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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vs 불교]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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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단주 작성일19-01-31 19:09 조회3,7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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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서

                                                               금요감이당대중지성 이한주


두려움
어찌해야 할까? 두려움의 깊은 번뇌. 피하고 싶은 이 감정을 오히려 강조하는 주역 괘가 있다. 바로 중뢰진 괘이다. 진괘에서는 큰 우레가 쳐 큰 진동이 일어날 때는 오히려 두려워하라고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웃을 수 있다고.(震來虩虩, 後笑言啞啞 吉, 진래혁혁, 후소언액액,길) 중요한 것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앞이 캄캄해지기 전에 숟가락과 울창주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을 차릴 수 있다.(震驚百里, 不喪匕鬯, 진경백리, 불상비창) 숟가락과 울창주는 신의 강림을 맞이할 때 꼭 있어야 할 도구와 술이라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으로 큰 진동이 일어날 때는 신을 맞이하는 공경과 정성과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큰 우레가 치고 큰 진동으로 일상의 지반이 흔들리고 있다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까딱하면 정신줄을 놓칠 수 있기에 중뢰진 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말이다. 작은 진동에도 두려움으로 일상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올봄, 두어 개월 동안 까닭 없는 두려움이 찾아와 공부가 도통 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때로부터 꽃잎이 만개하여 다 떨어질 때까지의 기간이었다. 감이당 대중지성의 글쓰기 튜터를 맡게 되어 새로운 길을 나선 참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쿵쾅쿵쾅 큰 두려움이 몰려 왔다. 두려움의 원인을 모르니 참 답답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자연스레 약간의 두려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익숙했던 편안함에서 낯선 세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소한 일에도 큰 두려움에 몰려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중뢰진 괘의 구사효, 震遂泥(진수니), 두려움의 진흙탕에 빠져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았던 나의 두려움의 근원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새로운 장에 대한 정성과 공경이 부족했던 것일까? 


대승 불교 경전인 『유마경』에서 유마는 중생의 해탈을 바라는 보살은 이 같은 번뇌를 끊기 위해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바른 수행이라는 것이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 속에서의 수행”(『유마경』 p367)이란다. 생멸이 없다니! 생사를 걸고 수행해야한다는 말인가? 작은 문제에도, 또는 원인도 모른 채 너무나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한낱 중생인 나는 지금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 맞는가? 과연, 나의 두려움의 근원은 무엇인 것일까? 이런 질문을 이어가다 『유마경』과 이번 에세이의 미션 주역 8괘를 같이 풀어보며 답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을 떠도는 곤궁한 자여!
감이당 공부를 해하며 이렇게도 공부 복이 터질 수 있을까를 실감했다. 그 누구도 뒤늦은 나의 공부를 막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들까지 응원해 주었다. 풍요를 상징하는 뇌화풍 괘가 풍족했던 나의 공부 복을 말해주는 괘이다. 그런데 주역의 모든 괘가 그렇듯 뇌화풍 괘의 역설이 담고 있는 뜻도 만만찮다. 이 괘의 시간적 조건은 해가 중천에 뜬 때이다. 중천의 해는 만물을 비추고 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큰 장막이나 휘장으로 그 해를 가리고 어두움 속에서 별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더니 결국 상육효에서는 豐其屋, 蔀其家, 闚其戶, 闃其无人, 三歲不覿, 凶(풍기옥, 부기가, 규기호, 막기무인, 삼세부독, 흉)의 상태다. 풍족함에 빠져 오만불손해지더니 고대광실 부잣집에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는 흉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상황을 두고 동파는 말한다. “지혜는 우환에서 생기고 어리석음은 편안함에서 생긴다고”(『동파역전』 p439) 풍요로운 장에서 겸손한 마음을 갖기가 힘든 것은 풍요가 주는 수동적 편안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편안함이 어리석음을 낳는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 진리는 원래 천하에 환히 드러나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무지의 덮개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 무지의 덮개 이름이 ‘풍요’라는 사실이다. 豐其蔀, 日中見斗, 折其右肱, 无咎(풍기부, 일중견두, 절기우굉, 무구), 풍요의 덮개를 덮고 캄캄한 무지의 어두움에 쌓여 두려움 속에서 샛별을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이런 상태이니 오른팔이 부러진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모든 형상을 소경 앞에 보여도, 하나의 형상마저 소경이 볼 수”(『유마경』 p362)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성문승과 독각승이 아무리 불도를 닦아도 한 사람의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어두움 속에서 해탈을 갈구하는 자가 바로 성문승이나 독각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서 두려움의 1차 원인이 보이는 듯하다. 무지의 덮개를 걷어내야만 진리에 접속할 수 있는데도, 덮개에 대한 망상은 그걸 걷어내면 빈곤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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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글쓰기 튜터를 하려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나로서는 집을 떠나있어야 하는 절차로 인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내면에서 약간의 진동이 일어났다. 진동과 함께 찾아온 두려움의 감정. 


