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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에세이 후기 - 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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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씨앗 작성일16-07-07 00:24 조회1,8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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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이번 글의 약점은 언어가 정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하기 위해 고민을 한 흔적은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언어가 글을 깎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왜 우리가 성인과 같아질 것을 요구하는가라는 질문이 정말 맹자의 질문인가? 이런 말들을 살리려면 뒤에서 맹자의 성인 되기라는 지점을 정확히 풀어내야 하는데 뒤에서 풀어낼 때 앞에서 던진 질문을 잘 못 받아냈다. 순임금과 같아지라고 한 게 맹자가 순임금과 똑같은 행동을 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각자가 실천하는 문제이다. 그 분별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인간이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성인과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그건 아니다. 맹자가 인간을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이유는 인간은 인의예지를 갖고 있고 사단에 의해 실마리라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 성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부분들이 본인이 애써서 만들어 온 부분을 깎아 먹는 것이다.
성인의 선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실천이 되고, 선이라는 것이 개인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같은 장 속에서 공효로써 드러난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는데 이 해석들이 더 펼쳐지지 않았다. 장점을 못 살리고 단점은 장점을 깎아 먹었다.
효제가 순임금에게 중요했던 것은, 논어에서 두 번째 구절이 효제가 위인지본이라고 해서 인을 행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순임금에게서 효제를 발견했을 때 이것은 맹자가 보기에는 유가적 전통에서의 인이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와 동생에게 극진한데 이것은 효제를 행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유가적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얘기인데 너무 비틀어서 증명하려고 했다. 이것은 왜 그래야 하나 문제를 제기하고 증명하는 순간에 너무 많은 말들이 소비되고 소비되는 중에 한 마디라도 옆으로 비껴나면 공들였던 것을 무화시켜버린다.
 
정지원
나의 코멘트는 들어가는데 나오는 게 없고 제목도 없고 글의 형식을 파괴했다. 이유는 급하고 잘 안 되었던 것이다. 글에서는 주제가 순임금의 효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모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맹자를 읽고 있는 거고, 맹자가 순을 어떻게 효자로 만들었는가. 라고 하는 지점들과 관련이 있는 거였다. 맹자의 효도됨이라고 하는 효의 형식적인 것이 있고 즉 아버지가 살인을 하고 와도 천하를 버려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있고, 동생과 함께 자기를 죽이려고 해도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는 그 안에는 맹자가 효라고 하는 성인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반구저기라고 하심으로서의 순을 이야기 하는 지점들이 있다. 순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자기를 돌이켜서 이 관계들을 계속 풀어나가는 이 지점들이 있다.
근데 여기서 순을 통해 효를 살펴보고 싶어 하고, 그렇게 문제를 설정하고 있는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꾸 아버지를 바꾸려했다. 아버지의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이지점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밉고 그럴 때에. 그럼 여기서 순처럼 한다는 것은, 순처럼은 못되더라도 순처럼 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 라고 하는 지점에서 고민들이 더 갔으면 해결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맹자의 물음위에서 뭘 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은 확 들어가는 엄마에게는 내가 자발성을 보이면서 아버지한테는 왜 자발성을 보이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원망과,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괴롭혔던 아버지에 대한 이상이라고 하는 프레임 밖을 지금 못 떠나는 것이었다고 문샘은 말씀하셨다.
이거는 내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어떤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손 치더라도.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하던 뭐하던 그런 결론의 문제가 아니고 글이 작동될 때에는 맹자를 통해서 글을 보는 거니까, 또는 맹자적인 또는 순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살인을 해온 아버지도 지금 숨겨주겠다는 순을 배우겠다고 하는 마음인 나는 그런 아버지를 그러니까 이거는 맹자프레임을 아직은 내가 못 다룬 거였다.
이거는 공부가 성실하지 못했고 그 지점들이 일차적인 것 같았다. 글을 쓴다고 하는 게 우리가 재주를 가지고 또 한편의 글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거는 어쨌든 뭐 그 재주는 뭐 글이 아니라 뭐든 못하겠냐고. 근데 여기에서 글을 써가지고 뭔가를 할 때에는 자기의 글재주를 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공부를 해온 과정들을 펴 보이는 거다. 내 공부를 자랑하기 위한 게 아니고 내가 이번학기에 이렇게 공부를 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같이 공부한 사람한테 이제 펜을 까주는 것. 그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내 공부의 적나라하게 우리가 집고하는 것은 그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글이 완성이 됐든 안 됐든. 근데 잘 봐야 된다는 거. 이게 단지 내가 지금 글이 완성이 되지 않았고, 시간이 없어서고, 이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이 공부에 내가 어떤 불성실함이 있었나 하는 지점까지가 글을 통해서 성찰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멘트였다.
 
