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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에세이 후기-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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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샘 작성일16-07-08 09:01 조회1,9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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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낭송스쿨 2학기 4조 에세이 후기

 

최혜정

* 제목이랑 전체 줄거리 맥락이 맞질 않다.

-맹자가 지언 할 수 있는 배경이나 마음을 중심으로 써야하는데 나는 나의 주변과 내 표면으로 나타나는 말만을 중심으로 에세이를 기술하여 오류가 나타났다. 더불어 내 마음의 상태도 탐색해야 한다.

* ‘마무리하면서’ 부분에 있는 “맹자님이 지언을 잘하는 데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일 것이다.”라는 부분을 더 고민했어야 한다.

-맹자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맹자』안에서 질문하고 찾아보아야 하는 지점이다.

더불어 양혜왕, 제선왕 등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파악해서 덧붙여줘야 이 문장과 이 글 전체가 힘을 받을 수 있다. 『맹자』 속에서 철저히 그 마음을 물어보고 찾아보아야 한다.


권현숙

* 맹자텍스트에 대한 독해를 점검 해봐야 한다. 한번쯤 더 시간을 들여서 맹자에서 언어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들여다 봐야한다.

* 본론에서는 사단과 인의예지, 희노애락과 감정을 거의 구분안하고 썼다. 감정을 다스리는 문제와 섞어버려서 맹자의 인의예지를 감정을 조절하는 문제처럼 되어버렸다.

* 결론에서는 쓰고자 하는 얘기를 정확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의식이 약한 것일 수도 있고,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덜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고자 하는 말이 계속 미끄러지면서 이미지로만 접근하고 있다.

- 2학기 내내 맹자라는 텍스트에 대한 전제가 있었다. 읽기가 어렵고 이해도 잘 안 되었다. 용어도 낯설고, 너무 많고... 시대적 배경도 낮설고....등등의 언어에 갇혀서 한발자국도 못나갔다. 마음을 내기도 전에 너무 어렵다는 전제로 마음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시간에 샘이 해주시는 얘기들을 통해서 좀 더 다가가 보려했지만 나의 문제에 연결시키지 못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있지만 나는 왜 텍스트를 접할 때 마다 이런 부정적인 전제로 나를 막고 있는 것일까? 책을 접할 때의 내 마음부터 다시 다잡아야 할 것 같다.


서은경

이번 글은 망설임만 있는 글이란다. 대저 “志는 氣의 통솔자이다”의 지는 자신의 의지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비젼 같은 것이라는 것. 그것이 나를 끌고 간다고 할 수 있다. 그 의지로 인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물리적인 배치가 바뀐다는 것. 결국 나의 망설임 즉,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이것저것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맹자를 통해서 망설이는 마음을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망설이는 마음만 시인한 글이라는 것. 따라서 결론이 망설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에세이가 자신의 문제를 책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공부의 장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맹자의 글만 가져와 설명했다는 것과, 맹자를 통해서 배움이 일어난 것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알 듯 모를 듯 확실한 구분이 안 된다.


변은영

2학기는 <에티카>와 <맹자>를 진하게 만난 시간이었다. 물론 그 농도만큼의 자국이 새겨졌느냐는 물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그 대답은 에세이로 나타나게 마련이니까. 얄팍하게 만났으면 그만큼, 그들을 오해했으면 그만큼 그렇게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얄팍하게나마 <맹자>의 진심장의 첫 구절 ‘마음을 다한다’를 모티브로 시작해서 얽히고 설켜있는 맹자가 하고픈 말의 실타래를 추적하는 과정이 나름 재밌었다. 어디로 추적해도 맹자의 군자되기와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군자되기’라는 것이 감당이 안 돼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 뭘까 라는 질문과 일상의 사건을 엮어 보았다. 마음장이라는 것이 결국 실천의 현장이며 그곳은 인의예지라는 본성이 사단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장이다. 이곳이 내가 머물고 싸워야 하는 지점이라는 말이다. 단지 마음을 관조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이번 에세이장 역시 그랬다. 여러 차례 에세이를 발표했지만 처음으로 에세이 발표장이 공부의 장이라는 말이 다가왔다. 맹자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도 되고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대목이나 잘못 생각한 부분도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마음이라는 실천장처럼 글이라는 장에 머물러 질문하고 답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과물로서 글을 발표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 장을 맘껏 즐기는 경지는 아니지만 다른 글들이 좀 더 내게 가까워졌고 글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어디든 이렇게 피하지 말고 뛰어들다보면 마음의 근육도 서서히 탄탄해지리라 믿는다.

맹자 강의 중반쯤 “시중(時中)”을 듣고 나서 일상의 습관이 바뀌었다. 그래서 이걸 쓰자고 잡아놓았다. 나의 일상의 긴장들이 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헌데 맹자세미나 입발제 준비를 하면서 “진심(盡心)”이라는 말뜻과 드라마의 인상 깊은 대목에 울림이 있었던 연유를 추적해보고 싶어졌다. 워낙 행동형이라 뛰면서 생각하는 신체라 뭐든 그냥 해보면 되겠지 무모함을 발휘했던 것. 역시나 맹자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코멘트를 들었다. 한발 더 들어갔어야 했다고. 질문이 생길 때 그것을 차단하거나 쉬운 길, 기존의 생각들을 반복하는 신체는 분명 마음의 근육과도 연관이 일을 터이다. 그러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기존의 에세이 코멘트-이번에도 마찬가지지만-도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내가 시중 부분을 건드리지 못한 것은 ‘성인’이라는 말 때문이리라. 이 말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성인은 좀 거룩한 느낌이라 ‘군자’라는 말을 쓴다고 해도 선뜻 이를 건드리지 못하고 광자, 견자 정도만 건드린 것이다. ‘군자’가 안되려고 용을 쓰고 있다. 헉! 에세이 발표 후 친구랑 이야기하면서 이 용쓰는 문제가 더 내 이야기로 다가왔다. 내가 하는 남얘기가 아니라 남이 하는 내 얘기로 들리는 경험이었다. 화살표 방향이 나로 향하고 있었고 그 시작도 나였다. 가만히 보면 인격을 수양한다는 것은 가능하고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군자되기’의 뜻[지志]을 세우기는 어려워한다. 이 차이를 탐구하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쌤이 코멘트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다른 책을 연결하면서 쓸 때, 같아 보이는 걸 연결하는 대신 겉으로 달라 보이는 것의 연관성을 찾아보라고. 이것은 횡단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내가 알고 있는 문장이나 단어와 뜻이 같아보여서 연결해서 쓰다보면 기존 생각의 반복이거나 누구나 동의하는 경구의 글쓰기가 될 수 있겠구나. 잘 쓴 글들은 그 이면을 한 단계 더 보는 글들이었다. 그것은 들어서 그렇다고 수긍한 글도 아닌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쓴 것도 아닌 그 사이의 마주침의 글이 아닐지. 글을 통한 길찾기는 그 마주침을 직면하는 것은 아닐지. 하면 나와 글 사이를 자꾸 오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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