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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에세이 후기-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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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샘 작성일16-10-03 23:08 조회1,9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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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낭스 3학기 에세이 『비정상인』 『성의역사』 4조 후기 20160930

                     

@ 권현숙

제목 <욕망과 함께 재생산되는 관계> 이게 관계는 욕망 때문에 계속 똑 같아진다는 이야기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욕망, 재생산, 관계 이렇게 나왔는데 푸코가 『비정상인』 『성의역사』 어디에서 욕망과 관계이야기를 했나? 욕망이 관계를 재생산한다는 말이 푸코의 맥락하고 어떻게 연결되나?

주제가 너무 크고 주제에 비해 내용이 빈약하다. 또, 소주제와 인용문 그리고 아래 연결문장이 다 따로 논다. 딴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에서 던진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중간에 질문이 사라져 버렸다. <앎을 통해 규격화되는 권력>에서는 아주 거칠게 푸코를 요약했고 뒤에 <관계속의 나의 인식>에 가서는 전혀 딴 얘기다. 가족을 분석 한 것도 아니고 앞의 질문을 분석한 것도 아니다.

‘지배나 피지배의 억압적인 인식 속에서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외부로 밀어내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한다.’고 했는데 푸코가 타자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나? 지배 피지배의 억압적 방식이 타자를 인정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가지고 나를 비판하고 있다. 푸코를 통해서 내 개념들 하나하나를 검토해야 하는데 푸코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앞에 얘기는 공동체에서의 욕망을 이야기 해놓고 갑자기 휙 바뀌어서 <욕망이 부딪치는 곳 -가족이 되었다>가 나왔다. 갑자기 욕망이 부딪치는 곳이 왜 가족으로 환원이 되었나?

글이 다 모호하다. 무언가 좋아지고 싶다, 달라지고 싶다 이런 욕망은 있는데 구체적이지 않다. 실질적으로 내가 행동하고 있지 않은 욕망은 다 탐욕이다.

나에게 신념이 억압으로 작동하는 것의 문제를 따라가면서 푸코의 권력개념의 테제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아 내가 이 지점에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를 구체화 시켜야 한다.

-> 에세이를 쓰면서 푸코의 개념들은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고 큰 덩어리의 문제의식은 있는데 그 문제의식을 어떤 구조를 통해서 끌어가야 할지를 몰라 난감했다. 그러다보니 한부분이라도 요약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쓰다 보니 질문을 잃어버리고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 배서연-특제 보약 잘 먹기

“오늘 여기에 앉아있는 사람, 그 누구도 애 안 쓴 사람 없습니다. 지적을 당한다고 억울해 하지 마시길…….”

이게 뭔 소리인지 모른다면 감이당 화요 낭스 학인이 아닌 게다. 3학기 에세이발표 막을 올리면서 채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했지만 역시나 선생님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친 것 같다. 열심히 했다고 한 건 오로지 자신만의 기준이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푸코도 어느 정도 이해도 했고 개념도 알았고 나름 좀 쓴 것 같았는데 막상 앞에 나가 발표를 하면 사태가 백 팔십 도 바뀐다. 아직 코멘트도 듣지 않았는데 읽는 중에 내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 택도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챈다는 것이 신기하다. 질문을 받거나 코멘트를 받고 나면 이 알아차림도 택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발표를 한다는 그 작업 하나로 자신이 한 것을 눈치를 챌 수 있다는 게 보통 일인가!

나름 푸코의 개념을 녹여서 나의 글을 쓰려고 했으나 그것이 되레 엉뚱하게 개념을 도입한 것이 되고 말았다. 앞뒤 글 아귀 맞추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게으름이 탐욕이라는 말씀 뼈에 깊이 새긴다. 그놈의 아르스, 고된 수련의 끝에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내지는 삶의 기술 이게 내가 소망하는 것이건만 나의 소망을 욕심과 탐욕으로 끝낼 수 없지 않은가.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한다. 이렇게 쓴 소리를 들었으니 몸이 얼마나 좋아질까? 특별히 개개인에게 쓴 처방을 해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맞춤형 특제 보약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이 보약이 다음으로 가는 근기가 되고 발판이 될 것이니……. 학인들이여, 쥐약이 아닌 보약을 먹었으니 힘을 내 보세나!

