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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의사는 아무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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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7-05 12:55 조회1,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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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아무나 한다



김 해 완

먼 길을 돌아서

뻬스끼사에 대한 긴 리포트를 드디어 마쳤던 날, 마법처럼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9월까지는 재개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뻬스끼사도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신호인 걸까? 더 이상 쿠바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던 나는 냉큼 표를 알아보았다. 국경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6월에는 쿠바에 갇힌 멕시코인들을 구출하는 차터(charter) 비행기가 기적처럼 예정되어 있었다. 멕시코에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한국인도 받아준다고 했다. 한국에 오기까지 비행기를 총 네 번을 타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길바닥에서 여러 번의 ‘대환장파티’를 겪기도 했지만, 여하튼 나는 6월 23일에 무사 귀국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안 걸렸다! 뻬스끼사 하면서 손톱만큼 쌓은 공덕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쿠바를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 예정대로라면 9월에 멈췄던 학기가 재개되어야 하지만, 우리들 모두 이 코로나 시대에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제쯤이면 다시 일상의 궤도를 탈 수 있을까? 내리막길을 만난 자전거처럼 미친 듯이 달렸던 의대가 멈춘 지 석 달이 지났다. 의대에 입학하고 난 후 코로나 때문에 공부를 멈춰야 했던 올해 초까지 가늠해보니, 고작 일 년 반이 지나 있었다. 일 년 반! 내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는데 실제로는 이제 막 시작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 멀어 보였다. 의사가 된다는 것은 10년 이상의 약속 아닌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때는 6년을 버텨서 졸업하는 것만이 목표였고, 그 후에 의사로 살고 싶은지 아닌지도 몰랐으며, 이 새로운 도전이 나랑 잘 안 맞으면 언제든 중간에 튀어버리겠다는 지극히 ‘편인’스러운 계획도 숨겨두고 있었다. 나는 이게 얼마나 긴 여정이 될 것인지 이제야 감이 오고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

길 초입부터 환장하겠네

하지만 무식을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의사다.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긴 의사의 가방끈은 그가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의무로 정당화된다. 의사의 실수 하나가 사람 한 명을 무덤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수를 줄이려면 더, 더, 더 배우는 수밖에 없다. 이 빡센 여정 덕분에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의대생까지도 ‘의사’라는 이름표에서 성스러운 후광을 본다. 아, 저렇게 10년을 구르고 나면 나도 사람을 살리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이런 기대가 또 있어야 현재의 빡빡한 학업을 버틸 수 있다.

글쎄, 나는 좀 망한 케이스 같다. 의학 공부가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후광은 보이지도 않고 최근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고 있다. 의학의 길 초입부터 맞닥뜨리게 된 COVID-19의 영향이다. 이 전염병은 높지도 않은 치사율로 전 세계인의 정신머리를 쏙 빼놓고 있다. 반 년 만에 전 세계 사망자가 서울 인구인 천만 명에 육박했다.

이 병을 지켜보면서 나는 의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반문하게 되었다. 많은 의사들이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성실히 돌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코로나바이러스에는 치료법이 없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진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공해 시간을 벌고, 여러 항바이러스 약 중에 하나라도 얻어 걸려서 환자의 면역계에 힘을 보태주기를 기원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것이 무의미한 치료는 아니다. 이것이라도 안 하면 사망률이 더 올라간다. 그러나 이 치료에는 어떤 신비한 마법도, 현대 의학이 선전하는 전지전능함도 없다. 내가 해 온 뻬스끼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복 작업이다. 자연의 ‘선한 우연’이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쪽에 손 들어주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를 보면서 나는, 긴 세월 동안 지식의 탑을 공들여 쌓더라도 결국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병아리 눈곱만큼 작은 게 아닌가, 라는 안 좋은 예감이 든다. 카뮈가 반세기 전에 <페스트>에서 묘사한 장면에서 우리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닌가?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주세요!”

그러나 그는 살려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 따위가 대체 뭐란 말이냐?

 “참 인정 없군요.” 어느 날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꼭 그만큼의 인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인정만으로 어떻게 사람을 살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날마다 자기가 나누어주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사람의 맡은 직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대체 그 공포에 휩싸이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가운데, 누가 인간의 직분을 수행할 만큼 여유가 있단 말인가?

