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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차 수업후기-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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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샘 작성일16-04-03 00:33 조회1,9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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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스쿨 7주차 후기/ 변은영/ 2016.4.2.
 
1교시-의역학 교실
 
<수세보원에서 영토의 확장을 고민하다>
동의수세보원을 만나는 두 번째 시간이다. 중국의 책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수세보원’의 목숨 수(=壽)자는 선비와 장인, 농부라는 마디를 일컫는다. 이는 곧 각자의 마디대로의 역할이 있음을 뜻한다. 유학에서는 명을 다한다는 것이 천수를 다한다는 것과 이어진다. 이는 단지 오래사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이 한 글자로도 와닿는다. 꽃은 꽃의 역할이 있듯 각자에게 품부된 명이 있다. 이를 탐구하는 것이 유학인데 수세보원은 이 명이 체질에 따라 나누어진다고 본 것이다. 헌데 이제마는 자신의 뜻은 100년 후에 알아줄 거라고 하며 돌아가셨다는데 사실 체질의학이 널리 전파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을 알아보겠다고 하는 시대가 열렸으니 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수세보원에는 체질마다 그 장부의 기울기로 인한 오장육부의 순환시스템에 따른 천기, 인사, 지, 행을 어찌 확충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체질 이야기를 듣다보면 심리학적 접근과 닮은 듯도 하지만 몸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면에서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20년 가까이를 소양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새 팔체질 한의원 두 곳 모두 태양인에 해당하는 금체질이라고 하며 침을 맞고 있다. 어찌되었든 나는 절대 음인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고자 장금쌤의 설명을 따라가 보는데 용어가 어렵다. 본성의 작동이라는 천시, 세회, 인륜, 지방 이런 말들이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다. 암튼 본성이 하늘의 원리라면 초코파이 ‘정’은 인간의 일이다. 본성이 선천으로 품부된 것이라면 인사(人事)인 교우, 사무, 거처, 당여는 인간이 노력하면 비교적 갖추기 어렵지 않은 덕목들이다.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양인이라면 변화를 아는 데는 능통하고[천시], 노력하면 세상 사람들과 모이는 것[교우]를 잘한다는 것이다. 아닌 것 같다고? ^^ 기다려보시라. 다음시간도 있고 탐구하고 따져볼 것들이 많은 바다이니까. 여기는 애노희락이 넘실대는 곳인데 이것이 그저 슬프고 화나고 기쁘고 즐겁다는 감정표현의 차원만은 아니다. 나의 행실의 여러 갈래길을 알려주며 내가 명을 잘 드러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하고 이상한 홈을 파고 있는지도 더불어 알려줄 것이다.
나는 음인은 절대 아니라고 앞전에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가 함정이었다. 딱걸렸어. 바로 내가 뚫고 가야할 부분이란다. 맙소사. ‘나는 절대 저건 안 ’돼 하는 걸 해야 한다는 이야기? 같은 양인이니 태양인이 소양의 지대에 닿긴 했다. 그러고 나서 음인의 세계는 요원하니 굳이 갈 필요 없이 이대로 살래 이게 안 된다는 것이다. 지혜를 밝혀 태음의 덕의 지대도 밟고, 행위를 통해 소음의 지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라는 것. 그래서 다음 주 이야기가 기대되면서도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자기영토를 떠나지 않으려는 이 고집이 가고싶지 않는 그 길이 무엘까. 아니, 좀 아껴둔 그 길은 어떨까.
 
2교시-낭송교실
 
이옥을 만나는 시간도 막바지에 접어든다. 이옥은 채운쌤을 다리로 해서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너무 많이 던진다. 그 중 하나의 공을 잡아서 내안에 계속 던지고 던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에세이 두둥~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범위 안에서 마음에 드는 문단을 적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적는 쪽글쓰기를 해봤다. 인간들이 인간중심주의에 갇힌 것처럼 자신의 시야에 국한된 것을 돌아보는 글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옥이 미물에 닿아 이야기하고픈 것이 단지 입장 바꿔 생각해봐,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어라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더 이야기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상 패스. 나는 쪽글에 여기저기 부유하며 사물을 포착하는 이옥을 배우고자 적어보았다.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서 사물에 닿으라는 외침 같은걸 루 들렸기 때문이다. 뭐라 뭐라 풀었지만 닿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아직은 질문의 첫 단계지 않은가. 내글은 시간상 다음 시간에 보기로 했다. 이옥의 흡연자에 대한 우정의 서와 비슷한 글도 있었다. 이 문제는 권력의 작동방식과 함께 다루어 이야기해보았다. 왜 하필 흡연을 마녀사냥 할까. 인간의 생명연장 욕망을 부추기는 산업이 가장 각광 받는 이 시대에 딱 걸린 거라는 생각을 나누어 보았다. 말하다보니 나 역시 우정의 서를 날리고 싶어졌다.
아~ 2시간으로는 부족하다. 한 챕터가 책 한권과 같아서(나만 이리 생각하는 건 아니죠잉) 구석구석 이야기할 요소가 많기에 그렇다. 부족한 듯 하게 밥을 먹어야 좋듯 아쉬운 듯 다음을 기약하자.
 
