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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vs불교]분별을 떠나 관계의 흐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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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길 작성일19-01-31 21:42 조회3,1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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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떠나 관계의 흐름 속으로


                                                                                            김주란(금요대중지성)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오늘로 길었던 한 해가 끝난다. 공식적인 일 년의 끝은 12월 31일이지만 그건 그냥 숫자일 뿐. 회사원에게 한 해의 끝은 종무식하는 날이고, 금성의 우리들에게 한 해의 끝은 에세이 발표일이 아니겠는가. 

끝을 기다리며 한 해를 돌아보니 올해는 참 사건이 많았다. 벌써 까마득하게 여겨지긴 하지만, 역시 제일 큰 사건은 남북정상회담이다. 판문점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문대통령이 포옹을 하고, 우리는 깨봉 공플에서 이 세기적 만남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화면 가득 잡힌 북의 젊은 권력자의 다소 상기된 얼굴 표정과 몸 동작 하나하나에 공플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들은 연신 감탄을 해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목소리! 그는 빠르고 힘이 있는 그리고 의외로 유머러스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반세기 넘게 우리들의 심신에 아로새겨져있던 표상- 북의 ‘수괴’라는 전통적 표상은 이날 단번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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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의 전복은 심적, 도덕적, 그리고 심미적 판단에까지 혼돈을 야기한다. ‘악의 축’이자 ‘독재자’였던 김정은 위원장에게 스마트하고 예의바르며 귀티가 난다는 호평이 삽시간에 들끓었다. 그후 싱가폴에서 북미회담이 열리고나자 이번엔 트럼프도 어쩐지 귀여워 보인다며 당혹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사실 나도 그랬다. 무식하고 천박한 부동산 재벌, 심지어 이름도 트럼프! 그에게 호의는커녕 노골적인 경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급선회 앞에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참이다. 그럼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온 김정은과 트럼프는 무엇이었나? 과거와 지금,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모습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일은 허상에 속지 않고 보다 진실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다. 혹은 또 다른 길이 있다. 모든 이미지는 허구이며 실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는 길이다. 어떤가? 우리에게 익숙한 길은 이 두 갈래 길뿐이다. 어딘가에 있을 실체를 추적하는 길과 그런 실체적 진실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길. 

그런데 불교와 주역은 이 익숙한 길이 아닌, 기묘하고 낯선 방식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 그 길은 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을 떠나 그 둘이 둘이 아니게 되는 그런 길이다. 이른바,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라는 식의. 이는 이번에 암송한 유식 30송의 한 대목이다.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니, 정말 전형적인 불교의 어법 아닌가. 사실 이 대목을 암송하기로 한 이유도 알아먹기가 너무 힘겨워서이다. 외우면 어쨌든 나에게 붙어 있을 테니까 몸에 붙여놓고 생각해보려고.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 말은 그저 수사적 기교로 쓰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길이 있다, 진짜. 더듬더듬, 그 사잇길로 가보자. 

하나의 음효가 사는 방법 1-풍천소축/천택리
불교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식이라면, 주역은 ‘이것은 이러하고 저것은 저러하니 결론은 그때그때 다르다’라고 얘기한다. 역(易)이란 이름 자체가 변화를 뜻하니 고정된 의미값을 갖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역은 변역인 동시에 불역이며 간이(簡易)하다. 변화의 성질 자체는 변치 않으며 그 이치는 단순하고 쉽다.  

이 글에서 다룰 여덟 괘(풍천소축 천택리 지천태 천지비 천화동인 화천대유 지산겸 뇌지예)중 네 괘 또한 아주 단순한 공통 특징을 갖고 있다. 이 괘들은 하나의 음효와 다섯 개의 양효로 이루어져 있다. 딱 보면 한 눈에 특징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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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먼저 볼 괘는 소축괘와 리괘이다. 소축괘는 4효가, 리괘는 3효가 음효인데 이 하나짜리 음효가 각 괘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다수결의 민주주의와는 사뭇 다르게도 주역의 세계에서 판을 좌우하는 건 ‘소수’다. 그것이 음이건 양이건 상관없다. 소수가 전체의 특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뭐?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양으로 승부하는 다수결에 질려서인지 이 사실만으로도 신선하다. 

