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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걸린 가시를 빼는 방법 (20. 풍지관괘 후기_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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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새강 작성일23-11-25 15:07 조회1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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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걸린 가시를 빼는 방법

 

두 번째 후기를 쓰게 되었다. '풍지관'괘이다. 

자발적인 선택이기보다는 매니저님의 지목으로 맡게 된 괘이다. 아직은 주역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어떤 괘가 와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처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방식이 마음 편했다. 첫 번째 후기를 쓴 '풍천소축'괘에서는 '음'의 삶의 태도를 생각해 보는 계기였다. 두 번째 후기는 첫 번째 후기와는 조금 다른 결로 쓰고 싶어서 이 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어디일지 고민했지만, 결국은 마음속에 계속 걸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로 발제를 맡은 '육이효'였다. 

처음 이 효를 읽으면서는 '또 이러한 불필요하고 적합하지 않은 비유와 상징이 등장하는군, 일단 이 괘의 맥락을 파악해야 하니 무시하고 쭉 읽어보자'고 하였다. 여성과 남성, 남녀평등, 여성 폄하, 페미니즘 등의 말과 주제들이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지만, 이 주제를 중심에 놓고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육이효'를 읽은 이후부터는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목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는 이 '육이효'를 어떻게 할지가 더욱 시급할 뿐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효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 후기를 고심하는 동안은 사실 내면적으로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가득한 일주일이었다. 결국 이번에는 괘의 전체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육이효'를 좀 더 파고들기로 했다. 

우리가 생선 가시를 씹었을 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인 것 같다. 미리 가시를 발라내지 못한 실수를 자책하며 입안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려서 가시를 찾아 뱉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살과 가시를 한꺼번에 와락 씹어 발라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골라내기는 번거롭고 가시는 거슬리니 아예 전체를 다 뱉어버릴 것인가, 이것도 아니면 이미 씹은 가시를 더욱 잘근잘근 씹어 목에 걸리지 않도록 예의주시하면서 꿀꺽 삼켜버릴 것인가. 

'풍지관'괘의 '육이효'에 등장하는 '女'와 빌헬름과 베인즈의 책에 등장하는 'a woman, a good housewife'가 바로 그 가시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Six in the second place means: 

Contemplation through the crack of the door. 

Furthering for the perseverance of a woman. 

Through the crack of the door one has a limited outlook; one looks outward from within. Contemplation is subjectively limited. One tends to relate everything to oneself and cannot put oneself in another's place and understand his motives. This is appropriate for a good housewife. It is not necessary for her to be conversant with the affairs of the world. But for a man who must take active part in public life, such a narrow, egotistic way of contemplating things is of course harmful.

육이효는 문틈 사이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여성의 인내를 위해서는 이러한 바라봄은 이롭다.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문틈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제한된 시선을 가진다. 그때의 바라봄은 주관적으로 제한된 시선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연결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생각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동기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좋은 아내에게는 이러한 바라봄의 방식이 적합하다. 좋은 아내가 세상사를 잘 아는 것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공적인 삶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남자에게 이러한 좁고 이기적인 방식의 바라봄은 아주 해로운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육이효'를 해석하고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일고의 가치도 없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문구였다. 공자, 빌헬름, 베인즈의 시대의 관습과 문화를 염두에 두면 '세상사를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여성에 비유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뒷맛이 계속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마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실수라 여기고 잊어버리거나 아예 다 뱉어버리거나 그냥 씹어 삼키면서 살아왔던 순간들이 휙 하고 지나갔다. 20대에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표현을 내면화시키지 말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 체계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자, 이 문제는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는 문제이고 내가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없으니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나은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결국은 남녀 문제가 더는 나를 달뜨게 하지 않기에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몫인 양 나의 관심사에서 지워버렸다고나 할까. 

