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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나를 닦아서 세상과 나누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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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담담혜정 작성일19-01-31 16:22 조회2,4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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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닦아서 세상과 나누는 공부


                                                                                                      


 신혜정(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4학기 에세이를 구상하면서 이번에는 공부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봐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글을 쓰다보면 그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했는지, 현재 나의 상태와 또 앞으로 어떤 비전으로 공부를 해야 할지가 조금은 정리 될 것 같아서이다. 헌데, 주역 8괘와 불교경전, 그리고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을 엮어서 글쓰기라니ㅜㅜ 어떻게 써나가야 할지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막막하다. 하지만원각경과 주역 8괘를 다시 공부하고 정리하면서 그 거울에 나를 비춰본다는 마음으로 일단 출발해보자.


   

()와 때()를 제대로 알고 행()하라

이번에 내가 쓸 주역의 8괘는 천산둔(天山遯), 뇌천대장(雷天大壯), 화지진(火地晉), 지화명이(地火明夷), 풍화가인(風火家人), 화택규(火澤 ), 수산건(水山蹇), 뇌수해(雷水解)이다. 그리고 불교경전 중에 선택한 텍스트는 원각경.원각경에는 열두명의 보살이 등장해 대승의 수행법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데, 각각의 보살들은 나름의 표상이 있으며 12가지 법문을 나타내고 있다. 여러 경전 중에 내가 원각경을 고른 이유는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과정에서부터 나중에 불지를 이루는 과정 즉, “인지법행에 관해 단계별로 상세하게 설하고 있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춘 눈높이 식 수행법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해서원각경을 공부해나가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해나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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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역의 8괘를 살펴보면 공교롭게 이번에 내가 받은 괘 중 (), 명이(明夷), ()가 모두 험난함을 만났을 때 물러서고, 자신을 숨기고, 멈추어 섬을 의미한다. 처음에 이 괘들을 봤을 때는 액면 그대로 일상에서 어떤 장애가 생기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냥 잠시 쉬라는 뜻으로 해석을 했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뭔가 나아가지 못하고 꽉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공부를 그만두어야 하나, 지금 이 상황을 피해 물러나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고민부터 했다.


헌데 이번에 괘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물러서고 멈춘다.'는 것의 의미가 전과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둔괘에서 말하는 물러남이란 원칙 없고 소극적인 회피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이 처한 위()와 때()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돌이켜 이제껏 습관화된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브레이크를 걸고 일상을 다시 면밀히 살펴보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둔괘의단전을 보면 여시행야(與時行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역시 때에 맞추어 행하고 더불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행()앞으로 나아간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아감과 물러섬의 두 가지 행동을 모두 포함한다.” 이처럼 둔괘에서 물러남이란 단순히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꼼꼼히 살핌으로써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다시 일보 정진할 수 있는 힘이다.원각경의 위덕자재 보살장에서 수행을 하는 방편으로 삼관(三觀)을 이야기하는데, 그 중 하나인 사마타(奢 摩 他,samata)도 우리말로 번역하면 바로 그침()이 된다. 잡념, 윤회하는 견해들을 그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 전일(專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시작임을 뜻하는 말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성불하고 싶으면 먼저 여래사마타행, ()를 닦으라고 설하신다. 공부를 할 때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끊임없이 끼어드는 온갖 망상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잡념들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잡념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에 에세이 준비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역과 불경을 다시 읽어보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그때부터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원각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어려운데 경전을 바꿔야 하나’ ‘청소를 좀 하고 책을 계속 읽어야지’ ‘공부해야 되는데 내가 집중을 못하고 또 왜 이럴까.’ ‘이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등등... 끝없는 번뇌 망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는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그 모습을 허공에서 의지하다가 허공의 꽃 다시금 사라졌어도 허공의 그 근본은 부동(不動)이라네 