 

@ 서은경

어떤 개념을 안다는 것. 이번 코멘트에서 확실하게 느꼈던 부분이다. 철학자의 개념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소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하고 큰 문제인지. 에세이 때마다 늘 ‘아는 만큼만 쓰세요. 이것을 위안(?)삼아 그래 아는 만큼만 쓰자. 내가 이해한 부분만큼만 쓰지. 라는 것이 얼마나 곡해하는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이란 그 책을 치열하게 파고들어가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결코 자신이아는 것을 쓰라는 것이 아니었다. 늘 그랬다. 선생님 말씀처럼 파고들고 정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에 늘 피했다. 해서 빨리 여기에 어울리는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이번 역시 뭔가를 찾기 위해 바틀비가 눈에 들어왔다. 샘의 첫 말씀. 푸코를 읽고 바틀비를 들여와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주객이 전도가 되었다. 바틀비를 가져와 푸코를 끼워 맞춘 것이다. 맞다. 그런 생각으로 썼다. 이런 것이 ‘무지하려는 의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되는 줄만 알았다. 오해도 단단한 오해다. 늘 이런 식이었다. 내 식으로 해석하기. 다른 방식으로의 해석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는 것. 늘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 한다는 것.

1. 제목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바틀비의 힘은 내면화 되지 않은 권력’ 이는 내면화된 권력과 내면화되지 않은 권력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구도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이미 나누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이 푸코는 모든 권력은 ‘내재적’이라고 한 것에는 모든 권력은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제가 잘못되어 푸코가 그 전제 속에서 오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서두가 미미하다. 서두에는 내가 어떤 문제를 던지면서 가야하는 것으로 뒷내용과 연결되어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쓰지 않아야한다. 시대적 배경을 뭉뚱그려 쓴다는 것은 안일한 발상이다. 3. 푸코의 고백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해야한다. 푸코는 고백이란 어떤 인간이 자기를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고백은 자백 같은 것이다. 고백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자신 내면에 절대적 원인이 있기 때문에 했다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다. 단순히 출생을 말하게 하는 장치가 아니다. 4. 욕망이 내안에 있어 욕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욕망은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 박지희

공부하는 방법을 기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푸코가 어려웠을 지라도 최소한 고백을 쓰려고 했다면, 푸코가 고백을 어떻게 말했는지를 먼저 성심성의껏 쓰고 근데 고백을 왜 나쁘다고 하지? 차라리 이렇게 순박하게 던졌어야 한다. 그런데 이거는 푸코의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고백에 대한 자기 얘기를 썼다. 둘이 얘기하면 다 고백인가? 푸코가 말하는 고백은 맥락이 있다. 왜 그걸 무시하는가? 이 글은 푸코가 이해가 안 된 것이다. 이해가 어렵고 힘든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다음 스텝이 있다. 그런데 이 글은 푸코를 읽었다는 표시고 고백만 가져왔을 뿐, 순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맹자의 수오지심과 푸코의 고백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은 맥락이 다르다. 그 맥락을 얘기해야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고백만 얘기하고 있다. 푸코가 말하는 고백의 맥락은 어떻게 고백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에 책임지는 주체로 형성하는가? 이런 것이고, 맹자의 수오지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본성과 연관해서 그 본성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단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맹자가 얘기하는 맥락은 전혀 다르다. 이것이 고백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부끄러움을 느끼면 다 수오지심인가? 이 글에는 푸코의 고백에 대한 맥락과 맹자의 맥락이 다 생략된 채 자신이 생각하는 고백에 대한 것만 들어있다. 공부를 할 거면 그것을 넘어가야 한다. 아르스도 나오는데, 아르스가 틀려서 문제가 아니라 지금 고백이라는 말을 아무 맥락 없이 내 맘대로 얘기했는데 이것을 삶의 아르스라고 포장하면 안된다. 이런 말도 쓰면 안된다. 그러니까 푸코를 이해하지 못했으면 푸코를 아는 모션을 취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냥 내가 뭘 이해를 못했다, 이런 부분은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요기까지는 정리했는데 그 이상은 안 되었고, 어떤 의문이 계속 들었다. 어디에서 어려웠다. 글을 이렇게 써도 된다. 글을 왜 질문으로 쓰면 안되죠? 그냥 나는 이런 걸 이렇게 이해하려고 했는데 같이 공부하는 분들에게 자기 의견을 구하는 거야. 난 이것이 이해가 안되더라라고. 이해하신 분이 이런걸 얘기 해 주셨으면 좋겠다. 난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는데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다라고. 그럴라고 이렇게 발표하고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어려워도 그것을 할 용기가 나면 그러면 공부를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요즘엔 저는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서 꼭 공부를 하고,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옛날엔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공부는 자기 욕망이 가야 하는데, 공부는 더 그런 것 같다.


