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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無我를 善護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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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웅 작성일19-01-31 11:47 조회2,53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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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我를 善護念하라!


금요지성 이기웅


불교와 주역을 횡단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글쓰기가 젬병이 인 나로서는 마지막학기의 에세이가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4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매일 새벽 수행시간에 금강경을 암송하며 그 뜻을 새기고, 짬짬이 틈나는 시간에는 여덟 괘의 괘효사와 단상사를 암송하며 의미를 새겼지만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궁리 끝에 나는 금강경의 근저에 흐르는 몇 가지의 요지를 정리하고, 마찬가지로 주역에서도 나름대로 이해한 요지를 정리하여 불교와 주역이 상통(相通)하는 사상은 무엇인지를 찾아서 연결해보고, 내 삶의 체험을 통하여 괘사와 효사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에세이를 쓰기로 하였다. 

불교와 주역의 통의(通義)?

금강경의 요의(了義)중 첫째는 상(相)의 타파를 통한 깨달음이다. 이는 금강경에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시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면 궁극에는 내가 없다고 한다(究境無我) 그렇다면 무아(無我)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모든 번뇌의 시작은 나라는 것 내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내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부터 분별심이 생기고, 그 분별하는 마음으로 인해 타자와 갈등이 생기며, 그 갈등으로 인해 괴로움이라는 온갖 번뇌가 일어나는 것 같다. 
  
두 번째는 끝임 없는 마음 챙김이다. 수보리가 부처께 법을 청할 때 선연기청분에 나오는 선호념(善護念)이 마음 챙김이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들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번뇌를 일으키고 습(習)으로 자란다. 그러므로 불법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信心不逆)을 가지고 생멸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살펴야 탐욕에 물들지 않고 궁극에 가서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부처는 단지 안내자일 뿐 불법은 중생 스스로가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께서는 성도(成道)후 49년을 열반에 드시기 직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중생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럼에도 설한 법이 하나도 없다고 하신다. 오히려 부처께서 법을 설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부처께서 금강경을 설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부처께서 설했다고 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금강경을 부처께서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금강경을 폄하하는 것이 되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부처께서 법을 설한 적이 없다는 참된 의미는 깨달음은 외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자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설법은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 같이 중생의 깨달음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할 뿐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 스스로가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일체동관(一切同觀)의 세계관이다. 자타일체(自他一切)를 하나로 보는 세계관은 ‘타자(他者)를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다’는 사고와 연결시켜준다. 상구보리와 자리이타(上求菩提 自利利他)사상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도 중생을 제도했다는 상을 갖지 않는다. 보살은 내가 지은 복에 탐착하지 않으므로 그 지은 모든 복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자신은 복을 받지 않는다(不受不貪)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하게 내게 다가왔다. 게다가 어설픈 이타행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므로 절제된 지혜가 필요하다. 자연에서 자생하는 도라지나 산삼은 백년을 넘게 살 수 있지만, 사람의 보호를 받는 인삼이나 도라지는 고작 6~7년 밖에 살지 못하듯이 상대의 입장을 숙고하지 않은 자의적인 도움은 자생력을 감퇴시켜 오히려 상대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금강경의 요의를 내 나름 정리해 놓고 보니 몇 가지 점에서 주역과 그 의미가 상통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첫째는 천지자연의 이치다. 하늘은 우레로써 만물을 깨우고, 비를 뿌려 만물을 윤택하게 하며, 따스한 햇살로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땅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하는 일체의 분별심없이 대지의 넓은 가슴으로 만물을 품어 길러낸다. 그런 까닭에 만물도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순환하는 천지자연에 리듬을 맞춰 삶을 순환시킨다. 이렇게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마음이 텅 빈 마음이며 자연의 이치이고, 그런 이치를 본받은 것이 성인의 도(聖人之道)가 아닐까? 
 
