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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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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로보기 작성일16-03-13 18:59 조회2,4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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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3/낭스1학기 4번째 수업 후기/이흥선


1교시는 합(合)과 충(冲)은 사주의 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에 대한 강의는 박소영 최소임 샘이 했다. 가장 먼저 나아감과 물러섬의 때를 알아야 하는 대운에 대해 이야기 했다. 대운은「나운설」에 따르면 팔자가 평생을 함께 가는 원형이라면 대운은 걸어가는 ‘시절인연’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합(合), 충(冲)은 우주변화를 설명하는 오행의 상생상극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국면들이다. 합(合)은 두 가지의 순일한 각각의 오행이 합하여 생성되는 기운이다. 충(冲)은 원래의 기운을 억제하고 제어하는 기운이다. 두 가지의 기운이 서로 부딪쳐 금이 가고 깨지지만 성격이 변하지 않지만 제어의 기운이 충이다. 천간에서는 정신적인 면에서 삶의 방향성이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합의 작용이 크다고 보는 반면 지지는 현실태의 변화와 변동을 의미하는 충의 작용이 크다고 본다.


2교시는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는 조별 토론으로 2장 욕망의 글쓰기, 글쓰기의 욕망에서 글쓰기의 모든 어려움 -「이언」의 세계, 어크로스 더 유닛버스-첫 번째 도주선「일난」, 애정만세-두 번째 어려움「삼난」, 낮은 목소리들 -세 번째 어려움「삼난」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우리 조에서 각자 암송한 부분을 세 문장으로 적어 오기로 했는데, 각자 세 문장은 아니지만 적어온 부분을 읽고 토론을 했다.

이옥의 주장은 나는 내 글을 쓰겠노라 내가 본 것을 내게 일어난 일들은 나의 언어로 나만의 글을 쓰겠노라고. 이옥이 말하는 세 가지 어려움 그것은 곧 그의 글쓰기가 기존의 영토로 부터 달아나는 세 가지 도주선이다. 첫 번째 도주선 자아에 붙들리지 않기. 그가 소유한 감정, 의식, 의무가 만들어낸 단단한 돌덩이, 이모든 것을 잃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모든 것과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도주선. 이념으로부터 달아나기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건 순수한 이념이 아니라 오물과 피로 얼룩진 현실, 번뇌와 칠정으로 요동치는 리얼한 마음자리다. 세 번째 도주선 지배적 언어로부터 달아나기. 소수 적 언어 사용하기 누구난 자신이 속한 시대의 코드를 완전히 버리고 제로 상태에서 시작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글쓰기는 그토록 어렵다.


3교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장금 샘의 ‘문장, 충만한 삶을 위한 길’이란 제목으로 소동파강의가 있었다.

모든 사물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하여 감응하는 신체가 곧 소동파가 추구하는 감응 세계다. 즉 사물의 차이만큼 나를 해체하여 다른 존재가 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에 성공할 때 사물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다. 물화가 되려면 대나무의 본성을 파악해야 한다. 본성을 포착하는 순간 자신을 버리고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 소식은 만물의 모든 본성을 꿰뚫고자 했다. 소식의 위대함은 본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나온다.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감응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는 것은 사욕 때문이라고(?) 만물의 이치를 관찰하고 그 이치를 토대로 결단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내안의 사욕을 해체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소식은 무한대로 펼쳐진 천지의 선물을 온 몸으로 받아 들어서 지금 주어지 최고의 순간을 누리라고 말한다. 또한 소식은 유학자였지만 유불도 그 자체를 진정으로 긍정했다. 왜냐? 삶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사상은 삶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루해도 지금 있는 사물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 유불도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뒤얽힌 생각을 전부 붓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식은 말한다. 소식은 글을 쓰면서 내 안의 얽히고 막힌 것을 풀고 뚫기 때문이다. 근본과 본성을 생각하는 사유로 흔들리는 자신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보았던 소식, 매순간 흔들리는 간극을 읽고 쓰고 균형 잡으며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바로 문장의 힘이었으리라.

천지만물의 이치로 세상을 보는데 어찌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매 순간 사물의 이치와 본성을 생각하면서 살아간 소식. 그런 삶의 자세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듯 후련한 글을 쓰게 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삶. 글을 쓰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소식. 그러니 어찌 글을 쓰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한사람 더 모든 천지만물의 본성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이옥.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문장으로 표현했던 이옥. 이옥도 소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 두 문장가야 말로 삶의 상생상극의 매트릭스인 충과 합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도를 이룩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나 어려움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 현장에서 다른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이들. 그렇기 때문에 삶이 문장이었고 문장이 삶이될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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