(알베르 카뮈, <페스트>)

페스트는 코로나보다 더 과격한 장면을 연출한다. 사망률은 삼분의 일, 33%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의사 리외는 비장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무감해진다. 예비 사망자를 찾아내 격리시키는 반복 작업의 지루함, 매일 업데이트 되는 통계의 추상성, 그리고 공포를 억제하는 피로감만이 진료소 공기에 감돈다. 이게 “구원이 아니라 지식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의사’라는 이름이 무슨 대수인가? 현대 의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의 평균 수명을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당하는 병은 여전히 차고 넘치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생활양상이 격변하면서 과거에는 이름도 없었던 신병들도 탄생했다. 무엇보다,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와 그 기대치가 꺾였을 때의 절망이 동시에 부풀려졌다. 소설 속 페스트가 일 년 안에 소멸한 것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킨 소동도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신종 바이러스의 공포는 현대 사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다시 찾아올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드러낸 불안함은 변치 않는 진리와 함께 존속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모두 병에 걸리고 결국 죽는다는 진리다. 의학은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살리겠다는 대전제 위에 쌓아올려진 학문이다. 이 지식에는 어느 한쪽 편에, 즉 살아있고 계속 살려는 편에 서겠다는 가치가 이미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작부터 진 게임이 아닌가? 혹시 나는 패배에 배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하며, 수많은 병을 거쳐 가는 여정이다. 오롯이 현재에만 집중하는 다른 동물들처럼 아예 생각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정신이 비대한 호모 사피엔스는 이 정해진 운명을 미리 잘근잘근 곱씹는다. 따라서 인간 문화가 병(病)과 사(死)의 주제를 끝없이 변주해 온 것은 자연스럽다. 불행하게도 나는 문화의 원천이 가장 고갈된 시대를 살고 있다. 매 계절마다 인기를 떨치는 드라마나 예능, 소설, 영화 중에서 이 주제를 정면 돌파하는 작품은 찾기 어렵다. 살아있는 오감을 빠르게 만족시키는 것을 대부분 목표로 삼는다. 죽음과 병이라는 사건은 병원이라는 장소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원천봉쇄된 것 같다.

이런 사유의 공백—혹은 태도의 공백—은 내게 질문의 형태로 종종 찾아왔다. 십대 때는 이런 질문도 해봤다. 사는 이유를 찾지 못하면 자살해도 괜찮을까? 경험이 일천한 십대나 할 법한 관념적인 질문이다. 이유는 살면서 만들고 또 부수는 것이고, 누군가를 자살로 이끄는 중력은 이유 없음이 아니라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이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질문이 바뀌었다. 우리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내는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면, 또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결국 죽음 앞에서 의미가 퇴색될 헛것이라면, 왜 우리는 여전히 살고 싶어 하나? 왜 병이 들었을 때 치유를 바라는 것인가? 광증에서 깨어난 돈키호테가 병상에 누운 채 ‘새로운 책을 읽을 시간’이 아직 남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

누구는 이 궁금증이 기이해보일 수도 있다. 생명인 이상 죽고 싶지 않고 고통받고 싶지 않은 건 당연지사 아닌가. 하지만 당연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불화가 일어난다. 불문의 본능으로 여겨지는 이 마음을 쭉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이 본능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무력함이 기다리고 있다. 애초에 죽음이 예약되어 있으니 패배도 예정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무력함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공포가 자란다. 혹은 구원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발짝 전진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일상의 차원을 초월하는 힘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역설은 생명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특이성과 일반성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분자로 이루어진 세포와 생명은 자연의 모든 물(物)과 화학적으로 다를 바가 없고, 자연의 연속체로서 무생물의 세계에 다시 귀속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죽음의 회귀를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나’라는 개체가 환경 속에서 구축해온 질적 차이를 포기하기가 아쉽다. 생명 개체 하나하나는 DNA 조합부터 행동방식까지 자연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유일무이한 사건 아닌가. 특수성의 자기보존은 생명의 DNA에 이미 새겨진 운동성이다. “인간이 자기 삶에 집착하는 데에는 세상의 모든 비참함을 이기는 강력한 어떤 것이 있다. 육체의 판단력은 정신의 판단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이처럼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한 채 필연적 합목적성 없이 돌아가는 세계(자연)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개인(생명) 사이에는 좁혀지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카뮈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간극은 부조리라 불린다. 본질을 영영 알 수 없도록 침묵하는 세계와 그 속에서 삶으로 주어진 형식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쓰다가 소외감을 느끼는 인간, 그 사이의 불일치가 부조리다. 우리는 지금의 삶을 지탱시키는 희망을 미래에서 찾지만,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죽으면 이 세계도 끝난다. 이 배신감은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부조리는 시공간을 판독하고 싶어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독특한 정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바퀴벌레가 부조리의 문제로 괴로워하지는 않지 않는가.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분열과 더불어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아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여기서 가능한 선택지는 대략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 부조리의 논리 끝에서 합치될 수 없는 균열만 확인하고 스스로 끝을 맺는 것. 즉, 자살을 하는 것. 이는 부조리의 긴장을 이완시킬 수는 있지만 살고 싶다는 “육체적 판단력”을 고통스럽게 거슬러야 한다. 둘째, 이 간극을 통합시킬 초월적 힘을 믿음으로써 거기서 희망을 찾고 구원을 구하는 것. 이것은 인생의 정신적 고뇌를 덜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자기보존을 위해서 세계에 대해서 멋대로 오해하기 쉽다. 셋째, 부조리의 긴장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집착하지 않고, 희망과 절망 모두 털어버리고 사는 것. 쓰기는 쉽지만 실제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그러므로…’라는 문장 뒤에 이어질 수 있는 세 가지의 다른 답변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선택지는 두 번째 답변, 즉 구원이다. 가장 편한 길이기도 하다. 초월적인 차원으로의 비약은 생사 사이의 균열을 메우고, 당장 살아갈 희망과 내일의 해피엔딩을 제공한다.