여전히 아늑한 집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넘치는 공부 복을 혼자서만 조용히 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밝은 이치를 휘장으로 막아버리고 궁색한 자기합리화의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것을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수동적 공부의 편안함 속에서 또 다른 탐욕을 축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두려움 속에서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이렇게 열거하다 보니 질문의 귀착점이 보였다.

풍괘의 구사효는 말한다. 豐其蔀, 日中見斗, 遇其夷主, 吉(풍기부, 일중견두, 우기이주, 길) 큰 덮개로 해를 가렸어도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나 연대하면 길하다고 한다. 여기서 연대함이란 “밝은 빛이 아니면 위엄의 진동이 나아가 시행할 바가 없고 위엄의 진동이 아니라면 밝은 빛은 소용이 없으니, 서로 의지하여 바탕을 이루어 그 쓰임을 완성”(『주역』, 정이천, p1090)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진동과 빛의 연대를 말함인데, 진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실행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며, 빛으로 길을 밝혀 주어야만 실행으로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유마경』에서 말하는 지혜와 방편을 갖춘 보살의 길!
 
그런데 만약 수행자가 보살의 길을 가지 않고 풍요라는 덮개에 집착하여 어두움 속에 계속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풍요의 덮개는 환상! 진리를 찾아 수행의 길을 떠났으나 지엽적인 문제에서 맴맴 돌고 있을 것이고, 마음은 여전히 외롭고 곤궁하니 조그만 변화만 와도 마음이 쿵닥쿵닥. 이것을 화산려 괘에서는 떠도는 유랑자에 비유하고 있다. 떠도는 유랑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초구에서는 旅瑣瑣, 斯其所取災(여쇄쇄, 사기소취재)라고 한다. 비루하고 째째한 모습으로 재앙이 닥쳐도 대처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旅焚其次, 喪其童僕貞, 厲(여분기소, 상기동복정, 려) 여관은 불타 없어지고 같이 길을 떠난 동복마저 잃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旅于處, 得其資斧, 我心, 不快(여우처, 득기자부, 아심, 불쾌)하게 되니, 비록 돈과 도끼를 얻어 여관을 다시 지을 수 있게 될지라도, 여관을 지을 땅이 있을 리 만무하니 마음이 심히 편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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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렇다면 유랑자여!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射雉一失亡, 終以譽命(석치일시망,종이예명). 화살 한 개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꿩을 쏴 맞춘다면 명예와 복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꿩을 얻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화살 한 개를 버릴 수 있는 용기. 유랑자가 명예와 복록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유랑자에게 명예와 복록이라니?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화려하고 풍족한 삶일까? 아니다. 유랑자에게 필요한 명예와 복록은 단지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소박한 거처를 얻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곤궁한 상태도 모르고 손안에 있는 화살 한 개에 집착해 뻔히 보면서도 꿩을 놓치는 것이 바로 유랑자의 마음이다. 그렇게 고착된 마음으로 떠돌고 있다면 잠깐 소박한 거처를 얻을지라도 鳥焚其巢, 旅人先笑後號咷, 喪牛于易, 凶(조분기소, 여인선소후도호, 상우우이, 흉)이란다. 새가 둥지를 태우는 격이니 처음에는 웃을지라도 나중에는 울부짖게 된다고. 이는 소를 잃은 것처럼 흉한 상황이라고. 앗차! 이것은 유랑자의 탐욕. 풍요의 덮개 아래에서 일어나는 탐진치의 윤회,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인 중생의 삶. 


배치의 장을 바꾸라
중생의 삶만이 이러할까? 『유마경』에서는 깨달음의 길을 가고 있는 보살들도 윤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알고 보면, 보살들도 풍요의 덮개에 집착하는 한, 어둠 속의 유랑자이다. 이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욕망과 애착이 몸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망한 분별을 낳고 도착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이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를 멈출 수는 없는 법, 중산간 괘는 이 번뇌를 멈추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한다.

