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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1학기 7주차 후기_우리는 왜 공부(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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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화과 작성일24-03-29 21:50 조회4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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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도권을 찾기 위해 '읽고, 말하고, 쓰기'를 점검하는 시간, 금요 랭귀지스쿨의 1학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시간 읽고 말하고 쓰기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순간들을 통해 '삶의 주도권을 찾았는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궁색해집니다. 답을 할 수 없을때, 제가 하는 방식은 질문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삶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금성 7주차 수업은 그 질문에 대한 답에 조금씩 접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의 8권과 9권에서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가'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국가 정치체제가 타락하는 과정과 함께 영혼의 타락과정을 유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라고 할 수 있는 최선자정치체제에서 분열이 생기면 명예지상정체가 출현합니다. 이 시기에는 현자보다 전쟁에 적합한 자들에게 호감을 품게 되어 명예지상정체적 인간상을 추구하게 되지요. 여기서 또 내분이 일어납니다.  이때는 부에 의해 권력이 재편되고 부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를 과두정치체제라고 합니다.  명예지상정치체제 속에서 승리와 명예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이제 일과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성적 부분으로는 오직 자신의 적이 재산을어떻게 늘리고 있는지를 고심하고, 기개 높은 부분으로는 오직 부와 부자만을 감탄하며, 돈을 벌게 하는 것과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명예라고 여기게 됩니다. 부를 중심으로 국민이 분열되면 가장 큰 악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플라톤은 '자유'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는 '참다운 주권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로 생각했는데 자유가 가장 큰 악이 된다니요. 그 답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게 배치되어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운 상태입니다.  과두정체의 최대 선은 '돈'입니다. 돈을 중심으로 쾌락이 넘쳐나고, 교육엔 소홀해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자유'를 추구하는 상태가 되지요. 이러한 상태의 국가를 민주정치체제라고 부릅니다. 무질서가 난무한 상태가 되면 대중들은 새로운 통치자를 원하게 되고 이때 참주제가 등장합니다. 참주제는 최선자정치체제와 형식적으로 유사해보이지만 실체는 전혀 다릅니다. 이때의 지도자는 인간에서 늑대로 돌변할 수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접목해보면 어떨까요. 인간의 무의식은 다양한 욕망이 제각각 추동하는 무질서의 상태, 즉 민주적 상태입니다. 내 마음의 욕망상태에 휘둘리다 외부적 규율을 통해서 질서를 세우고 싶어져요. 현대의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무수한 지침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외부 규율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욕망과 습성을 통제하려고 들면 오래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또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기 쉬워요. 규칙이 주인이 되어버리는 전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 욕망의 역학관계를 읽는 일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욕망이 크게 일어나는가, 그 저변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떠한 매커닉으로 작동되는가. 이러한 자기 해석을 토대로 나만의 통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자기 해석 체제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사주명리, 주역, 불교와 철학의 해석틀로 내 안의 역학관계를 투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반응'합니다.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반응의 역학을 심층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해석틀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사주명리 하나만으로 세계를 해석한다면 닫힌 개념속에서 존재는 위축되기 쉽습니다. 또다른 참주를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죠.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고민하고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체계의 대조를 통해 열리는 풍부한 해석틀을 갖춰야 합니다.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고 충돌되는 다양한 해석틀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결론은요.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쾌하고 즐거운 승연샘의 수업은 깔깔 웃다가도 어느 순간 깊은 침묵에 빠지게 만듭니다. 금요 대중지성을 하기 전 나의 읽기, 쓰기, 말하기를 점검하게 되는 것이지요. 세미나를 할수록 비판적 토론은 비난이 되고, 지식을 과시하는 장이 되어 서로의 지적 수준을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자기 해석틀을 갖추어 자기 통치술을 스스로 세우기 위한 공부를 왜 굳이 '함께' 해야 하나, '혼자 하면 안되나' 피곤하게 느껴진 적도 많았구요.

 

그 답에 대한 답을 3교시인 <주역>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역의 낯선 괘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게 느껴졌어요. 주역도 제대로 모르는데, 내 맘대로 해석하고, 내 삶을 적용해서 발표한다는 것은 오답 투성이가 될 테니까요. 그러나 다정한 한주샘은 언제나 틀려도 그냥 해보라고 하십니다. 아는 만큼, 생각되어지는 만큼 펼쳐보라구요. 그 시원한 답에도 여전히 막연하고 두렵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지하고 날것인 나를 마주하는게 싫었기 때문인거 같아요. 나 혼자 이불킥하며 괴롭게 마주했던것도 수세월인데, 아직 서먹하고 어색한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니요. <산풍고괘>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주역의 효사들을 틈나는 대로 묵상했어요. 마음에 와닿은 구이효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벌레 충과 그릇 명자로 이루어진 '고'를 설명하면서 집안일을 미루고 방치하다가 마지못해 해내는 내 모습이 떠올랐고, 내가 고치기 힘든 약점을 만날때마다 엄마 탓을 해왔던게 떠올랐지요. 그렇게 쓰여진 에세이를 통해 어설프게나마 주역의 괘를 통과하고 나니 한주샘이 설명해주시는 <산풍고괘>가 더욱 쏙쏙 이해가 되었어요. 저와는 반대로 아직 나의 서사를 털어놓을 준비가 안되었다고 하신 학인은 열렬하고 뜨거운 눈으로 이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눈빛에 홀려 술술 이야기를 시작하셨고, 그야말로 <택화혁괘>가 지칭하는 존재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변하는 순간을 모두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현장성을 믿으라고 하신 한주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어요.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데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전달될지, 불필요하거나 피곤한 오해가 생기진 않을지 염려하면 그 생각대로 흘러간대요. 별말 아닌것도 신경쓰이게 되고, 한번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지옥의 세계가 열리곤 했던 것이 생각났어요.

 

무의식의 세계에 숨겨진 자율적 욕망을 알기 위해선 '반응'하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믿을만한 현장이 필요합니다.

텍스트를 통해 나를 통과시킨 후 학인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들로  내 반응이 드러나야 심층적으로 탐구할 재료를 얻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생각하는 기관이 '뇌'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뇌는 의식화하고 지시하는 통치기관입니다. 그러나 실제 반응은 몸에서 일어납니다. 신체가 욕망에 따라 반응하지요. 에세이에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 거립니다. 재빨리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뇌의 이성적 판단에 도움을 받을 겨를이 없어요. 그때 일어난 내 반응이 내 무의식상태의 욕망일 것입니다. 이렇게 꼭꼭 숨겨져있는 욕망을 혼자서 들여다보고 분석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무지를 답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읽는것은 많으니 아는게 많은거 같지만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기 쉽고, 내 감정과 기분에 따라 쓰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자아는  소외당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무수히 많은 참주들 속에 왜소하고 축소된 채로 말이지요.

 

금성에서 보낸 6주가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것 같지만 어떤 일들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한주샘이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오늘, 그 역동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목록

콩이2024님의 댓글

콩이2024 작성일

문장 하나하나 소중히 읽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단락의 '숨겨져있는 욕망을 혼자서 들여다보고 분석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무지를 답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문장은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읽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