@ 변은영-몸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질문하는 힘이 필요했다.

나는 공부를 왜 하는 걸까?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한 걸까? 라는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입버릇처럼 노는 것과 공부가 잘 구별이 안된다고 말한 것을 증명해 주고 있으니 좋아해야 하나?! 공부를 슬슬하고 있으니 구별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 이틀 만에 해치우는 에세이를 3년째 쓰고 있으니 입을 열기도 민망하지만 몇 자 적는다.

채운 쌤께서 끝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자신이 알던 것에 머물 게 된다고 하신 말씀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질문이 없으니 파고들지 않으며 그러니 더 이상 질문도 생기지 않는다. 또한 나는 쉽게 쓴다고 쓴 건데 ‘난해하다’. ‘시니컬하다.’는 코멘트를 들었다. 3년 전 초현실주의적이라는 코멘트가 떠오른다. 자신을 객관적 위치에서 보는 것처럼 하면서 정작 자신의 문제는 보지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비판하는 대상처럼 살면 자신이 혐오스럽지 않나라는 코멘트가 신경 쓰인다. 표현이 거슬리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코박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 경중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에게 엄격한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스마트폰 보기를 고치지 않는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정보 만능의 담론 속에서 말해지는 앎-권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해서 실천하는 셈이다. 이는 다른 방식의 앎을 구성하여 다른 실천으로 내면화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다른 방식의 앎? 질문 없는 앎은 불가하니까.

그리고 나의 경우 이것저것 배우면서 이상향만 잔뜩 그려놓고 허우적대고 있으니 “공부가 독이 된다”는 코멘트는 우리 모두를 돌아 정확히 나를 가리킨다. ‘독’이 되는 지식. 그래서 3년 전 감이당에 공부한다고 와놓고 여전히 쳇바퀴다. 책에 대한 자세가 거시기 하듯 내 삶에 대한 태도도 딱 그만큼이다. 이런 나에게서 출발하자. 지적질 말고 질문을 가지고 앎-실천을 통해서. 그래야만 이 시니컬, 추상성에서 벗어날 것이다.

자신이 배운 것을 자신에서부터 차근히 풀어갔으면 될 걸(예를 들면 나의 성욕은 어디로? 뭐 이렇게) 그 과정을 생략하고 정작 내게 필요한 소박한 글 대신 또다시 겉멋만 부리고 말았다. 또한 문제제기가 엉망인 이유는 그저 채운 쌤 강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예적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질문 없는 태도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닌 척 포장하는 그 삶의 태도. 지금은 어쨌든 이렇게 쓰고 있는 게 씁쓸하긴 해도 쓸 만하다. 그 이유는 내용이 적나라하지 않아서도 있겠지만 3년간 감이당 에세이 장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를 다르게 드러내는 것에 이제 ‘쪼금’ 익숙해져서 일 것이다. 일상에서 진솔함을 발휘한다면 글도 같이 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게 힘들면 글로 시작해보는 것이 더 쉬울 것도 같다. 책을 읽었으면 몇 줄이라도 써보기.

그렇다. 계획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 시간을 양적으로 투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질적인 차이, 그러니까 책을 밀도 있게 파고들지(이도 질문이다) 않았기에 에세이 준비기간 동안 ‘몸의 주인 되기’가 실패한 건가보다. 자신에게 다가가지 않는 태도와 역시 유사하다. 내가 아는 나만 보듯 내가 이해한 책 부분만 인용한다.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참 무색하지 아니한가. 내가 원하는 이상한 몸, 다른 앎들을 구성하는 몸 대신 그저 게으른 몸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의미에서 이상타. 아무튼 이 한마디만 남기자. 진솔하게 시작하고 끝까지 질문하라! 몇 줄씩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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