리에 강한 기운이 와서 정(正)하며, 거기에 이효와도 응(應)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오효는 성취한 바가 없다는 거다. 즉, 여전히 얻은 게 아무 것도 없다! 효사는 이를 “부인이 3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다[婦三歲不孕]”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오효는 끝내 이루어서 길하겠지만, 여하튼 지금 현재 손에 쥔 것은 없다. 그럼에도 풍산점은 말한다. 오효가 점(漸)의 때에 정점이라고. 이것이 풍산점 괘가 가진 독특함이다. 

오효에는 결과물이 없다. 바꿔 말해, 오효에는 오직 과정만이 담겨있다. 여전히 장애(구삼과 육사)가 있어 이것들과 한창 씨름 중인 것이다. 풍산점은 바로 이 분투의 현장, 과정의 한복판에 있는 오효를 최상의 상태로 본다. 오효가 종내 길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게다. 과정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치열하게 과정을 겪어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것이 오효가 자리한 높은 언덕의 풍경이다. 과정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결과는 없다. 하지만 오효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결과는 말 그대로 과정의 끝에 오는 하나의 ‘효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글을 쓰다 보면 점괘의 지혜가 절실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말들에 순서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열고, 어떻게 풀 것이며 다시 그것을 어떻게 맺을지. 이것이 생각의 조각들을 하나의 글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리 그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글 쓰는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가이다. 사실 이 집중도가 글의 순서를 만들고, 글의 강밀도를 생산한다. 그렇게 되면 그 글은 누군가와 소통하는 힘을 갖게 된다. 하여 좋은 글이란 바로 이 과정에 대한 집중도에 달려 있다 할 수 있다. 반면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게 되는 순간 글은 망하게 되어 있다. 멋진 글에 대한 욕심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조급해지면 글이 방향을 잃는다. 그러면 그 글은 궁색해진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같이 대부분의 과정이 서비스화된 시대, 결과 중심의 사회에 익숙한 신체성으로는 글쓰기의 ‘점진적인 나아감’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하나, 그렇기에! 글쓰기는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훈련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에서는 결코 과정을 생략할 수 없기 때문에! 글쓰기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이 편리하지만 불안하다면, 글쓰기의 현장에 접속해 볼 일이다. 풍산점의 지혜를 연마할 수 있는, 분투하는 평안한 삶을 만날 수 있을 테니. 

aaron-burden-CKlHKtCJZKk-unsplash삶이 편리하지만 불안하다면, 글쓰기의 현장에 접속해 볼 일이다. 풍산점의 지혜를 연마할 수 있는, 분투하는 평안한 삶을 만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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