 
첫 번째 초육효, 艮其趾, 无咎, 利永貞(간기지, 무구, 이영정), 번뇌란 자고로 발꿈치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최초에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할 때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다음부터는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육이효, 艮其腓, 不拯其隨, 其心不快(간기비, 불증기수, 기심불쾌) 장딴지의 멈춤. 멈추긴 멈추었으나 강제적인 절제로 인한 것이니 곤란하다. 멈춤은 내공의 힘이어야 한다. 세 번째, 구삼효, 艮其限, 列其夤, 厲, 薰心(간기한, 열기인, 려, 훈심) 마음의 경계에서의 멈춤, 이 멈춤은 고집스럽고 위태롭고 불안하다. 스스로 어떠한 한계까지 밀어붙인 뒤 멈추었기 때문에 여유도 안정도 없다. 따라서 멈춤의 때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 육사효, 艮其身, 无咎(간기한, 무구) 몸에서의 멈춤. 이를 상전에서는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째 육오효, 艮其輔, 言有序, 悔亡(간기보, 언기서, 회망) 광대뼈에서 멈추었다. 말을 할 때 하고 멈출 때 멈추어야 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상구효, 敦艮, 吉(돈간, 길) 돈독한 멈춤이다. 이는 멈춤의 도를 잃지 않고 지키는 자이다. 상구효는 중산간 괘 중 유일하게 길한 효이다. 그만큼 인간의 욕망과 애착은 멈추기도 멈춤을 지속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한 인간에게 탐진치의 윤회는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다면? 그래서 그 강렬한 욕망들과 함께 하고 있다면? Stop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산간 괘에서 알려주는 멈춤의 최고의 방도는 간유배(艮有背), 우리의 신체 중 등에서 멈추는 것이다. 등으로 보면 멈출 수 있다는 말인데, 이 말은 그 상황에 탐착하지 말고 등을 돌려 다른 상황을 만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배치의 장을 바꿔 미세한 변화의 리듬을 타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허망한 분별과 도착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두움 속을 떠도는 두려움에 빠진 곤궁한 자여, 배치의 장을 바꾸라!


배치의 장이 바뀌게 될 때 성급함은 금물! 점차적으로 진입해야 함을 알려주는 풍산점 괘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漸, 女歸吉,점, 여귀길)에 이것을 비유하고 있다. 결혼에는 반드시 절차가 있어야 하고 나아갈 때는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이때, 천천히 나아가야 할 주체는 기러기이다. 기러기는 하늘로 성급히 날아오르지 않는다. 鴻漸于干(홍점우간, 물가), 鴻漸于磐(홍점우반, 너럭바위), 鴻漸于陸(홍점우륙, 언덕), 鴻漸于木(홍점우목, 나뭇가지), 鴻漸于陵(홍점우릉, 산마루)을 거쳐 비로소 광활한 하늘길로 날아오른다. 하지만 자유로이 날던 기러기가 돌아와야 할 곳은 다시 그 자리. 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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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아직은 자신이 절름발이(跛能履, 파능리), 귀머거리(眇能視, 묘능시)의 상태임을 아는 것, 너무 이르거나(反歸以娣), 너무 늦지 않게 행동하는 것(遲歸有時, 지귀유시),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자기동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생성의 힘을 만드는 것. 뇌택귀매 괘가 말해주는 수행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반드시 중생의 평등성 속에 있다는 것이 『유마경』이 말하는 바다. 유마는 말한다. 중생의 평등성 속에 있어야 한다고. 그 속에서 항상 중생의 해탈과 함께 가야 한다고. 그것이 보살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중생의 평등성이 무엇이기에 보살은 그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일까? 유마가 알려주는 중생의 평등성이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가 겪는 생로병사의 모든 번뇌와 해탈까지의 전 과정이다. 인간 삶의 과정, 그 자체. 이를 통해 유마는 “자아도 열반도 모두 空”(『유마경』 350)인 것을 알려준다. 즉, 이 세계는 불이일체(不二一體) 공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중생의 세계는 평등하다. 번뇌도 깨달음도, 삶도 죽음도 모두 평등한 세계, 이것이 곧, 생과 멸이 함께하는 과정에서의 수행이 아닐까? 


하지만 유마는 말한다. 인간의 집착은 끝이 없다고. 결국에 가서는 깨달음에도 집착한다고. 이 또한 욕망과 애착이 불러일으킨 허망한 분별이며 도착의 마음인 것을. 그러니 보살들도 두려움의 번뇌를 앓는 것이라고.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다시 역설적으로 말한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불법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수미산과 같은 높고 거만한 아견을 일으키고, 그 깨달음에 대해 발심할 때, 거기에 불법은 생장”한다고.(『유마경』 p378)  진실로 이러하다면? 질문은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두려움을 탐구하고자 했던 이 마음조차도 두려움에 떨지 않는 슈퍼 정신 능력자가 되고 싶은 탐욕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삶에서 이탈하여 초월자가 되고자 하는 탐진치의 작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질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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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유마경』에서는 해탈은 “모든 중생의 마음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곳에서”(348쪽)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살은 일체의 그릇된 견해에서 이탈”(348쪽)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팁을 준다. 이는 질문에 답이 있다는 뜻! 