그렇게 지내온 일상에 이 효는 정면으로 나를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깔린 주역을 그래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것인지, 지금까지 동양 고전을 제대로 음미해 보지 않은 채 제쳐버린 이유의 제일 큰 부분이 바로 이러한 여성 인식 때문은 아닌지, 지금도 이 부분을 무시한 채 지나칠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주일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을 보니 그냥 넘어가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평생을 살아온 지금 이 문제가 다시 걸리는 것은 분명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처음 '남존여비 사상'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중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조각조각 난 기억에 의하면 그날은 명화극장을 보고 있었고, 엄마에게 이야기하던 중에 농구화를 신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여자가 무슨 농구화냐'며 사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엄마를 향해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살고 있고 오빠와의 부당한 차별 대우의 사례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면서 소리내 엉엉 울었던 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 불빛만 나오는 컴컴한 방에서 엄마와 대치했던 그때의 투쟁의 결과로 나는 슈퍼카미트인지 아식스인지 헷갈리지만, 베이지색 천 농구화를 쟁취했다. 처음으로 그 농구화를 신고 학교에 가는 아침 등굣길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신은 얼마 못 가서 학교에서 도둑맞아 버렸다. 신발이 채 낡거나 때가 묻기도 전에 누군가 훔쳐 가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브랜드나 새 신을 도둑맞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오래전 그 일이 왜 떠올랐을까를 생각하니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말을 인식하고 그것이 내 삶의 부당함에 맞서는 싸움의 무기가 되었던 첫 경험이었다. 그때의 분노와 투쟁은 새 신을 쟁취하고 잃어버리기까지 짧은 승리의 기쁨으로 막을 내렸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승리의 전리품은 사라졌지만 부당함에 맞서 분노를 표출하는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통쾌했던가. 절대적인 엄마의 존재와 이 집안의 불평등한 사례들을 내 목소리로 까발렸을 때의 통쾌함은 잃어버린 새 신과 함께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후의 나의 삶의 중요한 힘이 되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그 힘이 나를 이끌었던 건 아닐까. 

처음에 이야기한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성향상 나는 아마도 잘근잘근 씹어서 살과 함께 꿀꺽 삼키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삼켜버린 가시는 강한 위산이 소화시켜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의 치명적인 단점은 가시를 삼켜서 소화는 시킬지 모르지만, 그 생선의 맛을 전혀 음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번에는 그 생선의 맛보다는 목에 걸리지 않으려고 잘근잘근 씹어 삼켰던 그 가시의 기억이 떠올라 아예 그 생선을 먹는 것을 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 생선은 맛이 없다, 그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생선은 전혀 이롭지 않다' 등의 편견으로 기울어진 채 세상사를 바라보는 나를 합리화시키면 살지도 모른다. 

그래서 '풍지관'괘에서 '六二 闚觀 利女貞' 에서 ''를 '小人'으로, 'a woman, a good housewife'를 'a man, an inferior man'로 바꾸는 정도의 도전은 지금 해봄 직하지 않을까. 빌헬름과 베인즈도 '풍지관'괘의 의미대로 이 효를 다시 바라본다면 흔쾌히 동의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서 다시 '육이효'를 적어본다면, 

 

六二 闚觀 利小人貞

Six in the second place means: 

Contemplation through the crack of the door. 

Furthering for the perseverance of an inferior man(a fool). 

Through the crack of the door one has a limited outlook; one looks outward from within. Contemplation is subjectively limited. One tends to relate everything to oneself and cannot put oneself in another's place and understand his motives. This is appropriate for an inferior man(a fool). It is not necessary for him to be conversant with the affairs of the world. But for a man who must take active part in public life, such a narrow, egotistic way of contemplating things is of course harmful.

육이효는 문틈 사이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소인의 인내를 위해서는 이러한 바라봄은 이롭다.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문틈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제한된 시선을 가진다. 그때의 바라봄은 주관적으로 제한된 시선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연결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생각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의 동기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바라봄의 방식은 소인에게는 적합하다. 소인이 세상사를 잘 아는 것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공적인 삶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좁고 이기적인 방식의 바라봄은 아주 해로운 것이다. 

 

작년부터 '노년'은 일상의 주요 화두였다. 아직도 고민 중이지만 '풍지관'괘의 '육이효'는 불편하고 부당한 순간에 내 목소리로 싸워본 사건을 ', 바라봄'으로써 중요한 내면의 힘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남존여비 사상'이라는 말이 불편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무기가 되었듯이 오십 이후에 공부하는 것에서 이러한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않을까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나이를 '늙음의 두터움'이 아니라 세상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의 두터움'으로 정의해 보면 어떨까. 구오효의 'The right sort of self-examination, however, consists not in idle brooding over oneself but in examining the effects one produces.'의 말처럼 '올바른 자아 성찰은 자신에 대해 한가롭게 고민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한 일들의 의미와 효과를 면밀히 숙고하는 것'이라는 문구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터워진 경험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설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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