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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대중지성]사랑하는 가족들과 있는데 왜 괴로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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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강 작성일23-01-04 15:44 조회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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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4학기에세이/레프톨스토이/안나카레니나/박지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있는데 왜 괴로운 걸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톨스토이,안나카레니나1,문학동네,p11)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이 첫 문장에 대해 독자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멀리서 보면 대부분의 가정은 행복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각 가정마다 걱정과 고민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특히 안나와 돌리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냥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사는 듯한 안나와 돌리는 각자의 이유로 불행을 경험하게 되는데 둘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돌리는 가정을 지켜내는 길을 가고 안나는 가정을 떠나는 길을 간다. 나는 안나와 돌리를 통해 여성의 사랑과 불행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 또한 가정 안에서 불행감을 느낀 사건이 있었고 그때 왜 힘들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작년 초 코로나 사태로 남편과 딸, 그리고 주부인 나, 이렇게 우리 가족은 24시간 내내 붙어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애썼다. 재택근무하는 남편과 원격수업을 하는 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도 열심히 해가며 지냈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잔소리와 딸의 짜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외출도 못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일에 숨이 막혀왔다. 나의 몸은 무기력해져 갔고 아침에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서는 신경계 리듬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게 지내다 코로나 상황은 점차 회복이 되었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남편은 회사로 출근했다. 그 후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고 나의 몸은 순조롭게 회복이 되었다.

이 일을 작년 수성 에세이에 적었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 가족들에게 과도한 에너지를 써서 아팠으니 나의 병의 원인은 인정욕망에 있었다는 글이었다. 그러나 에세이 발표 날, 코멘트해 주신 오창희 선생님께서는 그 사건의 원인을 인정 욕망이라고 떠넘기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고민해 보려 한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있을 때 왜 그렇게 괴로웠던 것일까?’

 

 

돌리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불행, ‘생기

 

 

돌리는 정략결혼이었지만 지금도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 오블론스키는 누구나 매력을 느낄만한 친절하고 유쾌한 남성이다. 그런데 그는 자꾸 여자 문제를 일으켜 돌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돌리는 이 문제를 지난번처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남편은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바람이 났다. 돌리는 자신이 사는 집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오블론스키의 여동생 안나는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돌리의 집을 방문한다. 안나와의 대화를 살펴보면 돌리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야 그 여잔 젊고 예뻐요.” 그녀는 계속했다. “반면에 아시겠어요? 안나, 내 몸은 젊음도 아름다움도 이제는 다 빼앗기고 말았어요. 누구 때문이겠어요? 그이하고 그이의 아이들 때문이지요”.(안나카레니나1,,p142)

 

 

돌리는 더 이상 남편에게 성적 매력이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7번의 출산과 5명의 아이 양육으로 생기를 잃었으며 늙어가고 있다.(나중에 돌리는 한번 더 출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돌리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이렇게 죽어 가는데 남편은 생기를 전혀 잃지않았다는 사실이다. 돌리는 이제 자신의 육체가 매력을 잃었다는 것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런 돌리에게 안나는 가정에서 그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빠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이 그녀를 신성하고 거룩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전해준다. 돌리는 안나의 말을 듣고 남편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녀는 집을 떠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돌리는 안나가 오기 전부터 집을 나가버리려고 짐을 쌌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그녀는 이미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리며 사는 타성에 의존되어 있었으며 5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아이들은 자주 아팠다. 또 두 명의 아이를 잃은 가슴 아픈 경험을 하기도 했다. 돌리가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안나의 사탕발림 같은 말에 인정욕망이 충족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옴짝 달짝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돌리는 온종일 살림과 육아에 매어있어야만 했고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 또한 인정 욕망 때문에 집에서 노동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가족이 집에 있으면 그들을 돌봐야 할 의무 안에 갇혀 있게 된다. 코로나 격리 때 살림과 육아에 매어있어야 했던 것은 주부이고 어머니인 내게 주어진 당연한 책임이었다. 집안일은 가족들한테 인정을 받건 못 받건 간에 내가 해야 할 노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종일 집안일에 매어있게 되면 나는 생기를 잃을 뿐 아니라 병까지 나게 된다.

 

 

안나의 생기, 새로운 세계를 충동하다

 

 