                                     –함허 득통 주해,한글 원각경법공양, 101쪽   


원각경의 게송에서는 이런 망상들의 일체가 다 피었다 사라지는 허공의 꽃과 같은 허깨비라고 말한다. 그러니 실재하지도 않는 허깨비를 사라지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어떤 번뇌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내가 그걸 인식하는 순간 또 다른 번뇌가 자리하기 때문에 없애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끝내지 않아도 저절로 끝나고 끝나면서도 끝나지 않는 것이 바로 번뇌, 윤회하는 견해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피어났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망상을 붙들고 또 거기에 망상을 더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어떻게 오고 가는지를 또렷하게 살피고”, “바쁘고 어지러운 가운데도 언제 어디서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조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서서히 지나가도록 두는 것. 항상심과 평상심을 유지하며 그때그때 일어나는 감정에 꺼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번뇌를 쌓지 않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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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하라

주역은 한 국면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변화가 도래한다. 해서 물러나 자신을 살피는 둔()괘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대장(大壯)괘와 진()괘가 등장한다. 험난함을 만나 잠시 멈춰서 스스로를 돌아봤다면 반드시 한걸음 나아가야하기 때문이다. 멈춤에도 도가 있듯이 나아감도 그렇다. 내 상태가 어떤지를 알고 방향을 바꿔 나갈 때는 주체적으로 나서서 결단력 있고 용감하게 움직이되(九四, 貞吉悔亡 藩決不羸 壯于大輿之輹.) 언제나 조심하고 늘 경계해야 한다.(九三, 小人用壯 君子用罔 貞厲 羝羊觸藩 羸其角.) 여기서 조심하라는 것의 의미는 뭘까. 나는 매사에 너무 조심스럽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보니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새로운 공간에도, 공부를 할 때도 깊이 스며들지를 못하는 것 같아 고민인데. 주역에서 말하는 경계의 의미와 나의 소심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먼저, 대장괘에서 말하는 조심한다의 의미는 주역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종일건건(終日乾乾)의 성실성과 기망기망(基亡基亡)하는 겸손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에 반해 내가 전전긍긍하며 노심초사하는 데는 불안한 마음, 의심, 즉 믿지 못하는 마음이 깔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괘의 괘사,단전역시 순응하면서 유순함으로 나아가 위로 행한다.(晉 康侯 用錫馬蕃庶 晝日三接. 彖曰 晉進也 明出地上 順而麗乎大明)”(동파역전, 294) , 믿음을 가지고 나아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성실하고 겸손함으로 임한다는 건 그것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헌데 지금하고 있는 공부나 수행에 절실함이 없다는 건 내가 그것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반증인 셈이다. 왜 의심 없이 믿지를 못하는 걸까


진괘에서는 나아감에 있어서 불안함과 의심을 갖는 건 마치 다람쥐가 내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했다(九四, 晉如 鼫鼠 貞厲.)언제쯤이면 글을 잘 쓰게 될까”, “몇 년을 했는데 왜 공부가 늘지 않을까이렇게 공부로 뭔가를 끝없이 측량하고 목적으로 삼는 건 배움을 마치 사업에 투자하는 것처럼 생각해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의심은 허공의 꽃이 열매를 맺듯 번뇌만 거듭 더할 뿐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든다.


금강장 보살의 질문으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의심을 끊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한다. 문수장, 보현장, 보안장에서 말하는 내용들이 상반된 듯하여 중생들이 의심을 내기에, 부처님은 의심을 내는 들뜬 마음의 교묘한 분별을 버리라고 하니, 의심은 공부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함허 득통 주해,한글 원각경법공양, 143

 

원각경에서는 금강장 보살의 이름처럼 의심과 후회를 끊어야만 단단하고 깨지지 않는 지혜를 얻어 부처님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 의심하는 마음을 붕 떠서 헤매는 부심(浮心)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들뜬 마음으로 공부의 길을 차곡차곡 걸어 나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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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계율로 행()하라

주역과 경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언급하는 건 위()와 때()에 맞는 변화와 단계에 따른 방편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질서를 지키고 엄격한 계율을 세워 좇는 것 또한 강조하고 있다. 주역의 가인(家人)괘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가인괘의 괘사를 살펴보면, ‘家人 利女貞 여자가 바르게 함이 이롭다.’라는 뜻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이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인괘에서는 남녀가 타고난 본성이 다르니 그에 따른 가정에서의 역할 차이가 분명하다는 점과 집안에 엄한 예법이 있어야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初九, 閑有家 悔亡.) 어떤 공동체라도 처음 세워질 때 계율을 엄격하게 정해서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팎에서 몰려드는 근심거리를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九三, 家人嗃嗃 悔厲 吉 婦子嘻嘻 終吝.) 


