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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2학기 2주차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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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보리 작성일24-05-01 09:01 조회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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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대중지성 2-2 발제 /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 202451/ 진혜린

 

3- 열대, 어디에나 있는 근대의 타자

 

  드디어 레비-스트로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향합니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전 적도의 무풍지대를 통과하게 되는데, 여기서 레비는 그 느낌을 농무,

즉 음울한 안개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시공간. 그래서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두려워지는. 레비는 이 순간을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처져 있는 벽, 문명과 야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으로 인식하면서 

이 벽 앞에서백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백인들은 일단 놀랐습니다.그것은 자신들의 구제(救濟), 습속, 법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인데요

그러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레비는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에서 벌인 도륙은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백인들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을 부정했습니다. 특히 가끔 발견된 식인(食人), 유럽인들이 원주민을 혐오할 수 있게 하는 구실을 

제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주의를 두고 관찰했더라면 그런 식인도 각 부족의 우주론에서 나온 윤리학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거라고 레비는 설명합니다.

 

  두 문명이 처음 만났을 때, 원주민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그래서 원주민들도 수시로 백인들을 잡아들여 물속에 던져 죽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백인도 죽고, 시체가 부패하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인들이 자신들과 동류로서 취급해도 되는 존재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여러 번의 사체 실험 끝에 백인을 이종(異種)의 한 존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구요. 이렇게 

원주민들은 자연과학적 태도로 적극적인 관찰과 실험을했던 반면, 백인들은 미지의 존재를 마주해서도 관찰하고 탐색하기보다 

안개처럼 모호한 인상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레비는 원주민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원주민들의 태도가 훨씬 더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백인들의 두려움을 보면 미지의 저편으로 넘어가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용기인 것 같습니다.

당시 유럽인에겐 열대가 미지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또 다른 장소가 미지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레비는 타자들과 어떻게 만났을까. 뜻밖에 첫발을 내딛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레비는 낯선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상태변화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변하고 있었거든요. 후덥지근한 열기가 항상 입고 있던 모직 옷을 벗게 했고, 도심의 가게들은 공간의 안팎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길이란 공간을 구분해 주는 기준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우데자네이루의 길은 가게나 부엌의 연장이기도 하고, 가축과 이방인이 함께 

말을 섞고 먹을 것을 주고 받는 공동적 공간이었습니다

레비는 나와 남을 구분하는 방식. 나의 것과 남의 것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전혀 다른 정의(定意) 속으로 말려 들어간 것입니다

흔히 여행을 공간이동으로 생각하지만 레비에게 여행은 떠나는 이가 서서히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경험이었습니다

낯선 조건에 맞춰 자기를 자꾸 바꾸어 내야 하는 과정이었지요.

 

  이렇게 달라진 여행자에 의해 이번에는 여행지 자체가 변화합니다. 레비가 보기에 리우데자네이루는 점점 더 유럽화되고 있어서 

그 문화 고유의 광경 같은 것이 없어지는 중이었습니다. 덕분에 레비는 리우데자네이루그 자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조건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에게는 나와 함께 경험되는 공간, 그 장소와 함께 

다시 구성되는 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행이란 여행자와 여행지 둘 다에게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입니다. 레비는 어떤 장소, 어떤 인간도 

그에 대한 규정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로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레비에게는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 

인간의식의 공통적 작동방식같은 것은 없을까? 탐색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이 지구에서의 삶의 근본적 조건이라면

그 변화를 보다 넓게 바라보면서 인간의식의 근원적 모습을 이해하고 싶었던 겁니다.

 

   호모사피엔스가 타자와의 공생에서 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뱉거나 삼키거나!

뱉기의 방식은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을 경계하고, 죄인이나 환자를 격리하며, 정상을 기준으로 비정상을 없애려는 노력 같은 것이니까요

공동체를 국경이나 민족 중심으로 단일화했던 근대 국민국가 시스템 안에서는 비일비재한 모습입니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홀로코스트였구요

레비는 홀로코스트를 인류학적 입장에서, 특별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어떤 민족들에게서나 발견되는 뱉기의 한 종류라고 보았지요.

 

  그렇다면 삼키기란 어떤 것일까요? 삼키기의 대표적인 예는 식인(食人)입니다

한때는 미개한 습속이라며 혐오 섞인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인류학 연구가 보여주듯 식인은 철저히 문화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뉴기니 중앙 산악지역에서 살았던 부족들 사이에서는 식인 풍습이 있었는데, 그들이 가까운 친척의 시신을 먹는 것은 

고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인을 삼키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하는, 즉 멀리 보내기 위한 의례적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것이 치유의 수단이기도 했구요.