사실 괘상만 얼핏 봐서는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음효가 네 번째에 있느냐 세 번째에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차이는 절대 작은 차이가 아니다. 효 하나 칸 하나가 달라졌을 뿐이지만 그 자리의 차이가 질적 차이를 만들어 버린다. 보라, 음양양은 풍(風)이 되고, 양양음은 택(澤)이 된다. 나아가 풍천소축이 되고 천택리가 된다. 추호의 차이가 천리를 가른다고 했던가. 부분이 바뀌면 전체가 다 바뀐다. 그래서 주역의 앎이란 미세한 차이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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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차이가 만드는 변곡점을 따라 좀더 가보자. 동파의 해석에 따르면 소축괘의 음효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강한 자(건)를 유혹하고 조종한다. 건은 그런 음효가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손(풍)괘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손괘의 공손하게 순응하는 태도와 더불어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기질 탓이다. 건이 손을 떠나고자 한다면 사귐이 아직 깊지 않을 때 떠나야 쉽다(初九, 復, 自道, 何其咎? 吉 /九二, 牽復, 吉.). 건은 결국 손과 함께 엉겨 짙은 구름이 되었다가 끝내 비를 뿌리기에 이른다(上九, 旣雨旣處, 尙德, 載, 婦貞, 厲. 月幾望, 君子征, 凶.) 소축괘의 육사효가 사욕을 위해 굳센 자에게 질척하게 엉기는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면, 리괘의 육삼효는 완전히 다르다. 리의 음효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우고 양강한 두 양효 간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전자가 지극히 이기적이라면 후자는 가히 무아의 경지라 할까.

이제 리(履)괘의 스토리를 따라가보자. 리괘의 미션은 호랑이 꼬리 밟기(履虎尾)”이다. 호랑이 꼬리를 밟으면 어떻게 될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그러니 관건은 호랑이 꼬리 밟기가 아니라 꼬리를 밟고도 무사할 방도에 있다. 리괘가 그런 괘다. 호랑이 꼬리 무사히 밟기라는 미션임파서블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괘. 이 어마무시한 임무를 달성하는 게 누구냐, 그게 육삼효다. 육삼효는 대체 무슨 초능력을 보유했길래 이런 일을 해내는가? 육삼효, 즉 음효의 특징은 능력이 아니라 무능력에 있다. 무능력이라고 하니 우스워보이겠지만, 진짜 무능력 맞다. 眇能視, 跛能履-눈도 애꾸, 다리도 절름발이인 육삼. 그런데 육삼의 위치가 절묘하다. 사람도 성격이 센 사람끼리는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 강한 건과 강한 구이효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무능한 육삼이 있는 것. 굳건한 건(천)을 기뻐하며 따르는(택) 천택리괘에서 육삼은 그 기쁨의 주체가 된다. 이런 육삼이 있기에 건은 구이를 활용할 수 있다. 육삼은 건과 구이 사이에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온전한 통로가 되어준다. 무용의 대용, 무능의 유능이다.  

그리고 보면 소축이란 이름은 음의 목적 혹은 결과를 지칭하는데 반해, 리란 그저 밟는다, 행한다라는 무목적적인 행위 그 자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들어온다. 축적할 것인가, 그저 행할 뿐인가. 하나의 음효가 전체 판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양상이 드라마틱하게 대비된다. 

하나의 음효가 사는 방법 2-천화동인/화천대유
동인은 함께 연대하는 것이고 대유는 가장 큰 풍요를 뜻하는 괘이다. 위에서 살펴본 소축괘와 리괘에서는 하나의 음효는 각기 사효와 삼효의 자리에 있었다. 반면 동인괘의 음효는 이효에 있다. 동인괘의 단전은 “동인은 부드러움이 지위를 얻고 중을 얻어서 건에 호응하므로 동인이라 말한다.” 대유괘의 음효는 오효이다. 대유괘의 단전은 이렇다. “대유는 부드러움이 존귀한 지위를 얻고 커다란 가운데 상하가 호응하므로 대유라고 말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효와 오효는 중(中)을 얻은 자리이며, 그 자리에 위치한 음효들이 각기 연대와 풍요라는 시대적 과업의 주체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효와 오효의 위치는 사뭇 다르다. 이효는 덕과 능력을 갖춘 신하, 혹은 실무자의 자리이며 오효는 존귀한 군주, 리더의 자리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득중한 자리라는 점이 더 유의미하다. 중이란 주역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중은 상하의 가운데 위치하는 까닭에 관계망의 중심이 된다. 만나는 사람도 많고 만나야할 사람도 많으며 그 사람들의 지위와 성격도 다종다양하다. 그건 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신경 쓸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중이라는 말이 주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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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설적으로 중의 자리는 타자와 계속 부대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변화가 그 자리에 있는 존재를 결국 살린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계사 하편 2장)란 바로 득중한 자리의 어려움과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새 국면에 관한 통찰이 아니겠는가. 유식(唯識)불교 또한 중도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선악시비 등 고정된 의미값이 있을 수 없는 항상 변화하는 연기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그에 대한 유식의 답은 중도이다. 짠 맛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중도의 길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연기의 관계 속에서 어느 것이 부족한가, 어느 것을 채워야 하는가를 알아 조화를 이루어 나갈 뿐이다.  

