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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4주차 강의 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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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트 작성일21-05-30 13:17 조회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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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언어를 봐야 언어를 알아듣는 게 아니고 언어들을 듣다 보면 거기에서 어떤 언어의 규칙이 읽혀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불교가 고다 공이다 이런 것밖에 모르고 불경을 읽었는데 불경을 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그 규칙들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지한 상태에서 갑자기 깨달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건 아니다. 깨달아 가는 과정과 종착지가 다르지 않다. 과정은 수행이고 그 수행을 다 거치고 나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지를 깨달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깨달아가는 과정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65.

- 철학은 본질에 접근하는게 아니다. 철학이 빠져 있는 문제의 지점을 해체하는 것이다.

랑그의 의미는 다양한 배고픔의 상황을 표현하는 언어중에 ‘나는 배고프다’ 라는 본질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고, 빠롤의 의미는 다양한 형태의 배고픔이 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있을 수 없고 언어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83.

- 우리가 놀이를 해나가면서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논의를 해나가면서 규칙들을 바꾸어 나가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 규칙 자체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글쓰기의 경우도 기본적인 규칙들을 익히고 연습하고 나서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나가지 않고서 대상을 해체하기는 어렵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구조화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체가 가능한 것이다.

 

 

88.

- 부처님이 언어를 대하는 방식은 모든 게 공하다. 어떤 것도 언어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다라는 걸 알고서 언어적으로 의미화 하는 것과 내가 그것을 모른 채로 언어적으로 의미화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태양은 쟁반만 하고 200걸음 떨어져 있다’고만 알고 있을 때와 실제 태양의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한 가지 사실이라도 다양한 조건에서는 상이하게 보일 수 있다고 하는 통찰 속에서 지금 자신이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을 얘기할 뿐이다.

신체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만나는데 어떤 상을 형성하게 되면서 세계가 우리가 부여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 출발점이고 그러한 메카니즘을 통해서 감각이 세계를 있는 것처럼 구축하는 것에 불과하지 어떤 것도 감각에 대응하는 언어가 있다거나 언어에 대응하는 어떤 실제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와 객관적 실체의 대응 관계의 메커니즘을 해체해야만 우리의 언어적 분별로서 세계와 동일시하는 인지 구조를 넘어갈 수가 있다. 그걸 넘어가는 자는 언어를 무한한 용법을 발생시켜가면서 사용할 수가 있다.

 

 

109.

-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면 똑똑하다 생각을 한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뭔가 그 사람이 더 많은 걸 이해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언어를 특권화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을 대단한 것처럼 마법을 걸어 세상을 그 지성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처럼 믿게 한다. 지성이라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견해 같은 것이다. 철학은 언어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에 대한 분별적 인식 이걸 진리로 착각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수업 막바지 질문을 했던 내용은 ‘언어가 말해지기 이전에 행위나 활동이 먼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의사 소통을 위해서 그 행위를 지시하는 언어는 해체될 수 없지 않는가?’ 입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언어와 실체의 지시 대응 관계는 ‘어떤 행위나 활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어화 해야 된다’ 라고 묶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언어로 지시할 수 있는 대상이나 세계에 본질(실체)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식의 메카니즘을 이해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택시의 부름에 마음이 바쁘셨음에도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

강의 후기를 쓰며 녹음본을 듣고 다시 책을 읽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책이 대화록의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혼동되었던 55번의 첫 번째 인용구 “언어의 이름들이 지칭하는 것은 파괴 불가능해야 한다...” 부분은 그의 논리가 아니라 반대하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었음을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논리와 그에 반박하는 논리가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되어 나가기에 혼동되는 부분이 생기네요. 이 점을 유의하며 읽어야 하는데 읽다 보면 어떤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인지 자꾸 헷갈립니다. ㅜㅜ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대충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ㅎ

 

 

*과제

1. 254번까지 읽어오기

2.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것을 주장하고 있구나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에 의해서 균열이 가는 지점을 즐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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