그래서 말인데, 두려움을 탐구하던 중, 혹시, 만약, 지금, 이 찰나의 순간,두려움이라는 번뇌의 잔재를 끊고 깨달음에 도달했더라도 그것을 스스로에게도 자랑삼지 않고, 몸도 마음도 병도 적멸시키지 않고, “통찰하는 것에도 통찰하지 않는 것에도 안주하지”(『유마경』p353)않는다면, 시작도 끝도 완성도 없는, 우리의 생각이 의지할 어떠한 기저도, 근본도 없고, 어떠한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그저 일상과 미혹과 번뇌와 열반이 일체의 상태로 변화하는 이 과정을 담담히 걸어가고 있다면, 한 번 믿어보자. '생도 없고 멸도 없는 불이일체(不二一體) 바른 수행'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밥을 짓자!
번뇌와 깨달음이 불이일체(不二一體)라는 것을 깨쳤다면, 일상에서의 미시적 수행 과정에 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번뇌 속에서의 깨달음, 이를 내부적인 변환 또는 변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의 지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택화혁 괘는 알려준다. 이를 위해 두 마리의 동물과 세 부류의 사람이 출현한다. 표범과 호랑이와 소인과 군자와 대인......이들을 통하여 변혁의 의미에 다가선다. 小人革面(소인혁면), 이것은 변화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궁색한 방편으로 얼굴만 살짝 바꾼 것이다. 君子豹變(군자표변)은 무엇일까? 군자가 아름다운 표범의 무늬로 바뀜을 말한다. 인간이 표범이 되었다고? 표범의 무늬란 무엇을 말함인가? 수행자가 자연의 한 개체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수행을 통해 자연성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변혁하는 과정. 그런데 구오효는 더 나아가 “大人虎變(대인호변)”이라고 한다. 인간이 호랑이로 바뀌었다. 이것을 대인의 “未占有孚(미점유부)”라고 한다. 즉, 인간이 호랑이로 바뀐 것은 그 변혁이 점을 치지 않아도 될 만큼 천리를 따르고자 하는 절박함과 선한 믿음이 같이 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도가 천리의 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 그런데 혁괘는 이때 함께 작동하는 것이 있다고 덧붙인다. 바로 사람들의 마음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어야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본다. 이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已日乃孚(이일내부), 하루를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의 하루 동안 수행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박한 마음으로 밥을 지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화풍정 괘로 수행의 마지막 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화풍정 괘는 괘상 자체가 솥을 상징한다. 그야말로 솥이다.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솥. 이 괘는 주역 괘 중 인간의 삶을 가장 잘 상징해주는 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공물로 천리의 도를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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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밥을 짓기 위해서 솥을 엎어서 남아있던 상한 음식을 깨끗이(!) 싹 비운다.(鼎顚趾, 利出否, 정전지 이출비) 그리고 쌀을 깨끗이(!) 씻어 넣는다. 천천히, 신중하게! 둘째 솥의 발이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鼎折足, 정절족) 아무리 정성스레 밥을 지어 놓더라도 솥이 균형을 잃어 넘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솥의 귀(손잡이)가 중요하다. 밥이 익은 뒤 무거운 솥을 옮기려면 반드시 튼튼한 손잡이가 있어야 한다. 최고의 손잡이는 옥으로 만든 손잡이다.鼎黃耳金鉉,利貞 (정황이금현, 이정) 이 손잡이는 달궈지지 않아 잡기에 좋다. 자, 이제 밥이 다 되었다면, 조심스레 옮겨서 보슬보슬 다 된 밥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숟가락 부딪혀 가며 즐겁게 먹으면 된다.
 

물론 이 소박한 수행의 장에서도 두려움은 또 자라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모든 번뇌의 출발에는 탐진치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움켜잡고 펼쳐 나누지 못하는 손아귀의 탐착에서 발생한다는 것도 알았고, 이것을 놓기 힘든 것이 인간의 신체성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탐착의 손아귀를 풀어 그 손으로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사람들과 둘러앉아 나누어 먹어 보는 거다. 그때 이런 이야기도 한 번 나누어 보는 거다. 두려움도 삶의 과정 중 찰나적으로 찾아온 감정이었다는 것을.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 또한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생성과 소멸의 이치라는 것을. 이 진리를 주역을 통해, 『유마경』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을. 이런 대화 속에서 수행의 하루는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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