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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수요대중지성]나의 글쓰기 입문서,『벨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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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7-04 20:32 조회7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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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쓰기 입문서, 『벨킨 이야기』

박 지 은(감이당)

“이걸 지은 씨만 알지 누가 이해를 합니까!” 3년 동안 대중지성 프로그램에서 12번의 에세이를 썼다. 하지만 늘 같은 피드백을 듣게 되는데 사람들은 내 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나대로 진심을 담아 썼지만 읽는 사람들은 나의 의도를 모른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이지만 숙제로 인해 살림과 육아를 더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딸은 특이한 공부를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진심과 달리 삶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또 그것이 타인이 보기에 의도를 알 수 없어 이상해 보이는 인간을 괴짜라 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괴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을 써내려간 에세이 역시 타인에게 아주 먼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운명을 맞이했다고 본다.

괴짜의 이야기가 조국 문학?

영지의 가금 숫자가 현저하게 감소한 것이 밝혀졌는데 이반페트로 비치(=벨킨)는 앞의 정보에 만족하여 더 이상 소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소생이 엄격한 수사와 심문으로 사기꾼 촌장 녀석을 궁지로 몰고 가서 그 녀석이 완전히 입을 다물게 될 수밖에 없었을 바로 그 순간,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소생은 이반 페트로 비치가 의자에서 심하게 코 고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 『벨킨이야기』, 믿음사,p12)

벨킨은 이웃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겼고 들은 이야기들을 종이에 옮겨 『벨킨 이야기』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야기들이 ‘조국 문학’이라는 것이다. 간략할망정 이제는 고인이 된 작가의 연보를 첨부하여 조국 문학 애호가들의 지당한 호기심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키기를 희망했습니다.(같은책,p9) 간행자는 작가의 친구에게 그의 연보를 부탁한다. 그런데 친구가 보내준 작가의 연보가 뭔가 좀 이상하다. 자신의 영지를 관리해야 하는 지주가 경영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 솜씨가 있는 가정부에게 영지 관리를 맡겨버리고 이야기에 빠져있다. 그것을 이용하여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다. 친구는 사기꾼 촌장을 조사하여 도와주려 하지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주 역할에는 관심이 없고 엉뚱하게 이야기에 빠져있다.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도 벨킨처럼 의도를 알 수 없어 이해하기 힘든 괴짜들이다. 「발사」의 실비오는 매일 사격 연습을 하지만 정작 상대와 결투를 할 때는 발사하지 않는다. 「눈보라」의 마랴는 가난한 소위보와 사랑에 빠졌다며 가출까지 감행하지만 애인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역참지기」의 역참지기는 경기병과 잘 살고 있는 딸을 위험에 처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려고 한다. 「귀족아가씨-농사꾼처녀」의 무람스키는 자신이 러시아 땅의 지주이면서도 영국식으로 정원을 가꾸는데 재산을 다 써버린다. 아니, 괴짜가 쓴 괴짜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러시아를 사랑하는 ‘조국 문학’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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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의 기원

마랴 가브릴로브나는 프랑스 소설로 교육 받았고 그 결과 물론 사랑에 빠졌다.(같은책, p38)

「눈보라」의 주인공 마랴 가브릴로브나는 신붓감으로 인기 많은 17살 아가씨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가난한 소위보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건 프랑스 소설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둘의 사랑을 막자 그것은 소설 속의 장애물 장치처럼 현실에서 작동되고 둘은 세상의 잔혹함과 맞서는 아주 그럴듯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다른 작품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부유하지 않지만 많은 군사 서적과 소설을 읽는 실비오, 부모를 떠나 길을 헤매는 자의 성경 이야기들로 방을 장식한 역참지기, 영국 소설로 딸을 교육시키고 자신의 러시아 영지를 영국식으로 경작하는 무람스키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 빠져있는지 모르는 타인의 눈에는 그 행동이 괴상하게 보이고 괴짜라고 여겨진다. 괴짜의 엉뚱한 행동의 기원은 교육된 혹은 스스로를 교육한 이야기에 있다. 당시 유행했던 서구의 낭만적 이야기는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시켰고 이 감성에 빠진 러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삶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다.

벨킨은 러시아 문학으로 교육받았고 그래서 러시아인 고유의 감성을 갖고 있었다. 『벨킨 이야기』가 ‘조국 문학’이라고 명명된 이유는 러시아의 감성으로 러시아 이웃들의 삶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과 달리 낭만적인 이야기에 빠지지 않은 인간이었고 더 나아가 낭만주의 작법과는 다른 ‘작가가 직접 듣고 옮긴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다른 인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괴짜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pexels-mike-b-3820181하지만 어떤 이야기에 빠져있는지 모르는 타인의 눈에는 그 행동이 괴상하게 보이고 괴짜라고 여겨진다.