구원이 과거에는 종교에 귀의한 사제의 입으로 설명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과학의 손으로 넘어갔다. 물론 과학은 신을 상정하지 않고, 진리는 아직 찾는 중이라는 열린 결말을 취한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 신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가져온 것은 맞다. 21세기에 ‘구원받은 생사’를 상상해보면 테크놀로지의 혜택을 누리다가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최대한 늦게 죽는 것이 떠오른다. 따라서 유발 하라리가 저작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과학 혁명이 영생을 꿈꾸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병,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현대 과학에 쏠려 있다. 과학의 자식인 의학은 그 해결책에 스포트라이트를 쏘는 무대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과학 연구는 단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할 뿐이고, 과학을 이용하는 윤리의 문제는 과학 외적인 영역이라고 말한다. 순진할 뿐이다. 어째서 생명과학 연구가 수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거기에 꽂힌 호모 사피엔스의 욕망 때문이다.

구멍 뚫린 몸

뭐, 과학의 힘을 빌어서 더 오래 살고 또 덜 아프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아닐까? 이게 또 간단한 일이 아니다. 초월적인 힘 속에서 해답을 찾다 보면 한계를 잊어버린다는 게 문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이 욕망 하나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실험들이 쉽게 정당화가 된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는데, 여기에 대놓고 ‘No’를 말하기 어렵다. 물론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 인간의 목숨이다.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기 애매한 존재들이 문제로 남는다. 어떤 의사도 생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피를 강처럼 흘렸던 동물 실험 앞에서 윤리적으로 떳떳하지 못하다. 은연중에 ‘비-인간’으로 분류되었던 병자, 빈자, 여성, 노예, 포로 역시 역사 속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수없이 실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 때 활약했던 의사들은 인류를 위한 실험이었다며 재판장에서 고개 숙이지 않았다.

한계를 모르는 탐구는 결국 폭주가 된다. 이 폭주하는 마음의 근간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이성이 있다. 아니, 사피엔스의 이성은 실체 없는 환영이고, 어쩌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언어일지도 모른다. 이성과 사고는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또 조직되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도 인간의 마음속 언어로 쌓아 올려진 구조물이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아서 (구원의 지분을 두고 싸우는 걸까?) 종종 반대국부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과학 이론이 설명된 논문집을 읽든 성경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든, 모두 언어를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동등하다.

