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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페스트] 그 어떤 ‘팬데믹’에서도 살아남을 인간형, ‘그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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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10-09 18:56 조회1,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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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팬데믹’에서도 살아남을 인간형, ‘그랑’ (2)

복희씨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다행히도 나는 할 일이 있거든요”

#1 “더 이상 못 참아2단계 완화 첫 주말시내는 다시 북적

거리두기 2.5단계→2단계 첫 주말, 번화가 ‘바글’

젊은층들 술집·헌팅포차로 모여…”거리두기 지쳤다” (이데일리, 2020.9.20)

#2 “내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한계 다다른 코로나 블루

거리두기 2단계 격상 한 달째/ 불안·우울·스트레스 등 호소

고의적 자해 진료 36% 늘어/ 스트레스에 적극적 대응 필요

유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스트레스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불확실한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권고했다. (파이낸셜뉴스, 2020.09.20.)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오랑 시에 심각한 공포가 자리를 잡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향락으로 몰려가거나, 집안에서 페스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스스로 유형수가 되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2020년에도 재앙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염병은 여전히 잠시 왔다 사라질 “불쾌한 방문자”일 뿐이다.


전염병은 여전히 잠시 왔다 사라질 “불쾌한 방문자”일 뿐이다.

이 불청객만 물러가면 이걸 하겠다, 저걸 하겠다 떠들지만 그건 착각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보여주는 행보가, 평소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며 어디로 달려가고 있었는지를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다. 평소에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던 것이 전염병이 덮치자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 그 행태가 아주 찐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뿐이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급급해서 ‘내가 설마’ 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혹시라도 내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욕망을 억누르며 스스로를 괴롭혀서 코로나블루라는 병명을 얻거나. 어느 쪽이든 코로나에 대해 알려고 하는 마음도 없고 대책도 없이 오로지 모든 게 코로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붙들린 채 살고 있다.

오랑 시민들이나 지금 우리들이 느끼는 불안이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갈 바를 두지 못한 채 늘 같은 심리 상태로 살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 자리를 다양한 쾌락 충족용 상품들이 채워주었다. 낮에는 그 상품들을 구입할 돈을 버느라, 저녁이면 상품들을 소비하느라, 느낄 새가 없었을 뿐이다. 전염병이 닥치자 그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리고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면서, 불안과 공포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바로 그 일요일부터 우리 시에는 상당히 전반적이고 심각한 공포가 생겨났는데, (…) 밖으로 나오자, 리유는 밤이 신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이지 , 다행이야.” 그랑이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할 일이 있거든요.” “그래요?” 리유가 말했다. “그 점은 다행입니다.” (…) 그는 그랑에게 그 일에 만족을 느끼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제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까뮈, 『페스트』, 책세상, 2017,143쪽)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그랑. 그는 원고를 읽은 편집자가 직원들에게,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오’라고 할 만큼 완전무결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작가가 되려는 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생각과 말이 일치하는 글, 어떤 과장이나 왜곡도 없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리유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삶에서 건져 올린, 스스로가 가치를 부여하고 선택한 일이었다. 그래서 “만족을 느끼냐”는 리유의 질문에 “글쎄요, 제 길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자기 안에서 차오르는 기쁨이 있고, 길을 제대로 들어섰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건대 업무가 끝나면 리유와 타루도 그랑의 이 즐겁고 뿌듯한 글쓰기에 동참함으로써 휴식을 얻었다. 게다가 페스트의 활동 추이를 알려주는 통계 작업까지. 이런 ‘할 일’들이 있었기에 그랑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올해 초, 대구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왔을 때 우리 연구실도 2주 정도 멈춤에 들어갔다. 코로나19 사태 초반기라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불안감이 컸다. 하루 종일 코로나 관련 뉴스가 이어졌고 온통 코로나 천지가 된 듯했다. 때마침 8인의 학인들이 공동 집필한 『내 인생의 주역』 마지막 수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작업이었겠지만, 내 삶의 문제를 고민한 글들을 다시 읽으며 딱 맞는 단어를 찾아 문장을 고쳐나갈 때의 통쾌함이란! 그런 소소한 기쁨들이 그 작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했고 코로나로 인해 조금은 불안했던 시간을 견디게 해 주었다.

