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는 여행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유배지의 24시간은 평소의 24시간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시공간이 ‘질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하루가 내일의 하루를 기대할 수 없다면 그 하루는 같은 24시간이라도, 아니 그순간 이미 다른 24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용장에서 양명이 보낸 시간은 평균적인 시간으로 환산하면 채 2년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의 길이는 길거나 짧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굵거나 얇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두터운 삶 혹은 얇은 삶이라고 할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확실히 양명의 삶은 그 표면적 삶의 시간을 넘어 매우 두텁습니다. 59년의 삶, 2년여의 용장생활… 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번 장 모두에 입지, 근학, 개과, 책선 등으로 제시된 양명의 <용장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의 조리를 밝히다(敎條示龍場諸生)>라는 글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용장이라는 야만의 땅에서 양명은 배우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왕양명과 양명학 혹은 <전습록>은 그 자체로 ‘공부’가 주제라고 할 만큼 공부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습니다. 어디에서든 공부(혹은 배움)에 관한 주제가 빠지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병무(兵務)로 바쁜 와중에도 제자들의 방문을 받으면 제일 먼저 ‘요즘 공부가 어떠한가?’ 라고 묻는 식입니다. 맡은 직분 혹은 임무에 따라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기도 하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흉흉해진 지역 사회에 가장 먼저 학교를 재건하곤 했습니다. <전습록> 중권에 나오는 <아동 교육의 대의를 교사 유백송 등에게 밝히다>, <학교의 규약> 같은 글은 이러한 양명의 뜻을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병이 깊어져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자신을 방문한 제자에게 양명은 근래 공부가 어떠한지 묻습니다. 저는 삶에 대한 왕양명의 이러한 태도가 그의 삶을 두텁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고(傳) 익힌다(習)는 것.
양명은, 아니 유학은 왜 그렇게 배움을 강조하는 걸까요?
사람 중에는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있고(生知),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고(學知), 힘들게 노력해서 아는 사람(困知)이 있습니다. 나면서 아는 사람은 편안히 그것을 행하고(安行), 배워서 아는 사람은 이롭게 여겨서 그것을 행하며(利行), 노력해서 아는 사람은 힘써 행합니다(勉強行). 지행(知行)이 곧 공부입니다. 이들을 각각 성인, 현인, 학자로 말하기도 합니다. <중용>에 나오는 말입니다. <중용>에서는 혹은 태어나면서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노력해서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같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