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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내 안의 적병들을 만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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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2-23 21:02 조회1,2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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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적병들을 만나려면





이성남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澤雷 隨   


隨, 元亨, 利貞, 无咎.

初九官有渝出門交有功.

六二, 係小子, 失丈夫.

六三, 係丈夫, 失小子, 隨, 有求, 得, 利居貞.

九四, 隨有獲, 貞, 凶, 有孚在道, 以明, 何咎!

九五, 孚于嘉, 吉.

上六, 拘係之, 乃從維之, 王用亨于西山. 

얼마 전 감이당과 남산강학원 학인 48인이 공동으로 쓴 책, <나는 왜 이 고전을>이 출간됐다. 나를 포함해 48인은 저마다 자기 질문을 품고 오랜 시간동안 자기가 선택한 고전과 씨름하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전에서 길 찾기! 이 책은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의 초입 단계라고 보면 된다. 짧지만 강렬한 ‘48인 저자들’이 고전과 벌이는 전투 과정(?)이 어찌나 리얼한지 읽는 내내 그들의 생고생이 실감났다.^^ 고전과 벌이는 전투란 다름 아닌 나와의 싸움이다. 나의 지독한 아집, 편견, 폭력성, 습관 등등.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적병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나 또한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래서 습(習)대로 산다는 말이 올해만큼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가정 안에서 나의 진상(?)을 여실히 봤고 이제껏 내가 해석해오던 방식대로 살다간 큰코다치겠다는 발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케어’라고 여겼지만, 아이는 지나친 간섭, 폭력이라고 저항했다. 또 남편은 가족을 무시하고 자기 일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전에서 길 찾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생각의 전환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만, 왜 새로운 눈으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없는지 답답했다. 그런데 주역의 수괘(隨卦)를 공부하면서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좀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초구는 양강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유순하게 따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양강하다는 것은 자기 주관이 매우 강해 자기 신념이나 가치관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거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편견을 깨는 초구의 모습에서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보고 싶다.

수(隨)는 ‘따르다’는 뜻 외에 ‘부드럽다’, ‘순종하다’라는 뜻도 있다. 하괘가 움직임을 상징하는 진괘(震卦)이고, 상괘가 기뻐함을 상징하는 태괘(兌卦)이다. 그래서 움직이며 기뻐하니 모두가 기꺼이 따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두가 기꺼이 따르는 이유를 『단전』에서 좀 더 살펴보자. “수(隨)는 강(剛)이 와서 유(柔)에게 낮추며 움직여 기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형통하고 바르니 허물이 없어서 천하가 때를 따른다.” 수(隨)가 따르는 것은 때(時)이다. 때를 따라 순응하며 변화하니 모두가 기꺼이 다가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다. 변화의 시기에 순종하며 따르는 모습은 마당에 펼쳐지는 사계절만 관찰해도 쉽게 알 수 있다. 때가 되면 꽃을 피웠다가도 때가 되면 잎을 떨구는 자연은 고집 한번 부리는 법이 없다. 때를 거스르지 않는 이런 태도가 생명을 이어가는 이치이며 모두를 따르게 하는 비결이다. 그것이 강이 유에게 자신을 낮추며 움직여 다가간다고 한 것이다. 강이 기존의 내 생각이라면 유는 변화의 시기에 순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때를 따른다는 말은 자기 전제에 의문을 던졌다면 강고한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른 도다.

수(隨)가 따르는 것은 때(時)이다. 때를 따라 순응하며 변화하니 모두가 기꺼이 다가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다.

수괘의 초구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이후 치열하게 자기와 싸우는 전사 같은 모습이 있어 매력적이다. ‘주관함에 변함이 있으니 바르게 하면 길하며문을 나가 사귀면 공이 있다.(初九官有渝出門交有功.)’ 왕필은 여기서 ‘관(官)’을 주관함으로 보았고, 공영달은 ‘마음이 중심으로 삼는 바’로 보았다. 주관하고 마음이 중심으로 삼는 바라면 나의 가치관, 사상, 관념 같은 것이다. 그런데 ‘관유투(官有渝)’ 주관함에 변화가 왔다. 왜일까? 초구는 양강하지만 음유한 육이에게 낮추며 다가간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구사와 호응관계가 없기 때문에 매여 있지 않다. 또 움직임의 주체이고 마땅히 때를 따르는 자라, 양강하지만 능히 자신을 낮출 수 있다. 나에게 가족이란 내가 그들을 케어해주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동시에 가족은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걸림돌이라는 전제 또한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굉장히 독립적이라 내가 딱히 케어해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남편은 내가 하는 공부를 적극 지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이런 전제를 견고하게 붙들고 스스로 매여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나의 이런 고집스러움을 버리려면 문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초구의 出門交有功(집을 나와 문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해야만 공이 있다.)’을 배워야 한다. 문 안은 편안함과 익숙함에 머물고 싶어 하는 나의 아집, 편견, 폐쇄성을 의미한다. 초구가 자신을 낮추어 자신이 따를 자를 사귀러 문밖을 나선다는 의미는 불편하고 위험이 가득한 곳으로 떠난다는 뜻이다. 생각을 확장해가는 과정이란 그런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문밖에 존재하는 그것들이 나를 깨쳐줄 진정한 스승일지도 모른다.

내년에 나는 3일을 감이당에서 공부하며 공동체 생활도 익히고 내 공부도 확장해 갈 생각이다. 물론 고3이 되는 아이와 남편은 나의 길을 적극 지지해줬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돌아갈 배치는 원천 차단됐다.^^ 새로운 생각의 길을 내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나도 자유롭고 가족도 자유로운 길. 고전에서 길을 찾아 다른 이에게도 자유를 선물하겠다는 그 비전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다. 즉 나의 편견, 아집, 폭력성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출문교’하면 자연스레 때를 따라 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안의 적병들을 만나려면 문밖에 나를 깨쳐줄 무수히 많은 스승들을 적극 활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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