두 번째는 끊임없이 내면을 경계하는 마음이다. 어려울 때는 물론이고 만사가 뜻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될 때 특히 더욱 어려워하고(艱), 두려워하며(厲), 조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其亡其亡) 이것은 탐진치 삼독이 스며들어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을 경계하여 항상 깨어있으라는 선호념과 그 의미가 상통된다. 나는 작년 5월초에 문경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후 새벽수행을 시작했다. 처음엔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쓱 일어나 버리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는 법륜스님의 법문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와 정말 단 한번 거르지 않고 수행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늦은 밤까지의 과음으로 한두 번 수행을 걸렀더니 나중에는 기상시간에 온갖 궁상을 떠는 번뇌에 헤매고 있는 나를 보았다. 안락함을 누리려는 욕망은 잠깐의 느슨해진 틈새를 비집고 슬며시 스며들어 번뇌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남회근 선생이 금강경에서 선호념을 설명하면서 예를 든 “불법을 배운지 1년이면 부처가 눈앞에 있고, 2년이면 대웅전에 있으며, 3년이면 서천에 있다”는 속담이 내 마음을 공명시켰다. '초발심시 변정각'의 의미가 새롭다.
  
세 번째는 성인의 도(聖人之道)와 군자의 도(君子之道)에 대한 사상이다. 이는 천지자연이 텅 빈 마음으로 만물을 길러내듯이 이런 천지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성인(聖人)은 현자(賢者)인 군자(君子)를 길러 만민에게까지 그 은택이 미치도록 하려는 마음이다. ‘베푸는 것이 덕을 쌓는 것이며, 덕을 쌓는 것이 천명을 따르는 것이고, 천명을 따르는 것이 나를 편안케 하여 결국 내가 이롭게 된다.’는 사상으로 불교의 일체를 하나로 보는 상구보리 자리이타(上求菩提, 自利利他)사상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 
  네 번째는 종즉유시(終卽有始)의 세계관이다. 이는 끝나면 다시 시작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나선형 시간관이다. 나는 이 말을 ‘나를 죽여야 생사를 넘어선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은 선(善)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엔 탐욕과 게으름 그리고 시기와 질투심 같은 불선(不善)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며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불선이라는 습기에 길들여진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혼이 자유롭고 온전한 자기 삶을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무망(无妄)
  
천뢰무망괘의 무망(无妄)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망령됨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망령됨이란 또 무슨 의미일까? ‘망령되다’의 사전적 풀이는 ‘이치에 맞지 않고 허황되거나 주책이 없다’라고 한다. 이치에 맞지 않고 허황되다는 말은 인위적이면서 불순한 의도로 조작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그렇다면 ‘망령됨이 없다’라는 말은  불순한 의도나 작의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망이란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내는 마음이 무망 아닐까? 부처님은 한량없는 보시를 했어도, 무량한 중생을 구제했더라도 보시를 했다는 생각이나 중생을 구제했다는 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요 보살행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까이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속한 사회와 국가 및 인류를 위하여 이로운 일을 하고서도 이로운 일을 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무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내가 오래된 과거 경험 하나가 생각났다. 나는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면 밥을 잘 사는 편이다. 처음에는 내가 여러 번 밥을 샀으니 상대도 한 번쯤은 밥을 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그 기대를 져 버릴 때 분별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밥을 샀다는 마음을 잊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밥값 한번 내지 않는 상대가 의례히 내가 밥을 사는 줄 알고 밥값을 나보고 내라고 요구하자 불쾌한 마음이 다시 올라왔다. 이런 분별하는 마음이 나는 불편하고 싫었다. 고까짓 거 밥 몇 차례 산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쪼~잔하게! 때마침 매일같이 새벽수행을 할 때 암송하는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께서는 덕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려라”하셨느니라. 무심(無心)의 이타(利他)행이라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진실무망(眞實无妄)이다.
  
