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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현재에 넘쳐흐르는 과거라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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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1-02 07:03 조회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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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넘쳐흐르는 과거라는 자유

물질과 정신, 그리고 자유에 대하여

천 미 경(화요 감이당 대중지성)

베르그손의 사유는 기묘하다. 사실 내가 접한 서양 철학자들은 대부분 기묘하다. 이들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의 사유 도식을 넘어서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베르그손은 식상한 구석도 있다. 지속, 즉 변화, 차이 생성 및 유지.보존을 포괄하는 이 개념은 서양 현대철학의 중요한 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이 들뢰즈나 푸코¹보다 앞선 세대임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속’이라는 개념의 깊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베르그손은 강렬한 힘으로 나를 낚아챈다. 지속이라는 개념은 공간적 사유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관념을 해체한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의 일원론이라고 생각되지만,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묘한 일원론이다. 지속은 물질과 정신(기억)²을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그리고 정신의 독립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이원론의 함의가 있다.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도대체 기억이란 어디에 보존되어 있다는 말인가? 뇌도 아니고 신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이란 신체와 독립해서 존재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기억, 즉 정신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이같은 사유는 이원론의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원론적 일원론일까?

 

따라서 이러한 과거의 그 자체적 존속은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데서 느끼는 곤란은 단순히 우리가 공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물체들의 전체에만 적용되는 포섭관계(포함하는 것과 포함된 것의 관계)의 필요성을 시간 속에서 기억들의 계열에 부여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 이런 의미에서 뇌는 유용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 기여하지만그 이상으로 다른 기억들을 잠정적으로 멀리하게 하는 데 역시 기여한다우리는 어떻게 기억이 물질 속에서 자리잡을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앙리 베르그손물질과 기억박종원 옮김아카넷, 256p, 298p)

 

우리가 기억, 즉 “과거의 그 자체적 보존”을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공간적 사유에 익숙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의 난점을 베르그손 자신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베르그손은 물질을 절단된 ‘이미지’로 봄으로써, 그리고 이 이미지를 정신과 물질의 중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조금이라도 해소했다고 자평한다.

이는 베르그손이 “정신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물질을 정신의 하락으로 설명하며, 생명성을 정신성과 동일시”(298p, 각주 26)하는 라베송 등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베르그손은 물질이란 지속의 이완이며, 정신이란 지속의 응축이라고 본다. 지속의 응축과 긴장이 풀어진 것을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미지, 그리고 정신과 신체

베르그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미지라고 지칭한다. 즉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위 책, 22p)다. 그런데 이 이미지라는 것은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표상이나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사물의 중간에 위치한다. 그것은 이미지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이미지이다. 베르그손은 물질은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 존재하며”, 우리가 물질을 이미지로 지각하기 때문에, 물질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로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관념론자들과 실재론자들이 표상과 물자체로 분리했던 이원론의 중간에서 물질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손은 물질의 문제를 “정신과 신체의 관계의 문제에 국한”(25p)해서만 다룬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할 천군만마가 등장한다. 기억의 역할이 그것이다. 사실 물질과 정신에 대한 다툼은 아주 오래됐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신체, 이 양쪽을 연결하기가 참으로 힘든 문제였다. 그런데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억(mémoire)의 영역이다. 즉 기억(souvenir)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교차점”(위 책, 27p)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실 물질과 정신에 대한 다툼은 아주 오래됐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정신과 신체, 이 양쪽을 연결하기가 참으로 힘든 문제였다.

영혼과 신체의 관계들에 관한 오래된 문제를 사실들의 영역 위에서 선입견 없이 다루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곧바로 기억의 문제더욱 특별하게는 말에 대한 기억의 문제 주변으로 좁혀지는 것으로 나타 난다문제의 가장 모호한 측면들을 해명할 수 있는 빛이 출발해야 할 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거 기다.” (위 책, 28p)

 

기억이 정신과 신체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즉 기억의 영역은 실재론들과 관념론자들의 논란을 다소 해결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적이고 내밀”하며, 그동안 온갖 논란을 야기했던 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관찰의 영역”으로 이전시킨다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기억이 실재한다고 말한다. 그럼 기억은 어떻게 이 둘을 연결시켜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일까?