문제는 언어가 필연적으로 세계로부터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고 또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지만, 사실 이때 ‘이해한다’는 행위는 세계의 모든 것에 인간적인 낙인을 찍는 것에 가깝다. 뇌 안의 뉴런 접합에 불과한 언어적 질서에 세계 전체를 끼워 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일상의 소통에서도 확인된다. 동일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도 늘 오해 속에 산다.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고,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마음을 느끼는 방법도 다르다.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과제다. 타인도 이럴진대 세상은 어떨까? 한마디로 “‘이 세상’의 현실은 언어의 상징질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필연적으로 중심에 ‘구멍’이 생기게끔 한다(…).”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190쪽)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성’이 얼마나 폭 좁은 사고방식인지 신화 연구를 통해 지적한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유동적 지성이라는 진화적 사건이 일어났다. 유동적 지성이란 뉴런의 결합 방식이 횡단적으로 변화하면서 고정된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된 사고방식이다. 덕분에 상징은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환유와 은유가 가능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언어가 발달되었다. 신화의 시대에 유동적 지성은 자연을 분석 가능한 대상물로 여기지 않았다. 자연은 유동적 지성이 경험하는 초월, 경계를 뛰어넘어 외부와 연결되는 그 순간을 담지하고 있는 힘의 세계였다. 자연은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러나 자연과 연결되어야 마음속에 창조적인 상(想)들이 피어난다. 이런 “내부 섬광”은 환상으로 치부되지 않고 자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즉, 당시 자연이라는 물(物)에는 비가시적인 기운이 언제나 서려 있었다. 나카자와는 여기에 ‘스피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피리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구체적인 물(物)에 깃든 스피리트들이고, 다른 스피리트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그레이트 스피리트다. 이 개념은 사피엔스의 뇌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유동적 지성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사고 그 자체)에 대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뉴런 결합이기 때문에, 수많은 비유를 담당하는 스피리트들 외에도 초월적인 그레이트 스피리트가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위계는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신화적 사고가 새로운 사회적 위계의 등장과 함께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레이트 스피리트의 힘을 흡수한 최고의 신, 그리고 그 신을 자칭하거나 자신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성한 왕이 탄생한다. 더불어 국가가 등장하고, 그곳에서 기타의 스피리트들은 잡신 취급을 받는다. 자연은 모든 스피리트들이 빠져나간 무생물의 사물이 된다. 외부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가 제거되고, 모든 것이 왕이 담지하는 언어의 질서로 설명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가 유일신의 종교와 근대 과학이 태어난 뿌리다. 둘 다 언어(지식)에 과도한 권력을 부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완벽하게 닫힌 구조는 이미 설명했던 것처럼 설명되지 않는 ‘구멍’을 반드시 남기는데,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적 차원으로 이를 극복하려 한다. 오로지 신의 지성만이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또, 어떤 과학은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데, 환원주의적 과학 이론이 바로 그렇다. 유전체학, 줄기세포, 뇌 과학 같은 생명과학의 조류는 인체를 하나의 이론으로 꿰뚫어서 설명하고 또 조작(그것이 치유이든, 강화이든)할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한다고 설득하려 한다. 한마디로 “‘초월적인 것’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현생인류”가, “이 관념이라는 능력을 자기 밖에 있는 자연을 향해 확대해, 자연을 뇌 안에 짜인 ‘계획’에 따라 대폭적으로 개조해버리”기 시작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71쪽)

여기서부터 한계를 모르는 폭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 하고 개조되어야 하니, 한번 시작한 개조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의료 실험에 생명윤리를 논하고 필수적인 제약을 가한다 해도, 사고와 욕망의 기본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제약은 언젠가 제거될 테다.

그런데 과학이 지식에 맞추어 자연을 개조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면, 지식에 맞추어 신체를 조작하려는 행위가 바로 의학이 아닌가? “인간이 자연을 강요해서 인간의 규범에 복종시키고 또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개념”(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52쪽)이 신체를 대하는 생명과학 안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인체에 대한 지식의 탑을 쌓고, 그 탑에 기대어서 문제 있는 부위를 최대한 고쳐본다. 생명의 시간이 끝나는 시점을 계속 뒤로 미루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접근해서는 구멍 뚫린 몸만 만나게 된다. 메울 수 없는 구멍은 물론 죽음이다. 수많은 목숨에 빚을 지고도 이 구멍은 막을 수가 없다.

건강이 무병(無病)이 아니라면, 생도 무사(無事)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열심히 사는가, 고칠 수 없는 병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치료하는 것은 예정된 패배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신체에 대한 모든 것을 의학의 언어로 ‘이해하고 또 정의한 후에’ 행동하는 것이 정말 핵심일까?

이해할 수 없어도 세상은 계속 굴러가고 몸도 계속 살아진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조작하는’ 방법보다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삶으로 불쑥 쳐들어오는 여러 운동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같이 움직이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 리듬에서 갑자기 벗어났을 때 문제가 생겼다고 느낀다.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병이 들었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치료란 이런 이탈 이후에 다시 새 리듬을 짜보려고 노력하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운동이 아닐까? ‘의사의 임무’나 ‘과학의 방법’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말이다.

