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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수성] 진짜는 가짜를 만들어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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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강 작성일20-10-18 17:18 조회2,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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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는 가짜를 만들어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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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박지은



이해하기 힘든 진사은과 향릉


 명망 있는 집안의 선비 진사은에게는 다섯 살 된 딸 영련이 있었다. 등불놀이에 영련을 보냈다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유괴된 것이었고 영련은 그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에게 맞고 살았다. 영련이 크자 유괴범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 망나니 설반에게 팔았고 그 후 영련은 향릉이라는 이름의 첩이 되었다. 모진 환경 속에서 설반의 처인 금계에게 모함까지 당하고 향릉은 병들어간다. 가장 의문이었던 것은 ‘왜 진사은은 딸의 불행을 다 알면서도 구하러 가지 않은 것일까?’하는 점이다. 그는 가우촌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딸자식과의 사사로운 일에 불과한 겁니다.(중략)

지금은 설씨 댁에 시집을 갔지만 난산으로 해서 겁을 마치고 아들 하나를 남겨 대를 잇게 해놓았습니다. 이 시각이 바로 속세와의 인연을 끝내고 해탈하는 때이므로 마중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설근, 『홍루몽12』, 청계, p268)


 진사은은 딸과의 인연이 사사로운 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씨 집에 시집을 가서 겪었던 삶, 아이를 낳고 죽은 향릉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초연한 태도로 딸의 죽음을 담담하게 해탈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향릉이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고 불만이 없다. 금계에 대한 보옥이의 걱정에 오히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서 화를 낸다. 또 금계의 모함 때문에 설부인이 향릉이를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겠다고 말하자 향릉이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며 통곡을 한다. 누군가 향릉이를 구하려고 했어도 설씨 집안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사은도 향릉이도 이렇듯 삶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독자인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왜 향릉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꾸려나가지 못했다. 유괴 당했다. 남편에게 매 맞고 살았다. 모함 때문에 죄를 뒤집어썼다.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었다. 억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계속 그 사건들에 끌려 다니기에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황당한 태도 


 그래도 향릉이가 가장 능동적인 의지가 보이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갔던 장면은 3권의 ‘시를 배우는 향릉’이 부분이다. 설반의 첩이라는 위치는 여러모로 불안한 상황이다. 그래서 향릉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불안해하지 않고 그저 시를 짓고 싶어 한다. 처음 대관원에 들어올 때부터 시를 배우고 싶은 평생소원을 보차에게 말했다. 금계가 시집올 때에도 같이 시 짓기 놀이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시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시를 느낀다. 시를 쓸 때면 넋을 놓고 골몰하거나 쪼그리고 앉아 땅에 글씨를 써보기도 하면서 시상에 잠겨 있다. 그래서 향릉의 빛나는 순간은 대관원에 들어가 시를 발표 할 때이다. 드디어 고심을 해서 지은 세 번째 시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향릉이 어떤 시를 지었는지 궁금하면 다음 회를 보시라.’하고 기대감을 주면서 그 장의 끝을 맺는다. 독자인 나는 기대를 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향릉의 시를 보여주긴 했지만 어떤 친척이 방문을 했다면서 딴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향릉의 시는 그렇게 사라진다. 

 작가의 이 황당한 태도는 무엇인가? 향릉은 고생해가며 시 짓기에 대한 의지를 실현했지만 칭찬이라는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작가는 향릉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그냥 스쳐 보내버린다. 이 부분을 적지 않았다는 것은 향릉의 시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작가도 진사은도 향릉이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와는 다른 듯싶다. 나는 고생을 하면 그것을 겪은 후에는 보상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고생-보상’의 인과 관계를 깨뜨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인과 관계가 없는 향릉의 삶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할거라고 평가한다.