베르그손에게 기억은 순수 기억과 이미지-기억으로 나뉜다. 순수 기억은 과거 전체이며, 보존되어 있고, 무의식 같은 것이다. 이 순수 기억이 지각 작용에 참여하게 되면 이미지-기억이 된다. 지각 작용이란 기억이 개입해야만 가능하다. 신경계를 가진 존재는 언제나 과거의 기억이 개입해서 현재의 지각을 구성한다. 물론 순수 지각도 있으나 이는 권리적으로만 요청된다. 즉 지각은 현재적 물질 대상에 기억(과거)이 개입함으로써 일어난다. 이미지-기억은 “자신을 구체화하기 시작하는 순수기억과 자신을 구체화하는 지각에 동시에 참여한다”(230p). 때문에 베르그손은 “이미지-기억을 시발적 지각으로” 정의한다. 즉 현재의 지각에는 “(이미지)기억이 배어있고”, 과거라는 시간이 이미 들어와 있다. 의식(기억)과 물질, 정신과 신체는 이렇게 만나고 얽혀서 지각행위를 하게 된다. 이것들은 고립되고 분리된 무엇이 아니다.

기억은 구체화 되면서 감각과 운동 야기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베르그손은 “내가 <나의 현재>라고 부르는 심리적 상태는 직접적인 과거에 대한 지각임과 동시에 직접적 미래에 대한 결정”(238p)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각되는 한에서 직접적 과거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과거(기억)가 지각작용에 참여할 때 그것은 항상 이미지-기억이다. 순수기억은 항상 “생생한 이미지 속에서만 나타난다”(232p). 때문에 “지각되는 한에서 과거는 감각이고” 직접적인 미래는 “결정되는 한”에서 행동, 즉 운동이란 것이다. 즉 나의 현재란 언제나 이미 과거가 들어와 있고, 동시에 “직접적인 미래에 대한 결정”이다. 나는 지금 오랜만에 커피를 마신다. 글을 쓰면서 창 밖 가득 펼쳐진 소나무들과 잿빛 하늘은 본다. 커피를 마시는 이 순간, 나는 이것이 커피라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행동을 한다(물론 커피라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감각-운동이다). 나의 현재는 항상 이렇게 과거의 기억의 도래인 동시에 운동인 것이다. 나는 이제 창밖의 겨울 나무들을 본다. 겨울나무는 이미 과거의 기억으로 축적되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그 겨울나무이며, 이와동시에 나는 내가 지각하고 있는 그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것이다.

순수기억은 지각 작용에 참여하는 순간, 이미지-기억으로, 즉 감각으로 나타나고, “직접적 미래는 결정되는 한에서는 행동 또는 운동”이다. 그러니까 나의 “현재란 감각인 동시에 운동”인 것이다. 베르그손이 “지각되는 한에서 직접적 과거는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요소적 진동들의 잇따름으로 나타나는 감각”(238p, 역주4)이란 의식 속에서 과거의 내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과거에 진돗개에게 물렸던 기억이 있다면, 지금 유사한 진돗개를 만났을 때, 나는 즉시 이 진돗개를 알아보고 도망치거나 피하는 행동을 한다. 즉 이 과거의 기억이 현재 도망치게 하는 나의 행동을 촉발한다. 이때 직접적 미래란 도망치는 행동, 즉 운동이다. 혹은 이것이 독약이 아니고 향긋한 커피라는 것을 지각하는 순간, 곧 마시고 음미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그것은(순수기억)은 구체화되면서 감각들을 생겨나게 할 것이다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순수 기억은 기억이기를 멈추고현실적으로 체험된 현재적 사물의 상태로 이행한다.(…) 순수 기 억이 현실적인 것이 되는 것은즉 운동들을 야기할 수 있는 감각이 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능 동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조건 아래서이다”(위 책, 240p)

 

다시 말하지만 베르그손에게 정신과 물질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지속의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연동하여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식은 분할불가능한 것으로, 물질은 분할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성이 삶의 유용성을 위해 임의적으로 물질을 포획, 고정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다. 베르그손은 “연장된 물질은 그 전체로 고려될 경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보완되고 중화되는 어떤 의식처럼 존재”(366p)한다고 말한다.