이흥선
예전 글 보다는 문장이 편안해진 느낌이 든다는 말을 하셨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형식적인 균형을 잃고 있는 글이다. 전략적으로 도올이 이야기 하는 맹자를 가지고 글을 이야기 하면서, 스피노자를 쓴 이수영 선생님의 글을 가지고 스피노자를 했다면 하는 글이다. 글 너머의 맹자와 글 너머의 스피노자를 말한다면 차라리 재미있는 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가 쓰고 싶은 개념과 쓰고 싶은 말들만을 찾은 글이다. 자기 안에서 필요할 문제들을 맹자가 풀어줬어야 하는 데 그런 부분들이 부족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는 것 같은 부분이 발견되는 글이다. 그런 지점이 균형적으로 망친 것 같다.
아이들 이야기로 발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가능한데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없는 글이다. 이야기를 보면서 겪었을 때 어떻게 내 고민을 작동시킬 것인가? 라고 하는 지점에서 계몽주의자가 된 글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내 공부가 되는 지점을 풀어야 공부와 접속시키는 부분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자기 개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정작 자기는 빠져있는 글로 계몽주의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글이 되었다.
맹자나 스피노자를 공부하다 보면 공통점을 찾아서 연결해야 하는 경우에 말의 표면적인 부분만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글이 얕아진다. 표면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면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오히려 겉이 비슷한 부분은 찾는 것은 비열해 질수 있는 글이 된다. 예를 들면 서원이와 범석이를 동한 지점이 아니라 화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을 찾으면, 맹자와 스피노자 말하는 지혜가 관계들을 바꾸게 되는 도움이 된다. 표면적인 말의 일관성이나 말들이 겹치는 부분에서 비교하거나 하는 부분이 되면 전략적으로 편안한 글이 될 수 없다. 글이 보이더라도 이런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밑으로 집어넣어야지 겉으로 등장하게 되면 오히려 날이 서게 만든다.
 
안은숙
왜 맹자를 해설하고 있지? 내 생각과 맞으면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지만 배경을 해설해 주는 느낌이 든다. 마치 논술 교재 느낌, 왜 이글을 이렇게 썼을까? 생쌀 같은 느낌이 든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놓친 것 같다. 글쓰기의 마음을 어디에 뒀는지 궁금하다. 겉돌고 있는 느낌이다. 뭔가 아주 맹자가 정말 싫은데 억지로 쓴 것 같다. 완전 핀트가 어긋났다. 물음도 없고, 물음 전개도 이상하다. 맹자가 없다. 공부하는 자신의 마음이 없어 보인다. 공부하던지 방학 중에 고민해 봐야 한다.
 
박수진
내가 받은 코멘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한 스텝 더 나가기이다. ‘내 공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자기 공부를 밀 때까지 가봐야 자기 한계를 알게 된다. 그래야 내 공부를 알 수 있다. 그 벽을 끝까지 밀어보지 않으면 완벽한 해법을 추리지는 못하지만 그 다음 스텝까지 취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의 글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디로 나가야 되는지를 봐야 한다.’
공부에 스스로 한계를 그어놓고 가는 건, 스스로 속도를 정해버려 몇 CC 가 되는지 모르는 자동차와 같은 걸까? 늘 적당히 담는 것으로 만족해 어디까지 담을 수 있는지 모르는 컵과 같은 것일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 글을 쓰기 전에 맹자의 이야기를 실천하려고 했을 때, 스스로 이 정도 했으면 이번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한 발을 더 나가는 것이 참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여기까지 정해놓는 것이 아니라 가는 만큼 가보는 것이 실은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치 내 삶에서 어떤 부분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면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지 말고 한발 더 나가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렸다.
또 에세이 속에서 내가 찾은 실천의 단어가 맹자와 더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나 글은 관계 속에 있다. 말과 글은 다른 사람의 이해와 설득이 전제가 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나의 생각을 이야기한들 큰 줄기 속에서 설명하지 못하면 지엽적인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역시 한 스텝 더 나아가야 한다. 텍스트를 더 꼼꼼히 읽고 그 맥락을 이해해야 하며, 작가를 이해해야 한다.
 
전미령
결론적으로 이 글은 아무 것도 안 쓴 것이다 이런 글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문제의식을 못 집어낸 글이다. ‘글을 써 보려고 했는데도(전제) 무엇을 써야 할지 물음도 안 생기고 아무 문제의식이 없어서 그냥 강의 내용을 요약해 왔다라고 인정하는 거기서 시작하면 된다. 만약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들은 것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덮으려고 하거나 꾸미려고 하면서 아는 것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공부가 나쁜 방식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본인이 강의를 재미있게 들었다고 했는데도 이처럼 아무 근거를 못 찾는 글을 쓴다는 것은 문제의식을 못 찾거나 안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어서 코멘트를 해 줄 수가 없다. 이런 글을 쓴 이유에 대해 위악적이든 위선적이든 그 지점을 안 보려 하면 시발점에도 안 서게 된다. 그리하면 이런 문제는 다음 학기에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안 보려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못 한 것이라고 대답하는 그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최소임
맹자를 만나기 가 느껴지지 않는다. 맹자를 읽지 않아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이다. 맹자의 에세이가 되려면 에세이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맹자는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가? 에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가?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맹자를 통해 이 사건을 만난 것이 아니라 평소의 자신을 맹자를 통해 확인한 것에 머물렀다. 이제 에세이를 시작해야할 지점에 서있다. 에세이를 썼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일반적인 언어로 두루뭉술하게 썼다. 텍스트에서 본인이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끌어낸 말이어야 힘을 받고 자신의 윤리적인 실천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텍스트를 읽고 거기에서 받은 지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어야 본인의 에세이가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많이 놓치다보니 결론도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마무리가 되어 글이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호연지기부분도 뜬금없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글이 중간에 많이 튀고 있다. 또 본 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는 말이다. 맹자는 내외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자의 시선이다. 에세이에서는 일반적인 말을 그냥 쓰지 말고 텍스트에 준해서 하나씩 하나씩 짚어보면서 다듬고 벼려야한다. 그것이 에세이를 통해서 해야 하는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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