 

  레비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합니다. 첫째, 식인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행위라는 것.둘째, 문화적 행위라는 점에서 보면 

인류가 식인의 다양한 방식을 발견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시대에 생명 연장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장기이식, 대리모 출산, 시험관 아기, 수혈 등이 그 예입니다. 타인의 신체 일부를 재활용하거나 

자기 신체를 복제 영속시키려는 노력도 개념적으로 보면 식인이니까요. 그래서 레비는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문화마다 삼키거나 뱉는 두 유형이 정도를 달리하며 섞여 있는데, 표면적인 층위에서는 둘 중 하나가 강세를 띠며 드러날 뿐이라는 겁니다.

 

4- 문명은 소외를 반복한다

 

  여기서는 레비가 <슬픈열대>를 쓰기까지, 20년 동안의 고민을 풀어가는 과정과 결과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신세계! 이렇게 붙여진 이름에는 다 명명자의 이해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구대륙 유럽인들의 눈에는 뭔가 이용할 거리가 많은 천연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1935년 레비는 상파울루에서부터 신세계를 경험합니다. 첫 대면에서부터 이건 아니다~’ 싶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파울루는 유행이 휩쓸고 지나가기에 바빠 불과 몇 주 전에 산 지도도 쓸모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도시였습니다.

상파울루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카의 도시들은 과도한 문명화의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같았지요

이렇듯 신대륙에서 진행되는 문명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레비는 진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보라는 신세계의 황폐화를 이해하기 위해 현미경과 망원경을 들고 관찰하기로 합니다.

 

  레비는 상파울루 대학의 교수였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진보의 기수인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지만 

그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출세에 있었기 때문에 성찰과 사색으로 채워져야 할 학생들의 논문은 온통 유명한 철학자들의 인용문으로 도배되어 있었지요

지식을 받아들여서 자기 안에서 성숙시킬 최소한의 시간도 아까워하며 유럽산()새 것만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타인의 삶을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처럼 생각하게 하는, 이기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레비가 보기에 그런 지식은 쥐면 쥘수록 자기 소외로 이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다음으로 레비는 망원경을 사용했습니다.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상파울루 바깥으로 필드워크를 떠나곤 했는데 외곽에서 본 사태는 더 심각했습니다

소위 기계문명은 열대의 전통을 타락시키기에 바빴거든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였습니다. 어디에나 자동차가 즐비했는데 

열대의 지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도로망 탓에 곳곳에서 발이 묶이기 일쑤였습니다. 비가 오면 진창으로 변해버리는 도로는 큰비라도 내리면

 아예 차들이 지나다닐 수도 없어서 땅이 마를 때까지 차들은 길에 방치되곤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열대 깊숙한 곳까지 깔릴 것이 기대됐던 철로도

전신선도, 풍토와 사람들의 습성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 덕에 곳곳에서 쓸모없이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기회도, 새로운 방식으로 생을 꾸릴 조건도 박탈당한 채 사람과 물건의 흐름이 끊긴 도처에서 

스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파울루 외곽의 개발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면서, 레비는 브라질의 새로운 풍경을 

한 올 한 올 기워가고 있는 주체는 당국이 아니라, 각기 다른 욕망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령, 자본가가 달려들어 오직 돈만 바라보고 도시 하나를 만들려 해도, 그 공간은 그곳을 통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비로소 제 모습을 갖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공간의 형태가 다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불러들이지요. 그런 것을 관찰하면서 레비는 

인디언이든, 브라질 사람이든, 유럽인이든 각기 살아온 문화적 배경과 역사 경험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도시를 이루기 위해 

저마다 힘을 보탤 수 있는 데는, 인류로서의 어떤 공통감각,다시 말해 개인의 욕망이나 취향을 넘어서 인간 행위를 추동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의식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의식에 주목하게 되면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출난 능력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역사적 사건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무수한 방식으로 의미를 낳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자리와 방법인 거지요. 레비에 의하면 인류가 만든 모든 사건은 무의식의 수만 가지 활동에 의해 나타난 복합적인 현상일 뿐

나 바깥에 내가 내 의지로 실현시킬 수 있게끔 덩그러니 놓여 있는 외부환경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개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적 리듬을 공동으로 부여받은 존재이기에 나와 다른 존재 사이, 나와 우주 사이에는 존재론적 구별 같은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런 지혜를 갖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은 뭘까요

바로 자유의지론입니다. 주체가 욕망하고, 주체가 그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의지를 발휘하고, 주체가 외부환경을 조작해서 그 의지를 실현시킨다고 하는 

생각 말이죠. 이 자유의지론에 힘입어 유럽인들은 타인의 삶을 자기 욕망 실현의 도구로 쉽게 상정해 버린 겁니다.

 

  하지만 레비는 인간을 자유의지의 화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화학>을 보면 레비는 신화를 인류의 무의식이 만든 우주론으로 보면서 그 작동 원리를 네 가지 논리로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즉비(卽非)의 논리, 감각의 논리, 전체성의 논리, 변형의 논리입니다.

