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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성] 세에라자드-따라가기(천일야화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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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상례 작성일21-12-27 17:25 조회1,0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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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라자드.jpg

 

 

 

세에라자드-따라가기

-앙투앙 갈랑의 천일야화를 읽고-

 

박상례(수요 대중지성)

 

 

얼마 전 남편이 폐암이 거의 확실하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었다. 옆구리가 아프더니 호흡곤란이 심하게 와서 검진을 받은 결과였다. 내가 아들네 집에 가있어 사정을 잘 몰랐다. 몸이 좀 안 좋은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전화로 이 사실을 들었다. 대뜸 나는 실비는 잘 내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편이 얼마나 아플까, 지금 암 판정을 받은 남편의 심정이 어떨까?’하는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 내 몸도 피곤한데 어떻게 치다꺼리를 해야 하나,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면서 내 걱정만 했다. 함께 병원을 다니면서도 남편을 원망하고 있을 뿐, 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천일야화를 읽게 되었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것

 

천일야화는 옛날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샤리아왕이 잔인한 명령을 하게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그는 고귀한 왕비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고 믿은 부인의 부정을 목격하게 된다. 크게 실망하여 온 도성의 처녀들을 하룻밤 왕비로 받아들여 동침한 뒤,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교수형에 처하라는 법령을 만든 것이다. 이런 잔인한 일이 벌어져 온 나라가 슬픔과 두려움에 빠지자 재상의 딸인 세에라자드는 아버지에게 왕과 동침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제게는 지금 술탄님께서 이 도성의 각 가정에 범하고 계신 그 야만스러운 행위를 중단시키려는 뜻이 있습니다. 저는 딸을 잃게 될까봐 떨고 있는 이 도성 어머니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싶습니다.”(앙투앙 갈랑, 천일야화, 열린책들, 32, 33)

 

세에라자드는 자식을 잃게 될 부모의 아픔과 두려움을 없애주고 싶은 마음을 간곡하게 표현하여 반대하던 아버지를 설득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만 보였던 이야기의 시작을 세에라자드에 집중하며 다시 읽자 그녀의 미덕이 느껴졌다. 이어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나아가 그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그녀와 대비되는 내 모습이 불현 듯 떠올랐다. 암이 거의 확실하다는 말을 듣고 실의에 빠져있을 남편이 아니라, 내 일상이 불편해질 까봐 걱정하던 모습. 어떻게 암 선고 받았다는 사람한테 실비 제대로 내고 있나를 물었을까? 결혼 생활 내내 나를 힘들게 했으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평소에 나는 타인과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믿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기 바라며, 세에라자드를 따라가 보았다.

 

평안하게 살던 세에라자드는 완전히 다른 삶의 장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

 

 

공부의 힘

 

첫째는 여성으로서 보기 드문 용기와 무한한 재치와 경탄스러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수한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기억력 또한 비상하여 한 번 읽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철학, 의학, 역사, 각종 예술에 능통했으며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들을 능가하는 훌륭한 시를 짓곤 했다. (같은 책, 32)

 

세에라자드는 지혜와 통찰력, 용기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야기로 왕을 설득하는 힘을 갖게 되었으리라. 나는 어떠한가? 감이당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나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를 일상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지혜와 용기를 배우고 있다고 믿었지만 타인에게, 특히 남편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왜 공부 하는지를 잊고 있었다.

 

다행히 남편은 단순히 염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나는 다행이다라는 말은 제쳐 놓고 몸이 자신을 잘 돌보라는 경고를 보냈으면 생활을 바꿔야지, 예전과 똑같이 과식하고, 텔레비전만 보면 어쩌냐...’는 잔소리를 해대었다. 세에라자드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유연하게 풀어낸다. 남편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유연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부드럽게 대하는 것은 내 자존심을 꺽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남편의 잘못을 지적하고, 설득하며, 교정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면 안된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억압을 받아왔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부부관계를 나도 모르게 상명하복의 관계로 설정하고, 이제는 내가 제압하는 위치가 되어 주도권을 휘둘러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겉으로는 부부의 평등이 어떻다는 등 공허한 말들을 떠들며, 의식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다. 왕비의 부정에 굴욕감을 느낀 샤리아왕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처럼 받은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에라자드를 따라왔던 길에서 샤리아왕과 닮은 나를 만났다.

 

 

이야기주머니.jpg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불안하게 시작한 세에라자드와 왕과의 동침은 1001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사랑과 권력에 상처를 받은 왕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세에라자드의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섞이고, 동물과 사람의 경계가 사라지고, 이집트와 중국을 넘나드는 가볍고도 경쾌한 이야기들. 그 끝이 어딘가를 호기심을 갖고 따라가던 왕은 어느새 능력 있고 마음이 따뜻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히려 이야기로 마음이 풍요로워진 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아무리 용기 있고, 이야기의 힘을 믿는 지혜로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오랜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으리라. 그녀의 또 하나의 미덕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왕이 명령을 거두어들일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공부에 내어보려 한다.

 

천일야화를 읽고 에세이를 시작할 때는 세에라자드의 힘, 특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 은근한 비유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기술을 장착한 그녀의 미덕을 배우고 싶었으나 준비 되지 않은 나를 보았다. 그러니 먼저 천일야화와 같은 이야기의 고전들이 펼치는 삶의 무수한 조각과 그 관계망을 탐구하고 습득하여,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자. 나는 들을 준비가 된 나의 첫 번째 청자이므로. 그러다 보면 샤리아왕이 변하듯 견고한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조금 더 나아가 나는 사람들에게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나를 상상한다. 자신 있게 세에라자드와 같은 절단신공을 펼치며, 타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전달하는 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이 되어 있다.

 

에세이를 쓰면서 세에라자드를 닮으려 시도하는 동안 남편에게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를 수시로 발견하게 되었다. 대단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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