그렇다, 죽음 앞에 의학 지식은 필패한다. 수많은 병과 노화 앞에 의사는 무력하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의 패배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학적으로 답이 없는 신체 상태라고 해서 그 사람이 타인에 비해 이 세상에서 ‘덜’ 운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결국 처음의 질문은 해답이 아니라 태도를 묻기 위해 던져져야 한다. 삶, 죽음, 병, 치료가 모두 동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면, 건강은 단지 병들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단지 죽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삶이든 신체든 ‘어떤 상태’라고 고정되게 정의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생명은 대상이 아니라 극화된 운동”(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150쪽)이라는 의사 조르주 캉길렘의 말처럼, 건강한 삶을 그려나면서 병을 떨쳐버리고 끝내 병과 동행하는 ‘운동 방식’은 생명마다 다 다르며, 이 생명의 태도는 오로지 환자 자신만이 증언할 수 있다.

캉길렘은 과학에 환원되지 않는 생명의 가치를 다음의 문장으로 정리해냈다. “생기론은 방법보다는 요청이, 이론보다는 정신이 되어야 한다.” (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30쪽) 생기론이란 생명이 생물에 깃들어 있는 생기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무생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철학적 사조다. 생명과학에서 생기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지구를 구성하는 재료와 다를 바 없는 화학 분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생명의 자기보존과 자기조절 역시 자연의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된다. 생명은 완벽하게 무생물계의 일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기론은 이론이 아니라 환자와 의사가 공유하는 태도로 “요청”된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 생리와 병리 사이의 질적인 문턱을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는’ 환자 자신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들을 일반화하려면 큰 난관에 부딪히지만(지구상에 동일한 신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신체에서 이 경계는 아주 명료하다. 이런 구분은 물리나 화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생물에만 존재하는 ‘가치’이고, 이 가치가 생명을 생명으로 만든다. 캉길렘은 신체를 물리화학적인 기계로만 이해하려는 생리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임상이 가장 과학적으로 보장된 효과적인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임상은 과학이 아니며 결코 과학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임상은 과학이 아니며 결코 과학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임상은 치료학과 분리되지 않으며, 치료학은 정상 상태를 확립하거나 회복시키는 기술이다. 그 목적, 즉 어떤 규범이 설정되었다는 주관적 만족감은 객관적 지식의 관할 영역을 빠져나간다. 우리는 생명에 과학적인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

 (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257쪽)

생명은 병보다 병을 제압할 수 있는 상태를 선호한다. 그것은 생명 스스로가 견지하는 가치다. 그래서 좌절한 생명은 의학을 찾는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병을 극복하기 어렵겠다는 예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의학 지식은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이고, 제시되는 치료법과 그 치료법을 미리 활용해본 환자들의 실례는 바람직한 조언이다. 이런 자료를 제공하고 조언을 건네는 의사는 해결사보다는 증언자에 가깝다. <페스트>의 의사 리외는 이제는 죽어가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인정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게 의사의 본분이다. 싸우는 자는 환자 자신이다. 싸움의 시작에 의사를 부르는 것도, 싸움의 끝을 마무리하는 것도 환자여야 한다.

생명의 운동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확장이다. 생명의 내재적 규범이라고 하면 의학에서는 건강한 신체의 생리학적 상수의 집합이라고 이해하지만, 의사 캉길렘은 규범의 진가가 위기의 환경 속에서 변신을 꾀하는 생명의 변수에 있다고 말한다. 즉, 옛 규범을 부수고 새 규범을 만드는 게 ‘규범적 존재’가 가지는 진짜 의미다.

