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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오랑, 거대한 습관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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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8-16 20:45 조회1,2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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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 거대한 습관의 덩어리



복희씨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그러나 사람이란 일단 습관을 붙이고 나면 그날 그날을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우리의 도시가 바로 그런 습관 붙이기를 조장하는 터이고 보면 만사가 순조롭다고 하겠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삶이란 아주 흥미진진한 것은 못 된다. 적어도 우리 고장에서는 무질서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다. 솔직하고 붙임성 있고 활동적인 우리 주민들은 여행자들의 마음속에 늘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남겨 준다.

(까뮈, 『페스트』, 책세상, 2017, 18쪽)

만사가 순조로운 도시, 오랑

주중, 러시아워가 되면 전차는 만원이었다가 낮이 되면 한산해진다. 배차 간격은 시간대별 유동인구수에 맞춰 놓았다. 모든 직장은 비슷한 시간에 문을 열고 비슷한 시간에 업무를 끝낸다. 의사 리유는 진료실에 오는 환자들을 돌보다가 짬이 나면 거동이 어려운 환자를 왕진한다. 시청의 임시직 서기 그랑도 회계 업무나 통계 등 일손이 부족한 자리를 채우며 일과를 수행한다. 수위 미셸은 자기가 관리하는 건물이 가장 깨끗하고 평판이 좋은 곳이라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건물 구석구석을 살핀다. 부자가 되려는 생각으로 가득한 또 다른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또는 카페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쁘다.

저녁 때면 변함없는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영화관 앞에는 줄을 길게 늘어선다. 주말이면 교회를 찾거나 해수욕을 즐기거나 이런저런 취미활동들을 한다. 파늘루 신부는 교회를 찾는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주일간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말을 바쁘게 보낸다. 예심판사 오통 씨네 일가족 네 명은 가끔 호텔을 찾아 예의바른 모습으로 단란하게 외식을 즐기고, 타루네 맞은편 집에 사는 키 작은 노인은 늘 같은 시간에 베란다에 나와 고양이들의 머리 위로 종잇조각을 뿌리며 장난을 친다.

흡사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도시 오랑. 이들 도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무질서. 출퇴근 시간대에 전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신호등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하면, 수위들이 동맹 파업이라도 하면 순식간에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니 톱니가 빠지지 않도록, 톱니에 이물질이 끼지 않도록 촘촘하게 매뉴얼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 완벽한 시스템 구축에 도시의 역량을 총동원한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질서정연함이 주는 안정과 편리함이 며칠씩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는 오랑이라는 도시가 만사가 예측 가능하고 순조롭게 돌아가는, 푸근한 곳이라는 느낌마저 주는 것이다.

이런 도시 오랑의 시민들, 그들은 실제로 순조롭고 푸근한 일상을 살고 있을까. 그 실상이 궁금하다.

흡사 다양한 크기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도시 오랑. 이들 도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무질서.

습관에 절어버린 사람들

<장면1 : 키 작은 노인의 가래침 사격>

그때 키 작은 노인은 고양이들 머리 위에다 대고 세차고 정확하게 가래침을 탁 뱉는 것이었다. 그 가래침들 중 하나가 목표물에 맞으면 그는 신이 나서 웃어댔다.(같은 책, 45쪽)

매일 점심 식사 후, 온 도시가 더위와 식곤증으로 졸고 있는 그 시간, 흰머리에 빗질을 단정하게 하고 군복 같은 느낌을 주는 옷차림을 한 꼿꼿한 자세의 노인이 자신의 발코니에 나타난다. 그리곤 “나비야, 나비야” 하고 더위를 피해 담벼락 밑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들을 부른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서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본다. 정확히 그 타이밍에 노인은 미리 준비한 잘게 찢은 종잇조각들을 거리 복판을 향해 뿌린다. 그러면 고양이들은 반사적으로 길 한복판으로 걸어 나와 종잇조각을 잡으려고 앞발을 쳐든다. 고양이가 자신이 원하는 거리에 왔다고 판단되면, 그 순간 고양이 머리 위로 가래침 사격을 한다. 가래침이 목표물을 명중시키면 신이 나서 웃어댄다.

그의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로 보아 퇴역 군인인 듯하다. 오로지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이 군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 믿을 뿐, 적진에서 죽어가는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종잇조각으로 유인한 뒤 흩날리는 종잇조각을 잡으려고 움직이는 고양이의 머리에 정확하게 가래침을 명중시키는 기민한 몸놀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유인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로 끌어들인 뒤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일에 쾌감을 느끼도록 오랜 세월 길들여진 몸. 그 몸에 새겨진 습이 까르마가 되어 퇴역을 한 마당에도 무엇이든 움직이는 물체를 목표물 삼아 가래침을 쏘아대는 사격중독자의 행태로 드러나는 듯하다.