얼어붙은 감수성 


 사실 홍루몽에서 다른 인물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절세 미녀이고 시도 잘 쓰는 대옥은 보옥을 끝없이 의심하다 병들어 죽는다.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매사에 현명한 선택을 하는 보차는 남편이 급제했으나 바로 사라지는 봉변을 겪는다. 엄청난 말재주와 비상한 처세술을 가진 부지런한 희봉은 ‘제 한 몸만 편하길 바란다.’는 평판을 듣고 피를 토하고 죽는다. 보옥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자신의 옥을 잃어버리고 백치가 되더니 갑자기 급제를 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모든 인물들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들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게 된다. 나에게 이해되는 삶이란 ‘고생-보상’의 인과 관계가 있는 삶이다. 그 외의 삶들은 이해가 안 된다. 나에게 왜 이런 틀이 생겨났을까? 보상을 잘 받는 사람들이 부럽기 때문이다. 그 부러움 때문에 틀은 내 안에 새겨졌다. 그래서 보상을 받을 때면 잠시 행복감에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상이 없는 날들에서는 분노하거나 허무해했다. 그리고 그 인과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감정들은 감수성을 얼어붙게 했다.


시의 장점을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거 같아요. 하지만 생각하면 정말 생동하는 맛이 있어요. 이치에 닿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음미하면 이치에도 맞고 정리에도 맞는다는 거예요 (조설근,『홍루몽3』,나남, 194p) 


 향릉이가 시의 장점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홍루몽에는 시가 많이 나온다. 시가 보일 때 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만 읽는 것이라며 읽지 않았다. 시를 그냥 무시해버렸고 느끼지 못했다. 반면 향릉이는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시에 대해서 생동하는 맛을 느끼고 곰곰이 음미한다. 나는 왜 시를 느껴 보려 하지 않는 것일까? 시는 인과 관계가 없다. 나의 감정은 인과 관계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다. 특히 결과인 보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게 감수성은 틀 안에서 얼어붙게 되었다. 홍루몽의 인물들도 시처럼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인물들을 무시했고 공감하지도 못했다.


가짜임을 알려주는 가짜 이야기


 첫 부분에서 작가는 홍루몽 이야기가 진짜라고 강조한다. 이 글은 조금도 덧붙이거나 지어내어 공연히 사람들 누을 현혹시켜 진실을 잃게 하지 않았다. (같은 책 1권,30p) 이 책의 주제가 정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을 뿐 결코 망령되게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으며 음란하게 불러내고 농염한 밀약으로 사사롭게 백년가약을 맺는 작품과는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같은 책,31p) 라고 서문에 적혀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한낱 부질없는 이야기였구나!”하며 떠난다. 그리고 ‘애당초 다 같은 꿈이었던 것을 세인들의 어리석음 비웃으면 어쩌랴!’라는 시로 소설의 끝을 맺는다. 결국 이 소설도 꿈 이야기이고 가짜라는 것이다. 왜 서문에는 진짜라 우기고 끝에서는 꿈이라 말해주는 것일까? 꿈은 욕망에서 시작된다. 욕망이 자라면서 그 안에서 생겨나는 반복되는 행동과 감정들은 그것을 점점 견고하게 만들어 버린다. 스스로 만든 꿈을 진짜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시대가 진짜라 믿는 출세, 백년가약 이야기와는 충돌되는 이야기를 쓰고 이것이 진짜라고 우긴다. 소설이라는 것도 가짜이긴 하지만 독자들이 진짜라고 여기는 것들도 사실은 가짜라고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와는 다른 욕망을 추구하는 기이한 아이, 보옥이를 등장시킨다. 홍루몽은 보옥이를 통해 시대가 감추어두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또한 ‘고생-보상’의 꿈을 진짜인 줄 알고 살고 있었다. 내가 고생을 해서 그린 삽화 작업이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옳지 않다며 분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향릉과 진사은은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세상에 어디 있냐며 가짜 이야기라고 무시하려 했지만 그들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진사은과 향릉은 나와 같은 틀이 없으니 내가 인식하는 불행에 대해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이것이 삶이고 살 방도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만들어진 욕망의 꿈이 진짜라고 믿는 순간 틀이 생긴다. 그 틀 밖에 있는 것은 가짜이므로 무시해 버리면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홍루몽이라는 가짜는 나의 진짜가 가짜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가짜가 진짜를 사르르 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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