따라서 확장하는 생명의 운동은 규범의 위반가능성에 의해 측정된다. 이것은 규범을 만들고 또 지키지만,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 부숴버리고 새로 쌓을 수 있는 능력이다. 쿠바에 도착해서 3주 동안 설사를 하다가 마침내 수돗물을 마셔도 무탈해진 여행자의 장(腸),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날 무리 없이 강의 출석을 해내는 20대의 간, 코로나바이러스가 침입했어도 큰일 없이 넘겨버리는 무증상자의 면역계, 이것들은 현재 ‘확장하는’ 중이다. 그때 우리는 이 사람이 건강하다고 말한다. 병에 걸렸을 때 우리가 되찾고 싶어 하는 느낌도 바로 이것이다. 일상생활에 어떤 제약도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새 모험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느낌 말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병에 걸렸다가 거기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생물학적 사치이다.”(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226쪽)

또 다른 운동은 보존이다. 이것 역시 규범이지만 열등한 규범이다. 규범을 부수고 새 규범을 실천할 만한 신체적 역량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는 현 규범을 무조건 ‘보존하려고’ 한다. 가령, 폐쇄성 폐질환에 걸린 폐는 폐포의 면적이 다른 폐에 비해 1/4에서 1/3 가량이 적다. 이런 폐는 대기 오염 지대나 고산지대가 아니라 공기가 맑은 시골을 선호하고,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또, 노인들의 면역계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낼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아예 안 걸리는 게 최선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환경은 실내로 제한된다. 이런 보존 운동은 비정상이 아니다. 비록 환경은 제한되었지만, 그 안에서 생명이 무리 없이 자기 일상을 영위하는 한 그 신체는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상황이 병리적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 보존 상태가 다음 번 생명의 확장을 준비하기 위한 일시적인 휴지기이기를 바란다.

현재 호모 사피엔스들은 모두 보존 상태에 빠졌다. 다들 ‘코로나 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신체는 환경과의 관계가 변하면서 병리적 상태에 빠졌다. 만약 신체가 다시 확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는다면, 우리는 무력함에 젖어서 구원을 바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보여주는 천편일률적인 죽음의 모습은 스산하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다는 폐는 상상만 해도 무섭다. 공포가 자랄수록 방역의 빈틈을 강박적으로 다 메우고 싶어지고, n번째 확진자들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더 불안해진다. 백신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에게 거는 기대도 커진다. 물론 방역은 사망률을 낮추고, 백신이 개발되면 원래의 일상이 돌아올 확률도 높다. 그러나 완벽한 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방역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바이러스와의 불운한 만남이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다. (하루에 확진자가 4만 명씩 늘어나는 브라질 한복판에 있어도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K-방역으로 새 명함을 파는 한국에 있어도 어떻게든 걸리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백신이 나온다고 해서 다음 번 바이러스가 십 년 안에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환경 파괴 때문에 바이러스의 돌연변이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의 생명으로서, 변화를 거듭하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면역계에 운명을 거는 수밖에 없다. 확장과 보존의 운동을 번갈아 실천하면서 위기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글의 초반에 나는 환자의 면역계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의학은 쓸모없는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사태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생명의 가치는 생명체 자신의 신체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어떤 병에 걸리든, 치료에 임하기 위해서는 이 병을 겪어내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은 모두가 용기를 가져야할 때다.

살고 싶다는 말과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닮아 보인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죽음을 피해 달아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했던 환경이 붕괴되는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새 규범을 만들어보려는 생명의 운동이다. ‘무사하다’는 안도감은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게 좋다는 뜻이 아니라, 새 환경과 상호작용을 실험해볼 기회가 아직 남았다는 것에 대한 생명의 확장적인 반응이다. 나는 이것이 치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치료의 목적은 불로불사의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건강은 병의 제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껏 삶을 지탱시켜준 확장과 보존의 운동을 새롭게 되찾아보려는 환자의 자발적 노력이며, 그것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일찍 져버린 생명이 안타까운 것도, 환자를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새 운동에 가능성을 걸고 싶은 우리들 생명의 본능 때문이리라.

좋은 죽음을 위해서

캉길렘은 철학자였지만 이십대 후반에 의대에 다시 입학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유는 의사치고 신선하다. 생명의 특징이 건강이 아니라 병이라고 주창한 것이 그 예다. 이는 아플 때에야 생명은 비로소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좌절을 겪음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생명으로 이끌었다. 모든 (생리학적) 지식은 좌절된 생명에 대한 반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 (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253쪽) 거꾸로 자신을 과로시키는데 익숙한 건강한 신체는 자신에 대해 오만할 만큼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병과 죽음은 우리들이 한계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스피리트’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뫼비우스의 세계를 상상했다는 그 옛날 사피엔스들의 깊은 지혜가 내게는 없다. 그래도 그간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있을 때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우리가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거의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끝까지 목격하게 될 때 우리는 증언자가 되고, 사유라는 것을 시작한다. 달리 선택지가 없다. 잘 가야할 배가 침몰해서 동년배가 죽게 되거나 가족구성원이 자살을 할 때, 친한 친구가 긴 투병생활을 치르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 수가 없다. 바이러스 감염 리스크를 감수하고 방역 활동에 참여할지 말지 결정해야 할 때, 나는 내 세계가 바뀌지 않은 척 가장할 수가 없다. 세상은 죽음을 통해서 생명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재고하기를 요구한다.

