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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일요대중지성 4학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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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라드8 작성일22-12-25 20:40 조회4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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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신으로 본 몸과 마음의 사용

 

往者屈也 來者信也 (왕자굴야 래자신야) 屈信相感而利生焉 (굴신상감이리생언)지나간 과거는 구부러져 있고 다가올 미래는 펼쳐져 있으니, 구부러짐과 펼침이 서로 감응하여 이 세상의 이로움이 생겨난다. 자벌레는 몸을 펴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뱀과 용이 겨울잠을 자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접는 것은 즉 나아감을 위한 준비, 활동을 위한 쉼이라 말할 수 있다. 펼치는 것은 나아감이고 들어냄이다. 도올 선생은 굴신을 자벌레에 비유한 것이 절묘하다 했다. 접었다 피는 것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은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것이 아닌 인간의 신체로 굴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더 직관적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몸과 삶의 굴신을 찾아보려 한다.

 

신체의 나아감

굴신이 단순히 접었다 펴는 것이 아닌 나아감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에서 나아가도록 꺾이는 곳은 무릎이다. 많은 관절이 있지만 육신을 이동하기 위해서 주되게 움직이는 것은 무릎이다. (무릎 슬)이라는 글자 자체가 =(육달월)몸을 나타내는 글자와 ()꺾인다는 뜻을 지닌 한자가 결합 되 만들어진 말로 몸이 꺾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무릎을 접었다 펴는 것으로 인간은 움직일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운동에서는 수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목은 무릎을 잘 구부리는 사람이 잘한다.’는 말이 있다. 축구와 같이 달리는 운동은 무릎을 구부리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탁구나 배드민턴 같은 종목 역시 손으로 하는 것 같지만 아래서 발이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종목이다. 손만 뻗는 것보다 그 위치에 몸 전체가 가는 게 공간을 차지하고 행동을 성공시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무릎을 이용해야 한다. 이때 무릎을 적당히 굽히고 있어야 다음 동작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너무 많이 굽히거나 너무 펴고 있으면 상황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신체를 너무 펴거나 접어서, 정지된 예를 두 가지 들어보려 한다. 축구에서 공격이 공을 가지고 드리블할 때 수비가 다리를 뻗어 막는다. 하지만 수비수의 다리가 다 뻗었을 때를 기다린 공격수는 수비수를 쉽게 제친다. 무릎을 다 펴서 다리를 뻗은 수비수는 일순간 정지상태가 된다. 그러면 다음 동작은 연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격수를 쫓아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무릎을 약간 구부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공격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동작을 바꾸기 수월하다. 그래서 정지된 수비를 쉽게 따돌릴 수 있다. 수비가 다리를 다 뻗지 않고 구부린 상태를 유지하며, 상대의 움직임을 쫓아 따라갔다면, 공격은 쉽게 수비를 제치지 못하고 체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상대가 지친 후 다리를 뻗었다면 반드시 공을 빼앗아 낼 수 있다. 두 번째는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내가 맞은 반에는 항상 소화가 안 되고 컨디션이 안 좋은 아이가 있었다. 그날도 전처럼 몸이 안 좋고 소화가 안 된다고 말해 믿을만한 한의원에 데리고 갔다. 그전에도 병원은 수없이 갔는데 약 처방 말고는 특별한 게 없어서 한의원으로 향했다. 한의사 선생님은 학생을 진찰하시더니, 몸에 큰 이상은 없고 타고나길 튼튼한 몸이라 했다. 다만 몸을 웅크리고 있어서 몸속 장기가 눌려 기능이 제대로 하지 못해 아픈 것이었다. 침도 놔주시고 약도 지어주셨지만 가장 중요한 처방은 몸을 펴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평소 몸을 구부정하게 있고 움직이기도 싫어했던 그 아이는 마음에 아픈 곳이 있었다. 우울함과 자신감 없음이 몸을 접고 있는 자세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장기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 것이다.

 

위에 두 상황은 너무 많이 폈을 때와 너무 구부리고 있을 때를 보여준다. 너무 다리를 많이 편 사람은 정지되었고, 몸을 너무 접고 있었던 사람은 몸의 기능이 떨어졌다. 접는 것과 펴는 것은 각각 단절된 형태가 아닌 연결된 연속동작일 때 의미가 있다. 어느 극단으로 가서 단절된 상태가 되면, 정지되고 이는 이로움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접는 행위와 펴는 행위는 서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陽卦多陰 陰卦多陽(양괘다음, 음괘다양)’처럼 서로를 지니고 있는 것, 즉 접는 것은 펴는 것을 위해 이루어지고, 펴는 것은 접기 위해 이루어진다는 것과 같다. 그런 속에서 서로 번갈아 가는 연속을 만드는 것이 함이고,屈信相感而利生焉(굴신상감이리생언)’말하는 이로움일 것이다. 나아감이란 물리적 위치 이동뿐 아니라 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에 구부린 것이면서도 뻗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상황에 따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가 된다.