무망은 크게 형통하고 무망의 올바름을 지키면 이롭지만, 삿된 의도를 가지고 행하면 재앙이 있을 뿐 이로울 바 없다(元亨利貞 其匪正 有省 不利有攸往) 여기서 형(亨)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亨이란 한자는 ○□△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는 하늘을 □는 땅을 △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亨은 하늘의 뜻을 섬기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 있다. 말하자면 亨이란 ‘하늘의 뜻에 통하고, 땅의 이로움을 취하여 사람들과는 조화를 이루어 형통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형통하다는 말은 천지자연의 도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亨을 넘어 원형(元亨)의 무망은 자연의 순리이자 도라 할만하다. 따라서 무망의 자세로 나아가면 길하다(初九 无妄 往吉) 무위의 무망이니 경작하지 않아도 수확할 수 있고, 묵히지 않아도 오래 묵은 밭처럼 옥토가 되며, 無心으로 나아가니 이롭다(六二 不耕穫 不菑畬 則利有攸往) 무심의 행은 분별없는 바른 행이니 허물이 없으며(九四. 可貞, 无咎) 이미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진실무망인데, 혹 무슨 질병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망령됨이다. 망령된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병은 저절로 나아 기쁘지 않겠는가?(九五 无妄之疾 勿藥 有喜) 그러나 무망에서 더 나아가려함은 삿된 욕망이다. 하늘의 재앙이 따르고, 인재(人災)가 있을 뿐이다(六三 无妄之災 或繫之牛 行人之得 邑人之災. 上九 無亡行 有眚 無有利)

참다운 대축(大畜)은 선호념이다
 
크게 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재물을 쌓는 다는 의미일까? 덕을 쌓는다는 의미일까? 둘 다 맞는 말일 것이다. 재물을 쌓는 다는 의미는 누구나 쉽게 이해가 되지만 덕이란 무슨 뜻일까? 〈설문해자〉에 따르면 ‘밖에서 사람이 바람직하고 안에서 나에게 얻어진 것’이라 하며 덧붙이길 ‘덕은 인간이 스스로의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고 그것이 다시 실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덕이 밖에서 바람직한 것이 안에서 길러진 것이라면,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자라나게 된다면 덕을 쌓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내면에 삿된 마음이 자라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마음 챙김을 해야 한다.’로 이해된다. 정리하면 덕을 쌓는 것은 밖으론 성현들의 많은 언행들을 본보기 삼아 바람직한 것을 기르고, 안으로는 선호념으로 탐·진·치를 다스리고 없애야 덕을 쌓는 것이며, 나아가 세상을 위해 펼쳐져야 비로소 그 덕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축의 시대에 큰 덕을 쌓으려는 자가 집에서 밥을 먹으며 어찌 한가로이 쉬고 있을 수 있겠는가?(利貞 不家食 吉 利涉大川) 끊임없이 내면을 살피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삿된 욕망을 그치고 다스려야 한다(初九 有厲 利已, 九二 輿說輹) 또한 탐·진·치 삼독은 초기부터 근본을 다스려 제거하고(六四 童牛之梏 元吉. 六五 豶豕之牙 吉) 바람직한 선은 더욱 증진시켜 나가야(六三 良馬逐 利艱貞 日閑輿衛 利有攸往) 비로소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이 되어 형통하게 된다(上九 何天之衢 亨)

이(頤)는 삼가고 절제하는 선호념이다
  
서괘전에서 쌓은 연후에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이(頤)괘는 위에 그침을 뜻하는 간艮괘가 아래에는 움직임을 뜻하는 진(震)괘가 자리하여 산뢰이(山雷頤)가 되었다. 괘상을 보면 초구와 상구는 양(陽)효로 아래턱과 위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운데 2,3,4,5효는 모두 음으로 입안에 든 음식물을 상징한다. 위턱은 간(艮)괘로 그쳐있고, 아래턱은 진(震)괘로 움직여 입안에 든 음식물을 소화시켜 몸을 배양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래턱은 스스로 배양할 수 있는 자이고, 위턱은 가운데 네 개의 음들을 위에서 굽어보며 기르는 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르고 길러져야 바른 길음일까? 입은 음식을 소화시켜 몸을 기르기도 하지만, 언어를 밖으로 내보내 타인들과 소통하고 그 언어를 통하여 타인을 배양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바르게 기르는 것은 삼가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愼言語 節飮食) 스스로 기를 수 있는 자는 부처도 단지 안내자일 뿐이니 의타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기르는데 힘쓰고(初九 舍爾靈龜 觀我朶頤 凶) 타자를 기르는 자는 자기의 언행이 타자에 미치는 영향이 막중하니 선호념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길러야 큰 내를 건널 수 있다(上九 由頤 厲 吉 利涉大川) 길러지는 자는 절제하는 마음으로 과도하게 탐하려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六二 拂顚 于丘 頤 征凶, 六三 拂頤 征凶 十年勿用 無攸利) 지위가 있으면서 길러지는 자는 아래 현인을 찾는 데 범의 눈으로 노려보듯이 집중하여 꾸준한 노력과 포용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六四 顚頤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험난함의 탈출은 신심불역(信心不逆)과 선호념(善護念)으로
 
