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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3] 나의 공부는 ‘음악’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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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2-27 08:00 조회1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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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부는 ‘음악’이 될 수 있을까?

근 영(글공방 나루)

 雷地豫(뇌지예)

 

 

 
 

豫, 利建侯行師. 예, 리건후행사

예괘는 제후를 세우고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이롭다.

 

初六, 鳴豫, 凶. 초육, 명예, 흉

초육효, 기쁨을 드러내어 울리니 흉하다.

 

六二, 介于石, 不終日, 貞吉. 육이, 개우석, 부종일, 정길

육이효, 절개가 돌과 같이 굳세어 하루 종일 기쁨에 취해 있지 않고 떠나가니 올바르고 길하다.

 

六三, 盱豫, 悔, 遲, 有悔. 육삼, 우예, 회, 지, 유회

육삼효, 위에 있는 구사효를 올려다보며 기뻐하니 후회가 있고, 머뭇거리며 지체하여도 후회하리라.

 

九四由豫大有得勿疑盍簪구사유예대유득물의합잠.

구사효기쁨이 구사효로 인해 말미암는 것이니 크게 얻음이 있다의심하지 않으면 어찌 벗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六五, 貞, 疾, 恒不死. 육오, 정, 질, 항불사

육오효, 바른 자리에 있으나 질병이 있어서 항상 앓고 있으면서도 죽지 않는다.

 

上六, 冥豫, 成, 有渝, 无咎. 상육, 명예, 성, 유투, 무구

상육효, 기쁨에 빠져 어두워졌으나 바꿀 수 있으면 허물이 없다.

이 새로운 영혼은 노래했어야 했다말하지 말고! (프리드리히 니체)

 

어느 날이었다. 연구실 선배가 강의를 제안했다. 세미나에서 반장을 해 본 적은 있어도, 일회성으로 글을 발표한 적은 있어도 수업을 맡아서 진행하라니…. 당황스러웠다.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다. 모든 새로운 일이 그렇듯.

그 이후로 어언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강의는 어렵다. 뭘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제대로 해낼 수는 있을까? 듣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부가 되긴 해야 할 텐데…. 사실 난 오랜 시간 학원 강사로 일했었다.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업도 수월해졌다. 하지만 연구실의 강의는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단순히 테크닉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매번의 수업에서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나가기 때문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부담감을 털어버리는 방법은 하나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 어떻게든 텍스트를 내 삶에 녹여내는 것. 딱 그만큼 나는 강의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농담을 하곤 한다. 수업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강사라고.(^^;;) 그러고 보면 수업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 나다. 그래서 강의에 대한 부담감이 싫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수업이 망하는 날이 종종 있다. 수업을 지루해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사람이 뭔 말을 하는 건가 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떤 때는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잠자리에 들어 이불킥을 하게 된다. 혼자서 허공에 대고 떠드는 것만큼 기운 빠지는 일이 있을까. 내용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 없으면 수업은 활기를 가질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 주역의 뇌지예(雷地豫) 괘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괘가 상징하는 바는 ‘기쁨 또는 열락(悅樂)’이다. 열락은 한자 그대로 풀자면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지극한 기쁨을 의미한다. 예괘의 이런 기쁨을 만드는 주체는 사효다. 구사, 유예, 대유득, 물의, 붕, 합잠 九四, 由豫, 大有得, 勿疑, 朋, 盍簪. (구사효, 기쁨이 구사효로 인해 말미암는 것이니 크게 얻음이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어찌 벗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예괘의 사효는 상괘(上卦)에서 대신의 자리에 있는 유일한 양효다. 해서 다른 모든 음효들이 이 양효에 ‘호응’한다. 이로 인해 사효가 유예(由豫),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호응, 서로가 서로에게 응함. 이로부터 기쁨이 나온다. 이것이 사효가 크게 얻는 바(대유득 大有得)다. 뇌지예는 그 기쁨의 지극함을 보여준다. 호응의 첫 번째 길은 「서괘전」을 통해 드러난다. “풍성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히 겸손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삶이 넉넉하고 즐겁다. 그래서 예괘로 받은 것이다. (有大而能謙, 必豫, 故受之以豫)”(『도올주역강해』, 김용옥, 통나무, 279쪽) 「서괘전」은 괘가 나열된 순서로부터 그 뜻을 풀어낸다. 예괘는 대유(大有)괘를 거쳐 겸(謙)괘 다음에 나온다. 크게 가졌으나 겸손한 마음. 그것이 예괘의 기쁨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열심히 공부한 후에 필요한 것은 ‘하심(下心)’이다. 하심이란 마음을 낮추는 것이자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사실 강의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주된 이유는 내 욕심에 있다. 강의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 멋들어진 내용을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 사람들이 내 강의를 재밌게 들어줬으면 하는 욕심 등등. 욕심은 마음과 몸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그렇게 힘이 들어간 강의는……망한다.(^^;;)