안나는 모두가 존경하는 상류층 고위 관료의 부인이다사랑 전문가 바람둥이 오블론스키는 안나의 불행에 대해 정확히 진단해 준다. 너는 말이야, 너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사람한테로 시집을 온 거야 너는 사랑이 없이 혹은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시집을 와 버린 거야.”(안나카레니나3,p374)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안나보다 나이가 많았을 뿐 아니라 매우 이성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나는 자신의 생기가 억눌린 상태로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돌리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행 기차를 타고 온 안나는 기차역에서 젊은 청년 브론스키를 우연히 만난다. 브론스키는 안나를 보자마자 그녀의 억눌린 생기를 알아챈다. 당시 브론스키는 18살에 귀엽고 예쁜 키티와 연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를 만나고부터는 무도회장에서 키티에게 춤 신청하는 것도 잊을 만큼 그녀에게 빠져버린다. 안나는 남편이 없는 장소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자신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사실 안나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성적 매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억눌린 생기는 성적 욕망이었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자기도 키발을 하고 병실 안을 걷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고 국회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는 부분을 읽을 때면 자기도 연설을 하고 싶어졌다. 또 레이디 메리가 말을 타고 짐승의 떼를 쫓겨나 면리를 빈정거리기도 하면서 그 대담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자기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조그마한 손으로 반들반들한 페이퍼 나이프를 만지작거리면서 책을 읽으려고 애썼다(안나카레니나1,p202)

 

 

무도회장에서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사랑의 눈빛을 교환한 것은 안나에게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그동안 억눌렸던 쾌감을 즐긴 안나는 감각에 매우 예민해진 상태가 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공간 안에서 어떤 소리와 진동, 온도, 사람들의 모습들 때문에 매우 산만해진다. 그 자극의 산만함을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안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처럼 무엇이든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진짜로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으므로 소설의 세계 속에서 안전하게 공상 하려 애쓴다.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허구의 세계에서 해소하려는 것이다.

목적지 중간에 서는 기차 정거장에서 그녀는 바람을 쐬려 기차 밖으로 나간다. 잠깐 숨을 내쉬고 다시 들어가려고 할 때 어떤 사내가 다가온 것을 느끼고 안나는 뒤를 돌아본다. 브론스키다! 브론스키는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안나를 따라왔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나는 브론스키의 고백으로 새로운 사랑에 뛰어들게 된다. 안나의 충동적 사랑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에게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는 안나처럼 성욕 때문이 아니라도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충동을 자주 느낀다. 학창 시절에는 영화와 소설을 보면서 현실과 다른 허구 세계의 감각을 즐겼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저축해서 모은 돈으로 혼자 여행을 다니며 탐험가가 된 듯 이국적인 감각을 즐겼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새로운 세계의 감각을 즐기고 싶어 한다. 물론 나에겐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이 있으므로 그런 동경을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일상과 다른 감각을 느끼고 싶어 하는 내 욕구는 억누르고 참는 것일 뿐 마음 한 곳에 늘 자리 잡고 있다. 솔직히 나는 남편과 아이를 사랑하지만 혼자만의 여행이 가고 싶다. 그리고 영화나 책, 그림 같은 허구의 세계에 충동적으로 빠져들어 몰입할 때 생기가 도는 나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 땐 살림과 육아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

 

 

안나의 쾌락 vs 죄책감

 

 

한편 그는 살인자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시체를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의해서 목숨을 빼앗긴 이 시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었고 그들 사랑의 첫 단계였다.(안나카레니나1,p296)

 

 

둘의 정사 장면에서 브론스키가 안나의 살인자이며 안나는 살해당한 시체라고 표현된다. 안나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브론스키를 만났다. 그러나 안나는 정사 후에 행복감도 있었지만 자기가 저지른 일,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를 때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는 신체를 갖고 있기에 정사의 쾌락을 온전히 즐기기 힘들다. 또 안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쾌락을 느끼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출산 과정에서 산욕열로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때 안나는 카레닌에게 내 안에는 다른 여자가 도사리고 있어요.(중략)여보, 날 정말 용서해 줘요. 깨끗이 용서해 줘요! 나는 끔찍한 여자에요(안나카레니나2,p346)라고 말한다. 안나를 시체로 표현한 정사 장면은 그녀의 불행을 예고해 주는 듯하다.

이상하게도 행복할 것만 같은 안나에게 자꾸 죽음이 따라다닌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기차에 치인 선로지기의 죽음이 있었다. 안나의 임신 소식 후에는 브론스키가 말을 타고 경주를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말과 움직임을 같이 하지 않고 빨리 안장에 내려와 버리는 실수를 한다. 등뼈가 부러진 브론스키의 말은 사살될 운명에 놓인다. 사살될 말과 안나의 미래가 묘하게 겹쳐진다. 또 둘은 같이 프랑스어로 중얼거리는 무서운 농부의 꿈을 꾼다. 안나는 이 꿈의 불길함을 느끼며 브론스키에게 말한다. “나는 죽을 거예요. 죽어서 나와 당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뻐요.(안나카레니나2,p247)