만약 뜻밖의 재앙 앞에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면, 그 자리를 분노와 불안 그리고 공포가 차지하게 되었다면,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길을 제대로 들어섰는지, 여태 돈을 벌고 쓰는 데에만 온통 정신을 팔고 있지 않았는지를.


(필자를 포함한 8인의 학인들이 공동 집필한 책 『내 인생의 주역』)

“이제는 너무 힘이 들어요”

그랑에게도 약한 고리가 있었다. 결혼 이후 점차 일이 생활의 중심이 되어 갔고 승진이 약속대로 되지 않으면서 아내도 일을 해야 했다. 그랑은 직장에서 돌아오면 늘 피곤했다. 아내한테도 무심해져 갔고, 서로가 점차 말이 없어졌다. 결국 아내는 그랑을 떠났다. ‘나는 당신을 무척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나도 피곤해요. 떠나는 것이 기쁘지는 않아요. 꼭 기뻐져야만 새출발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라는 요지의 편지를 남기고. 적절한 시기에 그녀를 붙들어둘 ‘좋은 말’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그랑을 내내 힘들게 했다.

그 후로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언어를 찾는 일에 더욱 몰두했다. 그것은 그 이전부터 스스로가 부여한, 일생을 두고 수행해야 할 미션이었고, 그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해도, 그 때문에 아내가 떠났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졌다. 그랑이 보건대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튿날 리유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파는 가게 진열창을 들여다보며 울고 있는 그랑을 발견했다. 그랑이 울면서 말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쓸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그녀가 잘 알 수 있도록…. 그래서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 “이건 너무 오래 계속돼요. 이젠 차라리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 수 없죠. 아! 선생님! 내가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겠죠. 그러나 그저 정상적이 되기 위해서만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너무 힘이 들어요.”(같은 책, 350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과 쾌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비전을 세우고 그에 따라 일상을 구성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돈’도 ‘스펙’도 안 되는 일은 모두 ‘쓰잘데기 없는’ 것이 되고 마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극도로 지친 몸에 아내에 대한 감정까지 격해지면서 균형을 잃어버린 그의 몸과 마음을 페스트가 덮쳤다.

호흡조차 곤란해진 그랑은 이미 폐가 감염되어 살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정신은 훨씬 또렷했다. 그 동안 써온 원고를 리유에게 건네며 읽어달라고 했다. 50페이지 남짓한 원고에는 온통 같은 문장을 수없이 베끼고 고친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 마지막 페이지에 정성 가득한 글씨로 ‘나의 사랑스런 잔, 오늘은 크리스마스요….’ 라는 아내에게 쓰다 만 편지가 있었고, 그 앞에 날마다 고쳐 쓰던 문장의 최종본이 적혀 있었다. “5월의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어떤 날씬한 여인이 눈부신 밤색 암말에 몸을 싣고, 꽃이 만발한 사이를 뚫고 숲의 오솔길을 누비고 있었다….”(352쪽)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가 찜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의 감정도, 형용사에 대한 고민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랑은 그것을 태워버리라고 연거푸 소리쳤다. 그랑의 원고뭉치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자신도 페스트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랑이 죽어가는 모습이 밤새 리유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부 없앴죠. 형용사들은 전부요.”

