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피로케 해서 하나–됨을 깨달으려 해도 결국 깨닫지 못함을 가리켜 “조삼”이라 한다. 무엇이 조삼인가? 원숭이 사육사가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되 저녁에 네 되 주마”고 하자 원숭이들 모두가 화를 내니, 하여 “그럼 아침에 네 되 주고 저녁에 세 되 주마”고 하자 이번에는 모두가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명(名)과 실(實)에 어긋남이 없건만, 화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이 이와 같더라. 역시 도의 하나–됨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성인은 시비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하늘의 가지런함(天均)에서 편히 쉬니,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 한다. (『파라–독사의 사유』 이정우 108p)
옛날부터 들어왔던 바보 원숭이 이야기를 다시 눈으로만 빠르게 훑으며 건너뛰려는 순간 어?! 나의 모습과 원숭이의 모습이 교차되었다. 바로 내 얘기가 아닌가. 내 성향에 맞고 가치 있다고 여긴 속칭하고 싶은 일은 네 되,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 일은 세 되이다. 네 되의 일이 주어지면 좋아라 하고, 세 되의 일이 주어지면 싫어하고, 그렇게 정신을 피로케 하여 깨닫지 못하는 모양새, 하지만 어차피 일의 양은 일곱 되이다. 똑같은 일곱 되의 일을 나의 잣대로 나누어 좋아하고 싫어한 꼴이라니.
대붕이 되어 멋지게 비상하는 모습과 나를 잊어버리는 오상아의 경지를 동경하며 장자를 읽었는데 웬걸 눈앞의 이익밖에 보지 못하는 바보 원숭이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되기의 퇴보 버전인가. 단지 내 감정과 어쭙잖은 지식을 기준으로 좋고 싫은 일, 가치 있고 쓸데없는 일을 나누는 모습은 원숭이들이 잔머리 굴리는 모습과 겹쳐지며 부끄러워졌다.
성인이 되어 하늘의 가지런함에서 쉬는 것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 원숭이 수준에서는 탈출해야 한다. 다행히 확실한 탈출 방법은 있다. 우리가 원숭이를 보며 멍청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내가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라 나를 내려다보며 멍청하다고 여길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수평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차원을 높여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을 대함에 있어 그런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선 일의 시비에 대해서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창의적이라며 좋아한 일들과 쓸데없다며 싫어한 일들은 정말로 그런 걸까, 잠시 내 머릿속에서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동시에 똑같은 일들이 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던 적이 꽤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렇게 내 생각과 다른 어떤 것이 다가올 때면 그건 드문 예외 상황일 뿐이라고 애써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버리는 내 모습도 보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그렇다고 굳게 믿어왔던 일의 성격들이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금방, 그리고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내가 나를 이토록 단순하고 쉽게 가스라이팅한 사실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가벼운 두통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