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과 마주한지는 벌써 7년이 넘어간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혼자 조용히 걷고 싶을 때는 물론이고 마음이 울적하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공원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한다. 4년 전부터는 공원 안에서도 특별히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다. 사시사철 푸르디푸른 소나무들 앞에서다. 아이들에게 엄마 공원에 간다고 하면 “엄마, 또 소나무랑 얘기하러 가?”하거나 “엄마 또 소나무한테 가지?”라고 할 정도다. 소나무들 앞에만 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연결되는 느낌이라는 걸, 아이들도 아는 눈치다. 소나무들에게 처음 말을 건넨 건 누워계신 친정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고부터였다.
아버지는 4년을 집에서 누워계시다 작년 7월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3주차에 돌아가셨다. 대기업에서 30년 넘게 임원으로 지내시다 퇴직 후 사업을 하셨는데 잘 되지 않자, 외부와 단절한 채 살기 시작하셨고, 오래 지나지 않아 마음의 병이 몸으로 드러난 것이다. 가족들은 누워계신 아버지가 안쓰러워 하루빨리 일어나시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며 보다 기쁘게 해드리려고 애를 썼지만 아버지 마음을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고립되어만 갔다.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는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신 채 삶의 고통도, 죽음의 고통도,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듯 계시다, 아침이 밝자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죽음을 통과하셨다. 나에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아버지가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태운 운구차량에 따라올라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내내 전날 쓴 4장의 편지를 읽어드렸다. 눈물이 범벅된 와중에도 아버지 꼭 들으시게 최대한 분명한 어조로 읽고 있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응!”이라며 대답하신 것이다. 분명 아버지 목소리였다. 얼마 전 낭송수업 때 읽은 <호모 큐라스>에서 귀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닫히지 않는다고 했다. 또, 최근에 양자론을 배우면서 하나의 파동은 여러 파동의 간섭으로 일어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배웠다. ‘죽음의 문턱에 계셨던 아버지가 내 메시지를 듣고 온 우주의 힘을 다해 대답해주신 게 아닐까?’, ‘운구차량에 동승하고자 했던 내 행동과 편지를 읽어드린 말의 파장이 상호작용하며 아버지의 음성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많은 생각을 하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