잘 사는 게 잘 죽는 것과 일맥상통하다면, 나는 좋은 죽음이란 자살도 타살도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끝까지 운동하는 것이라 말하겠다. 생명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규범을 만들어내려 애쓸 때, 역시 생명답게 죽는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 순간은 육체의 본능을 거스르면서 자기 손으로 연출한 마지막도 아니고, 원한의 고리를 형성하는 타인의 손에 맞이한 결말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가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쥐어짜서 자기 힘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바로 그때 ‘수명을 다했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내 생사만큼이나 타자의 생사 또한 존중해주는 것이다. 가령, 지금 우리의 코로나바이러스를 물리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방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일회용품 쓰레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면 마스크보다 일회용 마스크가 더 안전하다고 해서, 바다에 사는 생물들에게 더 많은 쓰레기를 투척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또, 미생물들에게 퍼부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독제의 대가 또한 언젠가는 치러질 것이다. 소독제는 코로나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미생물을 죽이면서 일시적인 멸균 상태로 만든다. 균과의 접촉이 적어지게 되면 우리의 면역계는 게을러지고, 결과적으로 과민증에 빠지게 된다. 면역계 과민증은 심각한 질병으로 발달할 수 있다. 그뿐인가, 소독제의 사용이 잦아질수록 박테리아는 더욱 쉽게 여기에 저항력을 갖도록 진화한다. 항생제와 세면용품의 과도한 사용에 의해서 슈퍼박테리아가 발생한 사례는 21세기에 이미 몇 차례나 보고되었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인간의 세포 바깥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바이러스의 생존법은 반드시 사람 사는 모습을 닮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역’이라고 부르는 활동에도 딱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고 죽는 방법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이처럼 병과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내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계속 인식한다는 뜻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조심성이라는 감각을 갖기 위해”(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204쪽) 잊지 않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 부조리를 응시하면서 살라고 한 카뮈의 말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의사는 아무나 한다

병과 죽음을 대면해야 하는 사람이 의사라 한다면, 아무나 의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저 높은 지식의 탑을 쌓을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의사의 자격은 자격증 이전에 증언자의 태도부터 갖추는 것이다. 생명이 맞이한 파국과 그 파국을 통과하려는 몸짓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타루는 이 세계가 페스트를 옮기는 자와 페스트에 걸리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자로 양분되는데, 의사는 제3의 카테고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의사에게는 ‘치료’라는 무기가 있다. 아픔을 타인에게 옮기기도 싫고 아픔을 당하기도 싫다면 그 아픔을 치료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치료는 생명의 본능이다. 환자가 되어서 의사의 조언이 필요한 순간에도, 실제로 내 몸을 치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니 말이다.

내가 의학을 공부하는 쿠바에는 이런 셀프-닥터들이 많이 사신다. 아주 많으시다. 의사가 흔한 만큼 쿠바인들도 의학 지식을 홍수처럼 쏟아내며 자랑들 하신다. 건강에 관심들도 많고, 남의 건강 상태에는 더 관심이 많다. 꼰술또리오에 모여서 한바탕 수다를 떨다가, 의사의 말을 안 듣겠다고 억지를 부릴 때는 머리가 다 아프다. 그렇지만 코로나 국면 때는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가 고마울 뿐이었다.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꾸준한 걱정과 묵묵히 인내하는 태도, 또 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공동체 네트워크는 이 재난의 무게를 조금 덜어주었다. 8월에 나는 어렵게 탈출한 쿠바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그즈음이면 코로나의 기세가 한 풀 꺾여 있을 테지만, 지금까지 고립 상태를 견디면서 누적된 다른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쿠바인들이 다시금 이 사태를 함께 치료해낼 것인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캉길렘은 의사는 환자의 부름에 응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살아있는 환자는 잘 살기 위해, 혹은 잘 죽기 위해 의사를 부른다. 환자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제야 의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름에 먼저 응해야 한다. 우리의 불안, 아픔, 고통, 죽음의 예감 앞에 스스로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의사는 아무나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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