 
3교시-글쓰기 교실
 
<용감한 도련님>
책을 안 읽는 편이지만 특히 소설은 더 안 읽게 된다. 읽는 시간에 비해 건질게 없다고 생각해서다. 또 이렇게 안읽다보니 점점 등장인물을 공간적으로 배치하지 못하고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소설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재미를 느낄 새가 없다.
지지난 주 루쉰을 읽을 때는 2년 전 읽었던 것인데도 읽히지 않았다. 지난주는 조금 나아졌지만 읽느라 바쁘기만 했다. ‘내가 그럼 그렇지’ 하고 있었는데 소세키의 <도련님>은 중간에 저녁잠 시간을 빼면 한 번에 읽은 셈이다. 지금 방학이라면 소세키 전집이라도 사서 읽을 기세다. 길쌤이 미리 언지를 준대로 도련님이라는 캐릭터를 따라가며 읽으니, 희한한 놈(왠지 끌리자녀)이라는 생각에다가 친밀감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좀 철없어 보이는 주인공이 길쌤의 독후감이라는 강의의 필터를 지나자 완전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는 게 아닌가. 난 뭘 읽은 거지. 그냥 어떤 초임 교사의 좌충우돌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개인을 국가나 집단에 예속시키려는 시대적 흐름에 포획되지 않는 한 인간의 용감한 생활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이를 속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함을 밝히려고 끝까지 노력했던 용감한 ‘도련님’ 말이다. 지금의 시선에서는 조직에 적응 못하고 철밥통을 그만두는 무모한 삶이다. 무모하지 않기 위해서 너무 앞뒤를 재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게 오히려 자신의 생명성에는 더 무모한 게 아닐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는 일이 없다. 돈으로 꼬시려고 하는 금권의 그물망도 쓰윽 빠져나간다. 그렇다고 돈을 얕잡아 보고 고고하게 살려는 것도 아니다. 언제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몸적 신호에 충실한 것뿐이다. 욕망대로 먹고 말하고 행동한다. 한마디로 복잡하지 않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교사신분은 이래야 한다. 어른은 이래야 한다. 그런 것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학교가 국가가 포섭하기 힘든 인간형, 이름하여 ‘도련님’이다. 전근대에도 근대에도 속하지 않는 일반명사 도련님, 고유명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내 안의 도련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까지 생각이 이른다. 루쉰의 ‘아큐’가 그랬던 것처럼~
고백하자면 난 학생들이 선생님을 골려먹는다고 칠판에 낙서를 남기는 게 단지 시골아이들의 천진함이라고 생각했다. 메뚜기는 좀 장난이 심하다 했는데 그렇게만 여길게 아니었다. 시골아이들에 대한 표상이 있으니 그 대목이 제대로 읽혀지지 않은 것이다. 규율화된 아이들이었다니. 하긴 규율화된 사람이 보기에 그렇지 못한 이는 괴롭혀 주고 싶게 마련이다. 나라도 자유로운 인간에게 어떤 족쇄를 채워서 나처럼 규율화시키고 싶어 안달했을 것 같다. 이는 ‘인간은 어때야 해’라는 규율에 타자를 끌어들이고 싶은 욕망의 그늘이 아닐지. 얼마나 많은 규율로 나를, 타자를 제단함으로 생명력을 위축시켰을까. 그러할 때 도련님이 옆에 있다면 아니 내안의 도련님이 깨어난다면 뭐라고 이야기 할까. 그저 씨익 웃으며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같이 메밀국수나 먹으러 가자고 할 것 같다. 그리고 소설좀 읽으라고 옆구리를 찌를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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