그런 막중한 자리에 온 음효는 과연 어떤 관계를 창출하는가. 앞서 보았듯 소축, 리, 동인, 대유는 모두 양강한 다섯 효와 부드러운 음효 하나가 펼쳐내는 관계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축/리의 대비되는 그림과는 달리 동인/대유의 그림은 공통성이 더 많아 보인다. 왜일까? 그 까닭 또한 득중(得中)의 미덕과 관련이 있다. 

하나의 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변되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효의 순서를 뒤집어 만드는 종괘이다. 종괘는 빈(賓)괘라고도 한다. 입장을 바꿔 손님, 즉 상대방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같은 상황도 다르게 해석된다. 소축과 리, 동인과 대유는 서로 종괘가 된다. 그런데 소축/리와 다르게 동인/대유는 뒤집어도 소성괘가 달라지지 않는다(천화동인, 화천대유). 특이점에 해당하는 음효가 중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양음양(화)은 뒤집어도 양음양이다. 중은 뒤집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니 뒤집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타자에 대한 배려나 두 견해의 절충안 정도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동인괘는 타자와의 연대를 지상과제로 삼는 괘이지만 여기에 배려나 절충 따윈 없다. 동인의 주체인 육이효와 연대하기 위해 그의 짝인 구오효는 울부짖으며 큰 싸움을 벌여야 한다(九五, 同人,先號咷而後笑, 大師克,相遇). 공자도 계사전에서 강하고 향기로운 연대란 나아갈 때와 머물 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만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君子之道, 或出或處, 或黙或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이렇게 본다면 중도나 연대란 가장 명확한 분별과 구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리가 다 했다 -  지천태/천지비
비의 시대는 천지가 교류하지 않고 만물이 소통하지 않는 암울한 시대이다. 교류도 소통도 없는 그야말로 막힌 시대. 이런 시대에는 不利君子貞, 군자의 곧음조차 이롭지 않다. 왜일까? 먼저 드는 생각은 匪人 즉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소인은 어둡고 나약하며 자기만 안다. 
 
그러나 비의 시대라고 소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양의 비율은 3:3, 딱 반반이다. 태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양 셋, 음 셋. 그러니 문제는 소인이 있느냐 없느냐, 군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위치다. 주역에서 위치는 단지 상하의 위상, 권력의 다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 네트워킹 능력, 시간성, 경력과 능력의 정도, 요구되는 리더쉽의 성격 등 다종다양한 의미가 ‘위치’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 위주의 사고방식에 죽자 사자 매달리는 우리는 자신이, 혹은 저 사람이 소인인가 군자인가만을 묻는다. 소통을 잘하고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자는 군자, 자기 안위에만 눈이 먼 사람은 소인이라는 식. 그러나 태의 시대에서는 소인도 소통을 원활히 하고 제 할 일을 다 한다. 왜냐면 태의 시대 소인, 즉 음의 위치가 그를 그렇게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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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괘와 비괘는 그야말로 ‘자리가 다 했다’. 건과 곤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소통이 되는지 꽉 막히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태괘는 건이 하체에 있다. 나아가고자 하는 건이 아래에 있고, 순종하는 곤이 위에서 내려와 따르고자 하는 형세이다. 건은 오르고 곤은 내려오니 상하 간에 교류가 원활하다. 빙글빙글 돌며 순환하는 사이 서로 정보와 열 등 에너지를 교환하기 마련이다. 반면 비괘는 건이 상체에, 곤이 하체에 있다. 이미 제 갈 곳에 가있으니 교류할 이유도 없고 의욕도 없다. 아니 곤은 더 머물려하고 건은 더 떠나려 할 수도 있다. 비를 이루고 있는 소성괘 사이에는 상호작용 대신 거리만이 있다. 

