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유배의 최종목적은 다시 떠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유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떠나왔지만 머물지 않는 것이고, 다시 떠날 것이지만 잘 머무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여튼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떠나온 그곳을 본래의 자리로 삼아 돌아가기 위한 유배생활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배의 아이콘 다산 정약용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18년의 유배 생활동안 다산은 최소한 세 번 정도의 해배 기회가 있었습니다. 왕의 재가를 얻기까지 했지만 집행(!)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들과의 편지에 보면 그 중 한 장면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산은 다른 준비를 모두 해두었으니, 최종적으로 해배를 위해 약간의 ‘타협’을 하자는 아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다산의 ‘꼿꼿함'(결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 편 그저 단순히 ‘돌아가는’ 정도로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다산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해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한 건 다산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18년의 유배를 마친 다산이 돌아간 곳은 어디였을까요.
묘족의 경우,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기본적으로 기록에 의한 역사가 없습니다. 고대 묘족에 관한 기록은 많든 적든 모두 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이 말은, 묘족의 기록은 언제나 누군가(기록자)의 타자로서만 고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고문헌상의 고대 삼묘(三苗)가 현재 묘족의 조상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수천년을 건너 송나라에 이르러서야 중국 문헌에 타자로서의 묘족 기록이 조금 등장할 뿐입니다. 특히 주자는 ‘호남 지역에 료(僚), 흘(仡), 령(伶), 묘(猫)가 있는데 이중 가장 ‘가볍고 민첩한‘(輕捷) 이들이 묘족이며… 이 묘족이 고대 삼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주희, <기삼묘(記三苗)>; <치우, 오래된 역사병>, 김인회 지음, 푸른역사). 주자에게 묘족은 통제되고 다스려져야 할 위험한 이민족=타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