이런 욕심은 수업을 ‘계몽의 구도’로 생각할 때 생긴다. 계몽이란 간단히 말해 뭘 좀 아는 사람이 무지한 사람을 깨우쳐준다는 것이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수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받는 사람이다. 이 시혜적 자리에서 나는 무언가를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알아야만 한다’. 이때부터 공부는 곤욕이 된다. 책읽기는 앎을 소유하기 위한 사냥터가 되고,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앎을 쫓는 사냥꾼이 된다.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그렇게 어떻게든 뭔가를 붙잡는다 쳐도 수업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려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욱여넣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안 되면? 서운하다. 때로는 미운 마음도 올라온다. 이쯤 되면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된다.

여기 어디에도 서로의 마음이 응하는 자리는 없다. 그러니 수업이 즐거울 리 없다. 예괘는 말한다. 지극한 기쁨은 하심 다음에 온다고. 가르치는 자, 해서 나는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무언가를 알았다면, 알았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요컨대, 가르친다는 생각 없이 가르치기다. 그래야 예괘의 기쁨이 열린다. 그런데 대체 이런 강의란 어떤 것일까. 예괘를 좀 더 따라가 보자.

내가 무언가를 알았다면, 알았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요컨대, 가르친다는 생각 없이 가르치기다.

예괘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대상전」이다. “「상전」에서 말했다. 우레가 땅에서 진동하는 것이 예괘의 모습이니, 선왕은 이것을 본받아 음악을 짓고 덕을 높여 성대하게 상제께 올려서, 조상에게 배향한다.”(『주역』, 정이천, 심의용 역, 글항아리, 367쪽) 「대상전」에는 주역의 각 괘를 현실에 적용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런데 예괘는 그것을 ‘음악을 짓는 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뇌지예 괘는 상체가 진괘, 즉 우레이고 하괘가 땅을 나타내는 곤괘다. 해서 예괘는 땅속에 갇혀 있던 우레가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다. 바로 여기에 음악의 출현이 있다. 도올 선생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땅속에 뭉쳐있던 우레의 기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이미지다. 바로 예술이란 이렇게 뭉쳐있던 감동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음악이 없으면 예가 성립하지 않는다.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있어야, 우레와 같은 하늘의 울림이 있어야 신이 감동한다.”(『도올주역강해』, 김용옥, 통나무, 280쪽)

마음에서 일어난 감동이 세상을 향해 나오는 것, 그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이성에 앞선다. 머리로 무엇을 따져보기 전에 마음에 와닿는다. 그렇게 듣는 이의 마음을 감(感)하고 동(動)하게 한다. 음악이 이런 힘을 갖는 것은 그 음악이 감동한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나의 감동이 누군가의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 하여 우리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예괘에 자리한 우레가 상징하는 바다.

하지만 단순히 나의 감동을 토해놓는다고 울림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저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누군가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순 없는 법이다. 나의 감동이 하나의 울림이 되려면 반드시 일정한 흐름을 가져야 한다. 기타를 치는 데는 일정한 코드가 있고 그 코드들의 적절한 연결이 음악을 만들 듯이 말이다. 해서 예괘의 아래에는 곤괘가 자리한다. 곤(坤)은 순(順)함이다. 해와 달이 순리에 따라 움직이고, 사계절이 그 차례를 지키듯이, 터져 나오는 감동은 나름의 흐름과 리듬을 갖추어야 한다. 순하여 움직임[順以動], 그래야 비로소 감동은 하나의 음악이 된다.

그런데 왜 하필 음악일까? 그건 음악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서 나오는 듯하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다. 그리고 소리에는 형상이 없다. 소리는 입자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파동이다. 요컨대, 음악은 하나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어떤 음악이든 떠올려보라. 그 속에서 하나의 소리는 다른 소리로 스며들어 간다. 분리된 입자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입자들은 함께 있어도 명확히 안과 밖이, 너와 내가 나뉘어 있다. 하지만 파동은 다르다. 공명한다. 서로가 서로의 내부로 흘러 들어가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이런 음악의 힘에 대해, 도올 선생님은 “음악은 음식보다 더 직접적으로 신들을 감동시킨다”(『도올주역강해』, 김용옥, 통나무, 281쪽)고 말한다. 신(神)이라고 하면 저 하늘에 있는 어떤 존재 같은 게 떠오른다. 하지만 신이란 초월적 존재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보편적 정신(마음)이다. 하여 신을 감동시킨다는 건,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보편적 마음이 현현함을 가리킨다. 음악은 그런 보편적 마음을 생성한다. 그 울림 속에서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장애물은 무너져 버린다.”(『주역 강의』, 리하르트 빌헬름, 진영준 역, 소나무, 107쪽) 나의 감동이 너의 감동이 되는 순간, 너와 나로 분리된 개체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화락(和樂)으로서 음악. 우리의 울림이자 우리라는 울림! 이 연결성, 이 보편성이 곧 예괘의 때이며,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그 열락이 찾아오는 순간인 것이다.