이튿날 아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랑이 침대에 일어나 앉아 타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리유를 보자 그랑이 말했다. “아! 선생님.” “내 잘못이었어요. 하지만 다시 시작하겠어요. 다 외우고 있거든요. 두고 보세요.” 그 무렵, 가망이 없어 보이던 여자 환자 한 사람도 살아났다. 리유의 관할에서 이런 일이 4건 더 있었다. 치료법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페스트가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고, 뜻밖에도 그랑이 살아난 것이다. 그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잔에게 편지를 썼으며, 지금 아주 마음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예의 그 문장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전부 없앴죠. 형용사들은 전부요.”(같은 책, 406쪽)

그랑은 왜 글이 내내 첫 문장에서 맴돌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날씬한’ 여인이라고 할까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할까, ‘밤색 털의’ 암말이라고 할까 ‘검은 밤색 털의’ 암말이라고 할까에 집착했던 자신이 보였다. 쓸 수 있는 형용사는, 부지기수였다. 이걸 써 놓고 보면 뭔가 어긋난 것 같아 저걸 덧붙이고, 저걸 덧붙이고 보면 또 뭔가 부족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형용사, 즉 이미지에 붙들려서 정작 자기 사유를 전개하지 못했음을, 아내에 대해서도 혼자서 이미지를 키워왔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랑은 다음 또 그 다음 문장을 써나갈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형용사, 즉 이미지에 붙들려서 정작 자기 사유를 전개하지 못했음을, 아내에 대해서도 혼자서 이미지를 키워왔음을, 깨달았다.

우리들 역시, 누군가 만들어 놓은 형용사를 덕지덕지 갖다 붙이는 데에 삶을 허비하고 있다. 그랑의 말을 빌린다면, 류머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40년의 행로 역시, 내 삶에서 형용사를 빼는 과정이었다. 20대 그 시절, 새로운 치료를 시작할 때마다 가졌던 기대들. 굳어버린 뼈마디들이 반듯하게 돌아와, 좋아하는 스포츠를 마음껏 즐기고, 친구와 나란히 숲길을 걸으며 장래를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기대는 번번이 어그러졌고, 그때마다 상상 속에서 이미지를 만든 만큼, 형용사를 덕지덕지 붙인 그만큼의 좌절을 맛보았다. 더 이상 어떤 치료도 무효하다는 절망감 앞에 섰을 때, 그때서야 이미지로 채워진 희망의 민낯을 보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으며, 현재를 끊임없이 유예시켜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 끝에 만난 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며 삶을 탐구하는 글쓰기다. 이는 삶에 덕지덕지 붙은 형용사를 빼는 과정이었고, 그러면서 실제 몸도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다.

의사 리유가, 그랑이야말로 어떤 팬데믹에서도 살아남을 인간형이라고 느끼게 된 제1조건은 일단 그의 허약한 몸이다. 파이팅이 넘치기는커녕 일상조차도 근근이 꾸려가는 신체니 모든 사람이 달려가는 욕망으로부터 자연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돈벌이가 일순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비전이 있다. 정확한 자기 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일에 몰두하는 퇴근 후의 저녁 시간은 신성불가침이다. 쾌락에 탐닉하는 저녁의 삶과는 역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것. 이해관계를 따지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과도한 불안과 공포를 갖지 않는다. 이 세 가지만으로도 그는 이미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또 한 가지. 보건대를 이끄는 타루의 말을 빌린다면, 스스로를 병독으로부터 지키고 누구에게도 병독을 옮기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다. 그랑이야말로 그런 의지와 긴장이 몸에 밴 사람이다. 이 긴장은 불안과 공포로 노심초사하는 데서 생기는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꼼짝 않고 있으면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런 수동적이고 위축된 태도는 오히려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결코 코로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없다.

리유가 보기에 그랑이야말로 자신의 신체 조건에 맞춰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출처 불명의 동네 소문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전염병이라는 재앙 앞에서는 이해관계를 떠나 그것을 막는 일에 망설임 없이 연대하는,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리유는 그랑을 보면서, 페스트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한 사람을 골라서 쓰러뜨리고 허약한 사람을 남겨 둔다는 기록을 떠올렸으며, 그랑이야말로 “그 어떤 팬데믹에서도 살아남을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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