 

정신의 나아감

이런 자세는 신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往者屈也 來者信也(왕자굴야 래자신야)’처럼 구부리고만 있는 것은 과거에 묶여있는 것이 된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며 후회하고 한탄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미련을 버리지 못함이다. 또한 미래만 바라보고 뒤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은 준비되지 않는 무모한 시도 속에 실패를 반복하기 쉽다. 그렇기에 과거를 본다는 것은 미래를 향함이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과거를 돌아봄이다. 그 연결점인 현재는 온전한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가 섞여 있는 것이다. 흔하게 하는 현재를 살아라.’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과거에 묶여 현재를 살지 못한다. 과거에 흉했던 일로 인해, 한숨과 자책을 연속했고, 그것을 원인 삼아 미래를 걱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공황장애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극한의 접힘 상태이다. 펴기 위한 접힘이 아닌 나아가기 두려워 접음이다. 약을 먹고 치료를 마친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과거에 자신을 묶어놓고 살고 있다. 이렇게 접혀서 정지되어있는 속에도 굴신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몸과 마음을 펴는 순간들이다.

첫째는 가족의 공감과 수용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집으로 항상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과 마주하게 된다. 가족이란 단어가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이 떠오르게 한다면 식구나 친구, 동료로 말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내 몸을 최종적으로 속하는 곳에 함께하는 이들에게 공감과 수용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나아갈 힘을 제공한다. 예로 베트남 전쟁 당시 마약에 중독되어있던 미군 중 95%는 마약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 후에 돌아갈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공감받은 미군들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공부 또는 수행이다. 1학기 정군 선생님 말씀 중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은 배운 것을 실천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나올 때까지 계속 배운다.’는 것이었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습관을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습관으로 덮는 것은 가능하다.’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며 몸에 익은 습관이 아닌 다른 형태로 살려면, 다른 습관이 생겨야 한다. 하지만 충분히 학습하지 않고 본 즉시 당장 한다는 것은 자기 몸에 배어있는 습관의 힘을 우습게 본 것이다. 기존의 습관은 한번 본 것을 당장 실현하게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장 실현하려 하는 것보다. 습관이 될 때까지 꾸준히 배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배움을 이어 나간다는 것은 지지난 과정이지만 반복이 필요하고 연속성이 필요하다. 단순한 뽐내기 위한 지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꾸준히 학습하는 것은 수행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수행이란 말을 들으면 대부분은 108, 명상, 고행 등과 같은 방식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공부하며 그것을 수행 삼아 살아간다. 2022년 일성에서 만난 많은 분이 배움이라는 수행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두 번째 굴신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이동하는 데 주로 사용하던 관절이 다른 곳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바로 팔과 손에 있는 관절들이다. 다른 동물에게는 앞발인 것을 인간은 팔과 손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사용한다. 특히 ()재주, 수단, 방법을 뜻한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손의 사용이다. 그리고 손이 된 앞발은 무릎과는 다른 굴신으로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배움이다. 움직이지 않고, 부딪쳐 경험하지 않고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배움은 상당히 좋은 현재를 살아가는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사전을 읽는 내내 중요한 것은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천지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적절하게 무릎과 손을 다 사용해야 할 것이다. 책에 빠져있는 이들은 몸을 일으켜 움직이고, 움직임만 하던 이들은 책을 들고 글을 쓰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몸을 단련한다 할 때 심신을 단련한다.’ 했나보다.

 

乾以易知 坤以簡能(건이이지 곤이간능)

하지만 이 둘의 조화를 이루지 못함은 어려워서가 아니라 습관에 길들여 살기 때문이다. 배운 대로 사는 것이 아닌 습관대로 사는 것이다. 乾以易知 坤以簡能(건이이지 곤이간능)천지의 뜻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닌 내가 가진 습을 이기지 못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습은 과거의 경험이지 미래의 이야기는 아니다. 습에 묶여있다는 것은 나아가지 못함이고 정지됨이다. 정지된 상태에서는 음과 양이 번갈아 가는 천지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로운 습을 만들어가며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모두 배움을 통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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