대과(大過)부터 감坎괘와 리離괘까지 마지막 세 괘는 지나쳐서 험난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괘들인 것 같다. 먼저 대과괘는 가운데 있는 네 개의 양(陽)이 과도하게 지나친 모습이고 초효와 상효가 음(陰)으로 본말(本末)이 약(弱)한 형상이다. 그리고 손(巽)괘인 나무가 태兌괘인 연못에 잠겨있어 아주 험난한 상황이다. 이런 대과의 시기에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를 띠풀에 빗대어 강조한다(初六 藉用白茅 無咎)  띠풀은 어렸을 때 춘궁기에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뽑아먹던 속은 하얗고 부드러우며, 맛은 달짝지근한 풀로 들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일명 삐비풀을 말한다. 옛날에 중국에서는 이 띠풀로 지붕을 엮어 비바람을 막았고, 강신주를 만들 때 술을 거르는 재료로 사용한 것 같다. 그래서 공자는 계사전에서 띠풀의 물건 됨은 하잘 것 없어도 그 쓰임은 중대하니 삼가고 신중하게 행하면 과실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과의 시기에는 천지의 도에 대한 확고한 신념信念으로 희생도 두려워 말고 신중히 그리고 과감히 실행하라고 강조한다(六五 過涉滅頂 凶 無咎.  象曰 獨立不懼 遯世無悶)
  
물과 불은 둘 다 양면성(兩面性)을 띄고 있다. 물은 만물을 생장시켜주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하늘의 은택이다. 물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만물의 형체에 맞춰 어우러지니 최고의 선(善)이라고 노자는 말하지만, 지나치면 대과괘처럼 만물을 수장시키는 험난함에 빠지게 한다. 중수감괘는 거듭된 험난함을 의미한다. 이 험난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천도에 대한 거스르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천도에 순응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행하라 한다(習坎 有孚 維心亨 行有尙) 또 ‘습(習)’은 깃털이 하얀 아직 어린 새가 반복해서 날개 짓을 하는 모습이다. 이는 부단한 연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덕행을 항구하게 위해서는 타자를 가르치고 가르쳐서, 타자와 함께 험난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象曰 水洊至 習坎 君子 以 常德行 習敎事) 
  
리離괘에서 불은 겉은 하얗고 밝지만 그 안은 컴컴하면서 텅 비어있다. 밝은 것은 양(陽)의 성질이고, 텅 비고 어두운 것은 음(陰)의 성질이다. 양의 성질은 강건하게 나아가는 특성 있는 반면, 음은 공손히 따르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불은 음양의 양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 불은 온 세상을 밝히고 만물을 양육하지만, 지나치면 만물을 다 태워 소멸시켜버린다. 그러므로 리(離)괘에 필요한 덕성(德性)은 과도한 양(陽)의 욕망을 제어하고, 유순한 암소처럼 음(陰)의 덕성을 기르는 것이다(利貞 亨 畜牝牛吉) 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사물에 붙어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리(離)는 걸림이다. 리괘는 밝음이 거듭하여 걸려있는 형상이다. 이는 하루해가 지면 또 다른 해가 떠오르듯이 마치면 다시 시작하는 종즉유시(終卽有始)의 원리 곧 음양이 쉼 없이 순환을 반복하는 자연의 순리를 말한다. 천지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며, 진정한 청복을 누리는 삶일 것이다. 