안나에게 왜 죽음이 따라다니는 걸까? 안나의 외도가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그녀는 러시아 사교계에서 나쁜 여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리고 안나의 남편 카레닌에게는 고위 관료의 아내라는 신분을 빼앗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남편은 그녀와 아들을 이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권리를 가진 남편은 안나를 자꾸 두렵게 만든다. 심지어 안나 자신조차 심리적으로 나쁜 어머니, 나쁜 아내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나는 쾌락을 즐기기 전보다 더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쾌락을 즐기려면 사회적 위치의 추락을 견뎌야 하고 아들과 헤어져야 하며 도덕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 그녀는 심한 내적 갈등으로 쾌락도 괴로움도 없는 죽음의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결혼 전에는 내가 일상과 다른 새로운 감각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부터 나의 쾌락은 죄책감을 동반한다.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내게 끌리는 공부나 취미 생활을 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또 내가 딸에게 외동이라는 외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니 더 관심 갖고 애정을 쏟아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자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코로나 격리 때는 평소의 생활과 다르게 살림과 육아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보려 했으나 생기를 억누른 노동은 나를 병들게 했다. 나만의 쾌락을 즐길 때는 내가 도덕적으로 좋은 여성이 아닌 것만 같아 괴롭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억누르고 가족들을 위해서 온종일 노동할 때 나는 병자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태어나지 않은 자식에게 죄책감을 느끼는가

 

 

안나는 딸 출산 이후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난다. 그 후 죽음까지 극복한 안나의 성욕은 러시아 사회가 감당할 만한 선을 넘어버린다. 안나는 카레닌과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집을 떠나 브론스키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런 행동은 브론스키와 살면서 얻은 자식들에게 카레닌의 성을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브론스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안나는 아들 세료쥐아와의 관계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것을 고집한다.

안나의 새로운 가정에 돌리가 방문한다. 돌리는 안나의 외도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나에게 이혼을 권해달라는 브론스키의 청에 돌리도 이혼을 권한다. 돌리 또한 지금의 딸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브론스키의 성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리가 만난 안나는 예전의 안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않으면 그 아이들은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만일 그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게 되는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안나는 불행할 자신의 아이들을 낳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돌리는 그 생각이 너무 기괴하게 여겨졌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자에 대해 어떻게 죄책감을 느낀다는 걸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라쉬아에 대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안나카레니나3,p177)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돌리는 가정에서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임신과 출산까지 거부하는 안나에게 장벽을 느낀다.

안나의 임신거부에는 모성보다 더 큰 욕구가 있는 여성의 괴로움이 담겨 있다. 안나는 모성이 없는 여성은 아니다.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아들 세료쥐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지금도 아들의 어머니 자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다만 그녀는 보통의 여성보다 강한 성욕과 빛나는 성적 매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브론스키를 만난 후에는 모성보다는 육체적 사랑에 이끌린 삶을 살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성적 욕구가 매우 큰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성인 ADHD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충동적으로 어떤 것에 몰입하는 것은 ADHD 증상 때문이었다. 나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공부할 때 생기가 도는 신체를 타고났던 것이다. 남편은 내가 살림할 때 일의 효율성을 떠나 기분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해나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기존과는 다른 방법으로 일의 과정을 만들어서 새로운 감각을 느껴야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딸은 엄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짜증을 낸다. 하지만 나는 집이라는 지루한 공간에서 그것도 가만히 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 집중을 하기 어렵다. 나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은 나의 신체성 때문이었다. 나는 도덕성이나 모성이 부족하다기 보다 새로운 감각을 느껴야만 산만한 정신을 집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 진단을 받고 우울하기도 했다.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는 주부나 엄마로서 자격이 없는 신체를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딸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하는 딸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전제를 품은 생각이었다. 독립적인 하나의 고귀한 생명체를 마치 나의 소유물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모성을 떠나서 어른이 어린 생명에게 가져서는 안되는 죄스러운 태도였다. 또 결혼에 대한 후회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방관하려는 오만한 공상 이기도 했다. 나는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쁜 여성’ ‘좋은 여성’, 그게 뭐 중요한가

 

 

안나가 죽음 충동을 느끼고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은 성적 욕구를 충족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성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나는 쾌락이 너무 중요한 신체에요라고 외친들 누가 이해해 주겠는가! 자신의 외도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21세기 여성이다. 좋은 여성, 나쁜 여성이라는 도덕적 잣대를 떠나 솔직히 나의 상태를 얘기하면 이해받을 수 있는 조건에 속에 놓여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느껴야만 집중할 수 있는 나의 신체 상황을 전달하자.

특히 집에 있을 때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므로 가족들에게 잘 설명해야 한다. 남편에게 복잡한 과정의 큰일은 나를 너무 산만하게 만들어서 끝까지 해내기가 쉽지 않다고 전하자. 나는 기분이 좋아지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전체적으로 큰일을 끝마칠 수 있다고 알려 주어야 한다. 딸의 이야기를 놓칠 땐 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못 알아들은 것을 인정하고 다시 물어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겸허한 자세로 내 상태를 설명한다면 대부분 이해해줄 것이다. 작은 자극에도 충동적으로 딴 길로 새서 산만한 행동을 보이는 나는 나쁜 아내이고 나쁜 엄마인가? 내가 나쁜 여성인지 좋은 여성인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가정에서도 가정 밖에서 소통하는 자가 된다면 좋은 여성이라는 인정 없이도 죄책감 안 느끼고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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