<장면2 : 오통 판사네의 ‘예의바른’ 외식시간>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아내에게는 예의바른 핀잔을 던지고 자식들에게는 딱 부러진 말들을 쏘아 붙인다.(같은 책, 47쪽)

아내에게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예심판사 오통 씨. 깡마른 몸에 눈코입이 빈틈이 없어 모질면서 딱딱하게 보이는 그는, 쓰는 말뿐 아니라 예절이 몸에 밴 매너맨이다. 가족을 동반할 때는 항상 앞장서서 걷고 식당 문 앞에서는 옆으로 비켜서서 아내를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은 아들과 딸을 뒤따르게 하고 들어간다. 늘 자기들이 앉는 지정 식탁에 가서 앉을 때도 레이디 퍼스트를 잊는 법이 없어서 아내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는다. 그가 앉고 나면 두 아이들도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식탁에 앉은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임자는 극도로 불쾌하게 구시는구만!”이라며 아내에게 “예의바른 핀잔”을 주고, 자식들에게는 늘 “딱 부러진 말들을 쏘아붙인다.” 어린 아들이 죽은 쥐의 소문을 듣고 너무 흥분해서 그 이야기를 하려 하자, 밥상 앞에서는 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며 앞으로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매섭게 훈계한다. 아내는 “아버지 말씀이 옳아” 라며 남편의 말에 즉각 따른다. 아이들은 그 즉시 입을 다물고 각자 밥을 먹고, 근엄하고 예의바른 모범가장 오통 씨는 아내에게 습관적으로 해온 듯한 고갯짓으로 감사의 표시를 한다.

현직 판사인 오통 씨는 오랜 시간 판사직 수행에서 얻은 몸가짐과 어투가 습관으로 굳어버린 사람이다. 판사가 그의 유일한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법이 정해 놓은 형식과 절차를 철저히 지키고 법과 원칙에 따라 잘잘못을 가려 그에 걸맞은 처벌을 하는 판사의 직무는 가정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 늘 법정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그의 어린 딸은 오통 씨가 “예의바른 핀잔”을 쏟아놓을 때마다 언제나 겁에 질려 눈물을 글썽인다. 그걸 보는 오통 씨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복장을 단정히 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껏 고양이 머리에 가래침 사격을 해대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하는 그 키 작은 노인. 얼마나 삶이 무료하면 저런 짓을 날마다 의식을 치르듯 하고 있을까 싶어 딱한 생각이 든다. 오통 씨 가족의 호텔 외식 장면을 상상해 보면, 하나의 습관이 덩어리째 움직이는 것 같아 그 모습 또한 기괴하기까지 하다. 생기라고는 없는 딱딱하게 말라버린 덩어리들.

그들, 페스트를 만나다

거리에서 수없이 발견되는 쥐들 때문에 자극을 받았는지 고양이들이 사라져버렸다. (…) 키 작은 늙은이는 난처할 수밖에 없다. 노인은 머리에 빗질도 전처럼 하지 못한 채 좀 풀이 죽은 것 같았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후에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허공에다 대고 가래침을 탁 뱉고는 들어갔다. (같은 책, 46쪽)

  소정의 규정을 준수하는 판사는 자기 아들의 몸에서 병의 증세를 발견하자마자 리유를 불렀던 것이다.(…) “역시 그거죠?” 판사가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군요.” 리유는 어린애를 보면서 대답했다. (…) 오통 부인과 어린 딸은 격리호텔에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예심판사에게는 (…) 시립운동장에 시설 중인 격리수용소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 오통 씨가 규칙은 만인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이므로,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같은 책, 285-286쪽)

 

고양이가 사라지자 키 작은 노인의 일상이 흔들린다.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가 닥쳤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고양이가 사라져버려 하루 일과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사격훈련을 못하게 된 게 불안하고 힘겨울 뿐이다. 고양이가 사라지면서 그 또한 정처를 잃어버렸다.

오통 판사는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임시병원으로 수용되었고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한 가족의 구성원은 반드시 격리시켜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네 사람이 뿔뿔이 흩어지는 마당에도 여전히 법정에서 하던 대로 규칙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일 뿐 별 동요가 없다. 아들이 죽은 쥐의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할 때도, 그것이 페스트이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전염병이라는 걸 알려 죽은 쥐를 조심하라는 주의를 줄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못했다. 식탁 앞에서 더러운 말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식사 예절이 중요했기에 아들의 입을 막기에 급급했다.

고양이가 사라진 수개월 동안 그 노인은 자신의 사격 중독증을 알아채게 될까. 아님 또 다른 목표물을 찾아냈을까. 오통 판사의 아들은 페스트로 목숨을 잃는다. 그 후 오통 판사네의 “예의바른 외식시간”에는 변화가 생겼을까. 아니면 식구 수가 줄었을 뿐 모든 게 그대로일까. 딱히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후자일 것 같다. ‘키 작은 노인들’과 ‘오통 판사’들의 집합체인 거대한 습관의 덩어리, 그 견고한 덩어리 오랑을 쉽게 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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