 

또한 관념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이미지에서 감각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면그럼으로써 이 이행이 현실성을 향해 즉 행동을 향해 진행함에 따라 영혼의 상태가 더욱 연장성에 접근한다면마지 막으로 이 연장성이 일단 도달된 후에는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있으며따라서 영혼의 단일성과 어떤 방식으로도 어울리지 못한다면정신은 순수지각의 작용 속에서 물질 위에 놓일 수 있고따라서 물 질과 결합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물질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 다.” (위 책, 367p)

 

즉 베르그손은 정신은 물질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정신은 물질과 구별된다고 말한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정신이 물질과 구별되는 이유는 그 때 조차도 정신은 기억즉 미래를 위한 과거와 현재의 종합 이기 때문이며또한 정신은 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기 때문이다정신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그리고 스스로가 행동들로 현시되기 위해서이며행동 들이야말로 정신이 신체와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367p)

 

지각은 행동을 위한 것이고, 행동이란 곧 지각 행위이다. 행동을 위해 정신과 신체는 통합된다. 순수 지각이란 “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 즉 기억이 없는 정신일지 모르며 이것은 바로 “물질의 상태” 라고 베르그손은 말한다. 그러니까 물질이란 정신 즉 기억의 결여이며, 신경계를 지닌 생명체들에게는 기억이 존재한다. 기억이 결여된 물질은 상호 작용, 반작용하는 동일한 리듬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단순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동일한 반복의 리듬과 필연성에 좌지우지되는 삶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 기억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과거가 기억의 상태로 존재 안에 놓여있지 않다면” 과거를 통해 배울 수도 없고, 충동적 행동을 하기 전에 기억에 조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자극에 대한 “비결정적인 반응”이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선택 가능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무기물과 다르고,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단세포 생물과 다르다. 물론 단세포 생물도 무기물과는 다르게 반응하지만, 신경계를 가진 인간에 비할 수는 없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인간의 “신경계의 점증하는 복잡성은 생명 존재의 활동성에 점점 더 커다란 폭”(369p)을 부여한다. 인간에게는 높은 수준의 자유와 독립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독립성이란 존재로 하여금 사물들의 흐름의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미래에 점점 더 깊이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과거를 더욱 더 잘 보존하게 해 주는 내적인 힘즉 결국 우리가 이 말에 부여하는 특수한 의미에서 그것의 기억을 말한다이처럼 무기 물질과 반성의 단계에 가장 높이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단계 들이 있다” (위 책, 370p)

 

이 자유에서 “환상의 놀이들과 상상력의 작업”이 가능하게 된다. 이 자유는 현재의 순간들에 무수한 형태로 이미 와 있는 과거를 다르게 지각하고 다르게 산출하는 자유다. 나는 너를 다르게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하루를 어제와 다르게 만날 수 있다. 이 자유의 실천은 나에게 주의적 식별을 요구한다. 또한 유용성의 기준에 익숙한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옆길로 새는 일탈의 용기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베르그손! 놀랍다. 물질과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토록 정밀하게 논증하다니! 또한 물질과 정신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이토록 설레게 설득할 수 있다니!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쌓이기에 인간은 묻혀버린 과거를 불러내고, 잊었던 과거를 의지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현재를, 그리하여 새로운 과거를 계속 산출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미래를 계속 창조할 수 있다. 물론 불현듯 불행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 이때에도 나는 이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새롭게 생산할 수 있다.

오랜만에 커피를 마신다. 넓은 통유리 전면에 저 소나무는 겨울인 데도 푸르다. 나는 지금 저 소나무를 처음인 듯 만난다. 저 소나무들은 어제도 내 방 앞에 있었으나, 지금 저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다. 저 소나무가 나에게 보내 준 이 감흥은 즉시 과거가 된다. 그러나 이 과거는 나에게 생기넘치는 새로운 과거가 되어 내 안에 있을 것이다. 어느 힘든 날, 나는 저 소나무를 바라보겠지. 그때 오늘 만난 이 소나무를 기억하자. 그럼 저 소나무도 나를 바라보겠지. 기억이 있는 한 기억은 영원히 도래한다. 설레는 과거들이 영원히 도래하도록 현재의 삶을 살 것! 베르그손이 나에게 주는 과제다!

풍요로운 몽상과 조짐과 불온한 사랑들이 이 현재에 넘친다. 현재에는 놀라운 과거들이 넘쳐난다. 무수한 층위의 자유들이 넘실거린다.

 

 

“동물들이 물질적 필요에 사로잡혀서 그것(여백)을 그다지 이용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인간 정신 은 신체가 자신에게 살짝 열어 놓은 문을 향해 그의 기억의 총체와 함께 밀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 다. 거기서부터 환상의 놀이들과 상상력의 작업-정신이 자연과 함께 취하는 그만큼의 자유를-이 유래 한다.” (위 책, 3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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