무심(無心)으로 교감(交感)하고 무심(無心)으로 항구(恒久)하라
  
주역의 상경은 건곤(乾坤)괘로 시작하여 감리(坎離)괘로 마친다. 괘의 배치로 볼 때 상경은 천지자연의 도를 중심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경은 젊은 남녀가 교감하는 함咸괘와 그 젊은 남녀가 부부가 되어 자녀를 낳고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항(恒)괘를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인사(人事)에 관한 괘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함괘의 형상은 아래는 산이 있고 위에는 연못이 있는 모습이다. 백두산의 천지가 연상되는데 산은 위로만 뾰쪽하게 솟아있지 않고 너그러이 위의 자리를 연못에게 내어주고, 또 위의 연못은 품고 있는 물을 산의 빈곳에 천천히 스며들게 하여 산속에 있는 온갖 나무와 풀들을 길러 산을 윤택하게 해준다. 간(艮)은 소남(少男)이고, 태兌는 소녀(少女)이다.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 아래로 내려가 정성과 진심을 다하여 청혼하니, 이에 여자가 화답하여 기뻐하면서 남자에게 달려가 그쳐있는 형상이다. 곧 넉넉한 자리는 내어주고 부족한 자리는 채워주어 남녀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뜻을 합하여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함(咸)은 감(感)과 그 뜻이 같다. 밑에 심心자를 빼고 함(咸)을 쓴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남녀는 모든 만물의 음양을 포괄하여 ‘모두 다’란 뜻이고, 또 다른 의미는 작위적이지 않은 순수한 텅 빈 무심(無心)으로 교감을 나눠야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함괘의 덕성은 나를 고집하지 않는 텅 빈 마음이 마땅하다.(虛受人)  항恒괘는 위는 진震으로 장남을 아래는 손巽으로 장녀를 뜻하여 중년의 남녀가 부부를 이루는 부부지도(夫婦之道)를 의미다. 부부의 도에서 중요한 덕성은 항구함이다. 항구함이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오래 지속한다는 뜻일까? 항괘의 형상을 살펴보면 위에는 우레를 동반한 번개가 아래는 바람이 있는 모습이다. 번개가 치면 번개에서 바람이 나온다. 우레는 만물을 깨우고, 바람은 비를 몰고 와 만물을 기른다. 만물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번개는 밝은 빛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고, 또 바람은 하늘의 섭리를 땅에 전해준다. 곧 번개와 바람은 천지를 변화 시키면서 또 천지를 연결하여 천지합일을 이는 것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 속에 항구함을 잃지 않는 진정한 항괘의 덕성이다. 그러므로 감응하는 도리를 살피거나 항구한 덕을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실정을 볼 수 있다고 한다고 한 것이다.

역시 나를 고집하지 않는 무아(無我)가 key-word다
  
지금까지 8괘를 풀어보면서 주역과 불교가 상통하는 사상을 알아본바 나를 고집하지 않는 무아(無我)가 key-word라는 결론을 얻었다. 천지자연은 고집하지 않고 분별없이 무심(無心)으로 만물을 기를 뿐이다. 부처께서도 나를 고집하지 않아야 깨달을 수 있고, 또 깨달음의 궁극에는 무아라고 설파하셨다. 천지자연 속에 유독 인간만이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탐욕을 부리고 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는 과거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물자도 풍요롭고 모든 것이 편리함에도 과거의 삶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하다. 왜일까? 돈이라는 물질이 행복을 도와주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목적이 되었고, 목적을 지나 인간이 돈의 노예로 절락했기 때문이다. 선악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과 돈은 잘 제어하지 못하면 선한 마음을 쉽게 타락시킨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그런 예를 보면서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하면 돈에 집착하는 똑 같은 전철을 밟는다. 그래서 주역은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며, 겸양하고, 삼가라 외치고, 부처께서는 무아무아(無我無我) 하면서 선호념(善護念)을 외친다.   --끝--
댓글목록

정태남님의 댓글

정태남 작성일

여기서 깨장도반을 만나다니 반갑네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