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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일요대중지성] 나를 원빈지문(玄牝之門)으로 만들어가는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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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면이 작성일22-10-22 09:33 조회4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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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원빈지문(玄牝之門)으로 만들어가는 실험

근본으로 돌아감

제 둘째 아이 이름은 정우입니다. 고요할 정()에 넉넉할 우()자를 씁니다. 마음이 늘 고요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가 작명했습니다. 사실 정우는 제 오랜 화두이기도 합니다. 감정적으로 부침이 심했던 저는 늘 마음의 고요를 바랐고, 그 고요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기도 하며 부단히 애를 써왔습니다. 하지만 고요함이 무엇인지는 숙고해보지 않았습니다. 막연히 마음이 흔들림 없이 평온한 상태를 고요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도덕경 16장에 나오는 고요함에 대한 노자의 해석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마음 비우기를 극진히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만물이 다투어 일어나지만 나는 그것으로써 되돌아감을 본다. ! 만물은 번성하지만 각각 그 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 근본으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하니 이를 일러 천명으로 돌아감이라고 한다. (남회근, 노자타설 상, 부키, 2013, 325)

 

노자는 歸根曰靜(귀근왈정)’, 근본으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고 말합니다. 만물은 일어나고 번성할 때에도 창조되고 변화하면서 사망을 향한 길을 씩씩하게(같은 책, 328)걸어갑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현상은 결국 그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뿌리로 돌아가는 이 순환의 이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감정의 동요가 없이 차분한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만물이 다투어 일어나는 그 동태적 상황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노자의 말처럼 고요함 지키기를 돈독히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모든 유()의 세계가 근본으로 돌아감을 알아야 합니다.

 

만물의 근본

그렇다면 만물의 근본, 근원은 무엇일까요? 도덕경 25장에서는 천지보다 먼저 생겨난 혼돈으로 이루어진 물을 라고 일컫습니다. 또한 도는 천지 운행의 법칙이나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흐름이 도라면 도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다시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형상이 지워지지 않아 분별 되지 않는 무의 상태는 형상을 갖추어 명명되고 구별되는 유의 상태로 이행하고, 이러한 유형의 세계는 다시 무형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러한 변화의 지속성을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경 3장부터 6장에서는 도를 일컬어 만물의 근본(), 천지의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만물의 근원이고 뿌리인 그 도는 풀무나 골짜기 신의 이미지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텅 비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풀무는 텅 비어 있기에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많은 만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골짜기의 신도 비어 있음으로 인해 만물을 생성해냅니다. 도를 골짜기의 신에 비유한 6장은 짧지만 무척 인상 깊습니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러 오묘한 암컷이라 한다. 오묘한 암컷의 문은, 이를 일러 하늘과 땅의 근본이라 한다.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 (같은 책, 205)

 

곡신은 중간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오묘한 생성의 기운이 감추어져”(같은 책, 207) 있습니다. 곡신의 이러한 생성의 기운을 노자는 오묘한 암컷이라 표현했습니다. 이 오묘한 암컷의 문, 원빈지문(元牝之門)은 천지의 근본이 되며, 그 텅 빔 속에서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 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생성됩니다. 이처럼 만물의 근원이 되는 도는 텅 비어 있는 무의 측면과 만물이 생성되는 유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면서, 무와 유의 세계를 순환하는 천지 운행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한계짓는 자만(自滿) 넘어서기

도의 텅 비어 있음을 생각하다 보면 그것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자만이 떠오릅니다. 저는 지산샘이 테라가타의 내용을 언급하시면서 나는 못 해라고 하는 마음도 사실은 자만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자만(自慢)은 스스로 자에 거만할 만을 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순간 스스로 자와 가득할 만(滿)자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나로 가득 차서 새로운 것을 생성할 어떤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는 상태 말입니다.

솔직히 도덕경을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아름다운 말이로되, 나는 못 하겠구나였습니다. 무위에 처하는 성인은 만들어내고도 소유하지 않고, 하고도 뽐내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한껏 고양되었습니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자리를 잡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숙연함마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곧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하고, 뽐내고 싶어 하며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떠올라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고 민망해졌습니다.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위계 사회 대한민국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너의 삶은 인위(人爲)와 유사(有事)를 기반으로 한 것이니 이젠 그만 내려놓으라고 노자가 강요하는 것 같아 왠지 모를 저항감도 올라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경계 짓는 것 자체가 이미 나로 가득 찬 상태, 자만(自滿)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자만의 상태에 머문다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고요함도 도의 순환도 나와는 관계없는 좋은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노자가 던진 말들이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 까닭은 관성대로 사는 삶의 한계를 이미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이질적인 것들이 주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과 결합하지 못하면 익숙하고 비슷한 것들만 덧붙여지는 자기 증식만 이루어질 뿐 어떤 새로운 것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동일한 패턴만 반복되는 삶은 권태롭습니다. 이러한 권태는 허무와 불안을 낳게 되어 마음은 시끄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만물이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고요해질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근본은 텅 비어 있습니다. 실상 라고 여길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번 학기에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유형의 거시세계를 구성하는 원자 단위의 미시세계는 확률로만 설명되는 우연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자와 양자역학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라는 존재가 일시적으로 우연히 형성된 유의 상태이며 때가 되면 다시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원빈지문의 오묘함, 그 도의 작용이 라는 존재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게 할까를 궁리해야합니다.

사실 감이당에 발을 내딛는 순간 라고 여긴 경계를 넘어서는 훈련은 시작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고,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에세이라도 정해진 시간 안에 제출합니다.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공부를 계속합니다. 이런 작은 실천도 로 가득찬 자만을 넘어서는 수련이 아닐까요? 이제 노자가 제시한 방향을 향해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합니다. 도는 내가 가는 길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나를 결합시켜 나만의 원빈지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천지의 근본인 원빈지문은 면면약존(綿綿若存)하고 용지불근(用之不勤)하여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원빈지문이 된다면 나도 면면약존하고 용지불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얼마나 원대하고 위대한 욕망인가요? 노자는 생명에 반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내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덕경 렉쳐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들뢰즈가 언급한 실험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그것은 당신이 그 실험을 도모하는 순간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당신이 도모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287)라고 말합니다. 나 자신을 텅 빔 속에서 무한한 것들을 생산해내는 오묘한 암컷으로 만드는 실험을 도모한 순간 나의 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새로운 개념과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지지고 볶는 갈등을 겪으면서 나의 도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며 멈추지 않고 변화를 시도한다면 언젠가는 용지불근하여 써도 다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는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며 불가피한 실험이다라고. 불가피한 실험이라면,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나를 실험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험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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