  우선, ‘즉비의 논리일종의 변증법인데요, ‘내가 내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라스코 동굴벽화에 있는 버드맨은 인간이지만 새이고(인간이 아니고), 

살아있지만(발기하는 중이므로) 죽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자신을 특정 정체성에 국한시키기 보다는 

유동하는 우주적 리듬 속에서 전체와 함께인 나를 인식하려 애썼다는 증거지요.

  두 번째, ‘감각의 논리구체성의 논리입니다. 감각은 혼자 만들어 낼 수 없지요. 원시인들의 이야기에 뜨겁고 찬 것, 달고 쓴 것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개개인이 자신이 접촉하고 있는 세상의 무수한 존재들과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전체성의 논리로 인간은 우주적 차원에 놓여 있는 나의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변형의 논리는 인간은 우주적 리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최적화된 형태를 모색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옳고 그르다고 믿었던 바를 우주의 리듬을 기준으로 계속 다르게 바꿔보면서 생각하기를 거듭한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레비는 

인류의 근원적 무의식을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곧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류적 지혜를 억압하는 자기 중심주의를 경계했지요.

 

  레비는 신대륙의 타락을 그저 서유럽문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습니다

인류사를 보다 광활한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인도 문명을 유럽 문명과 비교할 하나의 축으로 삼습니다.

 

  1939년 남아메리카를 떠난 뒤 파키스탄과 인도 등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목격한 고도(古都)와 신도(新都)를 비교하면서 

레비가 문명화 과정의 핵심 문제로 주목한 것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카스트 제도는 문명의 근원적 모델이었으니까요

카스트 제도는 직업에 따라 인간을 배분한 신분제입니다. 사실 어떤 문명이건 인구 배분의 문제는 늘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각 문명에게 주어진 사회적 공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사람과 동물의 자리를 잘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레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그런 조직화 기술의 최후 형태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스트는 비참했습니다. 인간을 한낱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났을까요

과도한 문명화가 낳은대지로부터의 소외때문입니다.

 

  인도에서는 5천 년 또는 1만 년 전부터 농업이나 수공업이 진행된 탓에 인간의 생활기반 자체가 사라지고(땔감 부족, 비료 오용, 토지유실 등) 말았습니다

서로 공생하며 살자고 만든 문명 시스템은 과도한 인구 증가로 어느새 사람들을 가두는 족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잠깐 생각해 볼까요? 불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요

국가적 시스템이 인간종 중 일부를 인간이 아닌 것으로 지정하고 그 시스템 밖으로 내치려 했었던. 레비는 그 극악한 반인간주의의 기원을 

문명화의 과정 속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끝간 데까지 내달리고야 마는 인간 지성의 무능력을 깊이 한탄합니다.

그렇다면 레비는 이런 문명화의 슬픔으로부터 어떤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요?

 

  대지와 인간의 비참을 다룬 이 4부의 마지막에서 그는 해변에서 혼자 기도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어떤 문명에 속해 있건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원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찰을 갈구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곧 기도가 되지요

레비는 홀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속에 신을 모시는 사람, 자기 원칙과 윤리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우주적 차원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속악한 문명화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5- 차이를 욕망하는 야생의 과학

 

  레비는 여기에서 자신이 바라본 구체적인 열대의 모습을 얘기합니다

처음 열대 우림으로 들어가면서는 순수한 야만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만인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스페인의 식민지 침탈에 열대 우림의 많은 부족들은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레비는 그들을 보며 아주 잠깐은 가엾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점점 다르게 보게 되지요.

 

  한때 정부는 문명생활에 적응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부족민들에게 제공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정부에서 준 침대를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고, 주거용 집을 두고 땅바닥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쓸모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레비는 두 가지 점에서 당황했습니다. 하나는 이런 모습이 20세기 초반 열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 하나의 사회학적 현상을 보여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제국주의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원주민들의 여유와 재치 때문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습속과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생활방식 사이에서 삶의 양식을 이리저리 뜯어 맞춰 보았습니다

일종의 브리콜라주이지요. 레비는 이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방식을 보면서 인간의 창의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어떤 습속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자신의 관점이 얼마나 부분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계속 의식하면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 삶의 전체적 인상을 깊이 있게 묘사하기 위해 애씁니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레비는 어떤 방식으로 열대를 통과했을까요?

그들 삶을 흔들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어가려는 노력을 진득하게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그들 문화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원주민들의 물건을 수집하기 위해 거래를 시도해 보았는데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서너 살쯤 된 어린 소녀와 등가교환에 성공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 마을에서 레비가 갖게 될 위치를 말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을 안에서 먹고 살 수는 있지만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는 없다는 사람들의 표현이었던 거죠. 그들에게 레비는 이방인 즉 타자였습니다.