러시아어로 이스토리아<istoriia>는 이야기와 역사의 뜻 모두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전과 후라는 맥락이 생겨나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 이렇게 태어난 역사적 맥락은 다음 세대가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갈 힘을 준다. 벨킨은 계몽주의에 반발하여 삶을 예술적으로 만들려는 낭만주의가 생겨났고 그 맥락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영웅이나 귀족들을 내세운 낭만적 이야기로 교육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범한 서민들의 모순된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 후대 독자들에게 『벨킨 이야기』는 시적 분위기를 가진 ‘낭만주의’에서 직접 듣고 옮긴 ‘사실주의’로의 이동이 보인다. 또 서구의 낭만주의로 단절된 러시아인의 이야기를 되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러시아 근대 소설’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낭만적인 글쓰기’에 대한 각성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림 하나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 그림은 스위스의 어떤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그림 속의 풍경 때문이 아니라 그 그림이 총을 쏜 자리위로 또 총을 쏘아 두 방의 총알로 관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같은책, p30)

낭만주의 시대 때부터 화가는 풍경을 은유하여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 맥락을 모르는 이가 그림을 액자라는 프레임에 넣고 벽에 거는 순간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실비오는 많은 소설을 읽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것들을 모두 가진 백작이 나타나자 작품의 의도와 맥락은 모른 채 그저 이야기 속의 낭만적 분위기에 취해있는 인간임이 드러난다. 질투에 휩싸여 명분 없는 결투를 신청하고 이에 그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자 집요한 복수를 꿈꾼다. 백작에게도 자신이 느낀 상실의 괴로움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가 결혼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결투를 신청한다. 백작의 총알은 실비오를 빗겨 나 벽에 걸린 풍경을 쏘게 된다. 그때 사랑하는 여인이 그들이 있는 방에 들어오고 그는 실비오에게 겁먹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 목적을 달성한 실비오는 그의 총알구멍에 다시 총을 쏴 명중시키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것이 실비오가 자기만 진심이고 혼자만 후련하다고 여긴 복수 이야기의 끝이다. 삶은 자신을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는 풍경이 아니다. 구멍 난 풍경화는 작품이 아니라 추태의 기념물일 뿐이다. 실비오는 맥락 속에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미성숙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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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맥락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있다는 점에서 나와 실비오는 닮아있다. 나는 그동안 삶에서 동떨어진 낭만적인 기대로만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좋은 엄마라는 스스로를 교육한 이야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현실과 어긋날 때마다 화가 나거나 나쁜 엄마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실에서의 육아는 어려운 것이었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명목으로 시작한 공부는 숙제를 구실로 육아를 피하는데 이용했다. 사실 나는 괴짜라기보다 자신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 모르고 그래서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였다. 그러니 글은 어떻겠는가!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세요!” 이것 또한 매번 들은 에세이의 피드백이었다. 글쓰기가 의도를 가진 노동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낭만적인 수단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장황한 인상과 분위기를 적은 것이 나의 진심이라고 믿었다. 늘 의도를 모른 채 되는 대로 써 내려갔다. 나는 소통이 아니라 독백하고 있었다.  

차원이 다른 괴짜의 글쓰기

벨킨 같이 차원이 다른 괴짜는 자신이 삶의 어떤 맥락에 있음을 알고 그 흐름에서 새로운 의도를 만들어내고 적용시켜 세상과 소통하는 자였다. 그의 작품은 과거 서구의 성경, 로맨스, 영웅 이야기들이 러시아인들의 삶에는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 의도는 서구의 문학을 진부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의 의도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존재하기에 이야기로서 그도 지금까지 존재한다.

나의 에세이가 소통하는 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과거 교육받거나 스스로를 교육한 이야기와 일상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밝히는 글을 써야 한다. 지금은 파편적 이야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가 세상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 이야기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일상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관계에 대한 고민이 글의 맥락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서 의도가 생겨나기 때문에 소통하는 글로 연결될 것이다. 또 고전을 읽고 쓰는 에세이는 고전의 맥락 속에서 내 삶을 구성하게 되기 때문에 보다 넓고도 깊은 연결성이 생겨난다.

처음에 「벨킨 이야기」는 괴짜들의 엉뚱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작품의 맥락을 알고 나니 지금은 나의 소통하는 글쓰기 입문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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