천지가 구별되고 막힌 비괘의 상황에 대해, 남회근 선생은 ‘천지가 혼돈 상태에 있던 때는 아무 일도 없었으나 천지가 명확히 구별되고 난 뒤 온갖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천지가 있은 후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으니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으니 시비와 번뇌가 생겨 천지간의 문제가 무궁무진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도리어 인류에게 번뇌와 고통을 가져다준 셈이다. 그러나 비가 극에 이르면 태가 온다. 그러므로 역경을 아는 사람은 운수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것 속에 좋은 것이 있고, 좋은 것 속에 나쁜 것이 있기 때문’(『주역계사강의』 p.487)이라고 했다. 명확한 구별과 분별이 시비번뇌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걸 시비 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름과 사물의 관계가 명백하고 거기에 길들여지면 점차 ‘습관적인 인식태도에 젖어 언어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별의 세상’을 만들게 되고 이런 삶의 태도는 타율적이고 배타적이며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고 유식은 설한다.  

재밌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막힘이란 뭔가 굉장히 많이 쌓여서 마구 뒤섞인 채 꽉 찬 상태인데 비괘의 막힘은 외려 텅빈 형상이다. 서로 어떤 감정도, 정보도, 영향도 교류하지 않고 자기 자리만을 고집하는 자들 사이의 냉랭한 허공. 이 허공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싸움조차 없다. 소동파는 이를 두고 “태(泰)는 정벌함이 있지만 비(否)는 정벌함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우리가 서로를 불편해 한다면, 적어도 아직 비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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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하게 고요하게-지산겸 뇌지예 
다시 유식으로 돌아와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을 항상 떠나 있는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비괘는 너와 나를 가르고 주체와 객체를 가르는 변계소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음효와 양효가 인연조건과 관계망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사건을 펼쳐내는 모습은 의타기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원성실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사전의 저 유명한 문장, 神无方而易无體로 가름할 밖에 없을 듯하다. 역은 정해진 체가 없으니 역은 용(用)을 체(體)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체는 용 속에 있으며, 단지 용 속에서 체의 작용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역은 고정된 본체가 없다. 

따라서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다른 것이 아니나 변화하는 사건과 사물 속에서 항상 작용하는 원성실성을 보지 못하면, 인연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의타기성의 미묘한 달라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습관적인 분별과 구분에 갇히고 만다. 변하지 않는 진짜 실체를 찾는 일도 모든 것이 허구라고 여기는 것도 모두 습관적인 분별과 구분일 뿐 연기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의타기성을 제대로 아는 것이 원성실성이므로, 깨닫지 못하면 의타기성을 알 수 없고 분별된 세계인 변계소집성의 삶만을 산다고 한 것이다.(『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p.214) 이러한 분별과 고정의 세계를 우리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사유형태로 절대화해서 소유하고 있는데, 이런 소유의 마음을 멈추고 힘을 빼고 덜어내는 것이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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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괘를 보니 바로 지산겸과 뇌지예다. 겸괘와 예괘는 앞의 괘들과는 달리 하나의 양효가 다섯 음효를 상대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형국이다. 겸괘는 땅 속에 산이 있는 모습인데 남회근 선생은 이를 꼭대기가 평지인 산이라고 풀었다. 하나인 양효가 다섯 음효를 위해 일하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겠는가. 끊임없이 수고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괘에서 우리는 아집과 아상을 끊임없이 버리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예괘는 기쁨의 괘이다. 우레가 울리니 땅이 따라 울리는 것처럼 함께 따라 진동한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나되는 모습은 나와 대상의 구별과 그로 인한 일어나는 차가운 소외의 고통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러나 기쁨은 들뜨기 쉽고(初六, 鳴豫, 凶) 중독되기 쉽다(上六, 冥豫, 成, 有渝, 无咎). 수행은 그런 들뜬 기운이나 탁한 기운이 아닌 부드럽고 맑고 고요한 가운데 있다. 그러한 기쁨은 어떤 것인가? 그 답은 예괘 육이효에 있다. “知幾其神乎? 幾者, 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돌처럼 고요히 머물러 움직임이 일기 전 아주 작은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분별의 세계에서 관계의 흐름으로 행을 닦아가는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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