 

  또 레비는 원주민들이 좋아하는 애벌레 코루를 관찰해 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백인들이 하도 비웃었기 때문에 

원주민 누구도 레비 앞에서 코루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방법이 없자 레비는 아무도 살지 않는 부락에서 

혼자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원주민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저는 정말 코루가 먹고 싶어요.” 그러자 이 사람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레비에게 코루를 보여주며 먹기를 기다립니다. , 마이 갓! 레비도 벌레를 혐오하는 유럽의 백인입니다. 하지만 숲의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자신이 몸으로 익힌 생각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레비는 진실로 열대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원래의 란 없으니까요.

  

  레비는 코루 사건을 두고 자신에게 일어난 세례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코루 의식은 잘 따져보면 아픈 원주민의 호의 덕에 가능했습니다. 아픈 원주민은 코루를 먹고 싶다는 한 이방인의 청을, 대가 없이 들어 주었구요.

레비에게 코루를 먹게 해 주어서 그에게 돌아올 것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냈습니다.

조건없는 선의로써, 도울 수 있으면 돕겠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레비는 교환(등가)관계와 증여관계를 대비함으로써 우리가 타자, 타문화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선의(증여)에 기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는 거지요. 이후 레비는인류의 정신 과정자체를

증여에 의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레비는 한 인간이든 사회든 체계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문화를 지탱하는 사고의 틀은 그 사회 속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매번 갱신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집단 전체가 사고의 틀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레비는 이 대목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관념들의 조합에 의해 이런저런 사고의 형태가 출현하기 때문에, 열대 사람도 유럽 사람도 

제 나름으로 관념의 조합을 계속 하고있는 중일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 조합 방식에 따라 세계관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윤리를 구성해 가는 겁니다

( 므바야족의 문신관습인 안면도식과 영아살해 관습 158)

 

  레비는 므바야족과 카두베오족을 관찰하면서 이들의 문화가 정교한 이분법들의 연쇄와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한 뒤

열대의 사고가 어떻게 그리고 왜?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지<야생의 사고>에서 설명합니다.

 

  첫째, 야생의 사고는 구분의 논리. 여기서 야생의 사고란 사고의 근원적 기술이자 이분법의 활용입니다.

이런 사고가 점진적으로 거대한 형식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토테미즘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 문화의 논리를 동물 종을 기호로 삼아 꾸미는 거죠.

이 점은 동화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화에 등장하는 인간, 개구리, 마녀, 늑대 등은 일차적으로 우주 안의 다양한 존재들을 상징하는 

기호이니까요.

이렇게 동물종을 통해 우주안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상들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은 그들 각자의 생태와 역할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자연에 곰과 개구리가 있는 것은 곰과 개구리의 다름이 필요해서이겠지요

우주는 이런 종적 차이들이 좋게 혹은 나쁘게 합치를 이루는 모습들로 전개됩니다. 차이나는 항들의 복합적 조합이지요. 전체적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이분화, 여름과 겨울의 이분화. 그 안에서 방위의 이분화, 색의 이분화, 식물 종의 이분화 등으로 나타납니다

관념들은 이런 축들 안에서 다시 정교하게 배분되는데, 이들 모두는 거대한 종합(자연 또는 우주)을 향해 움직이지요.

  

   둘째, 이분법은 모순을 긍정한다. 이분법을 통한 거대한 종합? 서양 변증법의 기본 논리는 정반합(正反合)으로, 이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의 

이항대립에서 출발합니다. ‘는 늘 나 아닌 것에 의해 정의되지요. 그리고 이런 이항대립을 모순 극복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모순을 해결해 줄 어떤 지평이 필요합니다. 나도 나 아닌 것도 그 자체로 긍정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합의 길이 닦입니다.

 

  그러나 레비의 설명은 이것과 다릅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나 아닌 것은 부정적으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연못에 사는 개구리와 연꽃은 

비교의 공통척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서 지양되어야 할 공통항은 없는거죠. 열대의 이분법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출발한 사고방식입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먹을 대상인지, 내가 먹힐 대상인지는 구분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원주민들의 시야는 광대합니다

자연 안에서는 관계가 둘로만 한정되지 않거든요. 거대한 생멸의 순환 아래 모든 관계는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다는 겁니다.

 ‘이라는 단순한 대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혹 한 국면에서 적대적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시야를 넓혀 보면 

결과적으로는 순환의 리듬을 만들게 되니까요.

 

  결국 야생의 사고란 우주적 차원의 관계성을 통찰하려는 시도라 하겠습니다. 나와 다른 것들에 끊임없는 주의를 두면서

어떻게 그것들과 생기로운 순환적 관계를 이룰 것인가? 바로 여기에 야생의 사고의 위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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