음악이 가진 이런 힘은 비단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음악을 ‘학문’과 대결시킨다. 당시 모습을 갖추어가던 근대 학문은 그 중심에 이성을 두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객관성, 즉 대상과의 거리감이다. 그런데 이 거리감이란 무얼까? 그건 대상과 결코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니체에게 공부란 언제나 내 앞의 존재에게, 타자에게 나를 개방하는 일이다. 그렇게 타자를 내 마음에 침투시켜서 내 삶을 뒤흔드는 일, 해서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나를 생성하는 것. 그것이 니체에겐 배움의 현장이다.

그러나 근대 학문은 그 장을 닫아버리려 한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라, 그저 구경꾼으로 바라보기만 해라. 무엇도 내 안에 들여놓을 수 없다는 의지, 지금의 자아를 견고히 지키겠다는 의지. 그것이 근대 학문이 내세우는 객관성의 본질이라는 게 니체의 진단이다. 해서 거기에 ‘감동’이란 없다. 아니, 없어야만 한다. 마음의 감함도, 동함도 객관성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문은 건조하디 건조한 말이 되어버렸다. 결국 학문의 객관성은 타자와의 거리감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학위 논문이나 교과서에 나오는 그 퍽퍽한 말들이 얼마나 지루한지. 마치 공부가 얼마나 재미없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려는 듯 보이지 않는가.

해서 니체는 말한다. 우리의 공부는 학문이 아닌 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의 책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듯 마음이 감동하는 일이며, 글을 쓴다는 건 하나의 노래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일이라는 거다. 그렇게 서로가 섞여들어 보편적 마음이 생성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의 본질, 요컨대 진리는 드러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 접속되어 있다는 본질이. 그 보편성으로서 세계를 체험하는 것, 자신을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기쁨을 일궈나가는 것. 그것이 진리를 탐구하는 공부의 현장이다. 하여 공부는 즐겁다.

나의 책읽기가, 글쓰기가, 그리고 강의가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예괘의 관점에 서면, 책읽기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아는 게 아니다. 단 하나라도 좋다. 책을 향해 내 마음을 열고(감感),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면(동動) 된다. 그런 감동의 일어남, 그것이 배움의 증표다. 그러니 배울 수 있다는 건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일 게다. 그리고 그런 감동을 오롯이 담아내는 것, 그것이 글쓰기이고 강의가 아닐까.

그렇게 서로가 섞여들어 보편적 마음이 생성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의 본질, 요컨대 진리는 드러난다.

학생을 가르치는 자를 뜻하는 ‘professor(교수)’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pro(앞에서)+confess(고백하다). 그러니까 교수라는 건 학생 앞에서 고백하는 자라는 거다. 무엇을? 자신의 배움을. 그렇다. 강의를 한다는 건 내가 아는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나의 배움/감동을 고백하는 거다. 왜? 내 배움이 제대로 체화되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진리란 작든 크든 보편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보편적이라는 건, 그것이 다른 이들과 소통된다는 걸 뜻한다. 그렇기에 나의 감동이 다른 이의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하나의 울림으로 소통되어 펼쳐지지 못한다면, 지금 나의 배움에는 뭔가 어긋난 지점이 있다는 게 된다. 그렇기에 강의는 나의 배움을 검증하는 자리다. 가르친다는 생각 없이 가르치기, 하심의 의미가 여기에 있을 거다.

예괘의 사효가 말하는 물의(勿疑), 의심하지 말라는 것도 이 맥락에 있다. 수업을 준비하다 보면,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계속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감동에는 정답이 없다. 단지 진솔함만이 있을 뿐이다. 하여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지금 나의 감동을 더함도 덜함도 없이 딱 그만큼 나눌 수 있는가이다. 요컨대, 진실함이 관건이다. 내 배움에 진실한가. 그 진실의 정도가 다른 이를 향한 울림의 정도를 만든다. 하여 사효는 말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어찌 벗들이 모여들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계속 묻게 된다. 나의 공부는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마도….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내가 연구실에서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온 것은 스승들, 그리고 친구들의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음악으로서의 배움. 화락하는 기쁨.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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