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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일요대중지성] 비관주의를 건너는 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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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모긴 작성일22-12-25 12:22 조회3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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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주의를 건너는 힘, 주역

 

"슬픔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슬픔은 인류 전체의 것입니다(Grief is not mine, grief is human)."/크리슈나무르티

 

데이비드 봄의 사상에 관한 다큐멘터리 무한한 잠재력(infinite potential)'에서 물리학자 봄과 사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을 개체로 분별하는 사고체계 밑에, 세상을 통합된 전체로 인식하는 또다른 사고체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단위로 하는 개체로써 나와 외부 세상을 인식하지만, 사실 우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나의 슬픔은 나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의 슬픔이라는 것이죠.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하지만 그런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당장 20여년 안에 지구가 망한다는 예견이 놀랍지 않을만큼 기후위기의 징후가 짙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는 듯이 살아갑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가속화되는 세계화가 무서운 속도로 국가간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각국의 문화를 황폐화하는데도 정치는 더욱더 극으로 치닫고 재벌은 득세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길 한복판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참사에도 우리 사회는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사건의 기억을 함께 지워가고 있습니다. 다른 존재의 슬픔과 연결되기는커녕 당장 나 자신을 집어삼킬 비극에도 무감각한 이런 행태들을 보면서도 과연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하나로 연결돼있고 언젠가는 그 전체성을 깨달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인간은 우주의 안녕과 자연의 회복을 위해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폐해일 뿐 아닐까요?

 

天地設位, 而易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하늘과 땅이 자리를 잡으니, 역이 그 가운데서 행한다. 본성을 끊임없이 이루어가는 것이 도덕성의 시작이다.)/계사상전 제7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에서는 굳이 인간의 역할을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시킵니다. 아마도 역을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겠지요. 하늘은 멀고 추상적인 변화의 원리를 상징하고, 땅은 인간에게 보다 가까운 구체적 사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이에서 그 변화의 이치를 따라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마땅한 본성을 이루는 일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을 끊임없이 이뤄가는 것이 도덕성의 시작이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역에 따라 이뤄가야 하는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면 과연 저를 잠식하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 불식될 수 있을까요?

 

노자는 천지(天地)는 불인(天地不仁)하다고 하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폭력성 만큼이나 자연 역시 때로는 무자비할 정도의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제가 희망하는 것과는 달리, 주위에 대한 고려나 자비가 없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기본(default)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힘이 있는 것이 힘이 약한 것을 제치고,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낮은 곳에 있는 것을 눌러버리는 것,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복잡한 것은 골치아프고 방해되는 건 성가셔하는 기질. 그렇게 선악 구분 없이 오직 힘으로 움직이는, 약자와 강자로 양분된 세계관 내에서의 야생 그대로의 인간이 더 자연에 가까운 것인지 모르죠.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인간을 굳이 천지자연과 구분하여 역할을 나눌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역이 이런 무심하고 순응적인 인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역에서 인간은 자연에 순응이 아닌, '감응'하는 존재입니다. 자연의 원리를 다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그에 감응해서 스스로를 흔드는 울림을 통해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 나아가 우주와의 연결을 체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스스로 변화해가는 힘, 이것이 바로 살아남기라는 생존게임에 치여 멀어져버린 우리의 본성이 아닐까요? 사실은 내가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 하나에도, 무서워 외면하는 누군가의 폭력에도, 잊어버리고 싶은 가슴 아픈 사건에도 우리 마음의 촉수는 여전히 서로 닿아있고, 그 통증은 계속 누적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저의 좌절 역시 이러한 감응의 과정을 믿지 않고, 그저 빠른 해결만을 확인하고 싶은 조급증 때문인지 모릅니다. 융은 주역의 가치가 공시성에 대한 발견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과론에 대비되는 우연의 원리이자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문제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내가 다 알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원인은 우연과 같은 알 수 없는 현상을 낳고, 우리는 그 이유를 쉽고 익숙한 쪽에서 찾게 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천지만물의 범위는 그야말로 미미할텐데, 그 안에서의 인과만을 보는 것이 내 인식의 한계인 것이죠. 빅데이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한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이나 감춰진 우연 같은 직접적인 인과성 밖의 세계를 보는 것은 여전히 요원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성에 대해 함부로 좌절하고 비관하는 것조차 인과성에 갇힌 저의 단편적인 반응일 수 있겠네요. 제가 보는 문제들은 결코 제가 아는 방법만으로 해결될 수 없고, 그에 얽힌 수많은 존재의 카르마가 풀려야 할 일일 테니까요.

 

사실 생각도 힘도 없다는 역(易无思也 无爲也)은 선, 악 어느쪽도 제시하지 않고 그 어느 쪽으로도 인간을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현상이 일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길흉의 잣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죠. 아마 우리 대부분에게 그 길흉 여부는 개인적 관심사에 국한될 겁니다. 반면 길흉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이 인간 개인을 떠나 좀 더 많은 존재들로 향하도록 애쓰는 이가 바로 군자이고 그의 사업이 바로 윤리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항상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 듯 보입니다. 자유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지고의 가치로 여겨지니까요. 하지만 제한받지 않는 무한의 자유는 더 많은 힘을 가진 자에게 유리한 가치일 뿐입니다. 강자의 자유란 결국 약자에 대한 폭압을 기반으로 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의 좁은 관점을 벗어나 타인과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시각,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는 것이 군자이며, 역이 내내 강조하는 '도덕성'의 실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에 그래왔듯 아마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이기적이고 한 치 앞을 못보는 듯 어리석고,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겠지요. 하지만 어떤 기운에 의한 것이든, 주역과 데이비드 봄을 다시 불러오는 현상 자체가 인간의 다른 면이 가진 희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에 불과한 듯 보이는 순간의 점괘가 세상의 무수한 보이지 않는 결을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임을 믿는 것, 그것이 다른 말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겸허한 인정일 수 있을 테니까요. 너무나 생경한 상징의 코드를 내게 익숙한 인과성의 논리를 넘어 이리저리 궁리하며 해석하는 모든 과정이 내가 보는 세계를 넘어서 보려는 절박한 노력일 테니까요.

 

이쯤에서 주역점을 치는 행위는 단지 내 삶의 길흉을 예단하는 기술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역이 보여주는 공시성의 세계, 천지 조응의 순간에 초대되는 일이었고, 세상의 흐름을 밀고나가는 수많은 존재들과 그 기운에 눈뜨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행불행이 그 존재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세상 누군가의 슬픔 역시 결코 그의 몫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도도한 삶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리라는 나지막한 위로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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