이건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원각경의 보안 보살장에는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계율을 지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굳게 계율을 지니고 고요하고 단정하게 좌선하며 정념으로 관찰하는 것”(한글 원각경,113)이 옳은 이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계율은 단지 외면의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의 움직임 모두가 계율이다.” 그래서 계율을 지킨다는 건 불필요한 감정의 잉여를 버리고, 일상을 바르게 꾸려나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일상이 번잡하고 삶의 터전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전일(專一)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예전에 고승들이 제자가 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도량을 청소시키고 정리정돈하는 것을 첫 번째 계율로 삼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부든 수행이든 엄격한 윤리로써 배움이 일상과 분리되지 않도록 실천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을 쓰다 보니 지난 1년 간 금성에서 주역을 외워서 시험을 치고 경전과 서괘전을 암송했던 게 생각난다. 처음엔 분량이 너무 많아서 이걸 어떻게 다 외워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이렇게 무작정 외워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만도 있었지만 신기한 건 어떻게든 외워지더라는 거. 그리고 주역을 외우는 동안은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속 시끄러운 일이 있고 머리가 복잡해도 암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집중력이 생기고, 또 자꾸 외우다보니 어느새 의미가 통하는 경험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보살들이 선정에 들기 위해서 계율을 먼저 지켜나가는 것처럼 주역을 공부하면서 그 괘들과 효들을 암기하고, 암송해야하는 금성의 계율이 어떤 의미이고 왜 중요한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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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행()하라

가인(家人)괘에서 공동체의 규율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규()괘는 공동체 내의 분열을 화합으로 바꿔나가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규괘에서는 분열된 상황이 발생한 원인을 사람들 사이의 '다름'이라고 보았는데 이 어그러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것'이다(象曰 上火下澤 睽. 君子以同而異) 논어자로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줏대 없이 동화되지 않으며 소인은 부화뇌동하기는 하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고 했다. 공부의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그 뜻을 이루어나가는 능력이나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자신과 같지 않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소통하지 않으면 끝내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르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긋나는 것이 규괘가 말하는 어려움이다


이렇게 공동체를 함께 꾸려가는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괘에서는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이야기한다.(解 利西南 无所往. 其來復吉. 有攸往 夙吉.) 시간이 갈수록 갈등의 본질은 사라지고 감정들만 쌓여 오해가 깊어지니 문제의 매듭을 찾아서 빨리 푸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학기에원각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나의 깨달음을 타인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원각경에 등장하는 열두 보살들은 우리에게 "도를 깨달아 성취한 후에는 반드시 행()을 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저 자기 스스로만 닦아 청정함을 회복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런 수행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중생들이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공부할 수 있도록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누어 결단코 마지막 업장을 참회하고..이 결과로 수행을 완성할 수 있게 중생들을 끝까지 돕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일방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어떻게 내가 하고 있는 공부로 세상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다

그리고 공부하는데 의심만큼이나 장애가 되는 나태함과 게으름에 대한 내용도 너무 공감하며 읽었다. 원각경에서 근기가 부족한 사람은 시간을 오래두고 수행을 해나가고, 한 번 얘기해서 못 알아들으면 여러 번,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면 된다고 너그럽게 말한다. 하지만 근기가 부족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 한다


근기가 둔한 사람은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공부를 성취할 수 없다그러므로 먼저 모름지기 죄를 참회하여 업장을 끊고뒷날의 여력에 따라 세 종류의 청정한 관()을 함께 수습하되 게으름이 없이 정진하여 깨달아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함허 득통 주해,한글 원각경법공양, 354

  


자신이 처한 자리와 상황을 알고, 공부가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히 나를 닦아서 세상 사람들과 깨달음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것. 앞으로 공부를 통해 이루고 싶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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