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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미숙의 명심탐구] 영화 ‘파묘’-전지적 ‘귀신’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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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4-02 10:11 조회20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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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4-03-31

[고미숙의 명심탐구] 영화 ‘파묘’-전지적 ‘귀신’ 시점

 

파묘에서 일본 ‘오니’ 퇴치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음양오행론
갈망·집착·원한이 ‘귀신’ 만들어

운동·순환, 생성·변화가 자연 이치
머무름 없이 모든 것 흐르게 하라

 

실로 ‘오만년’ 만에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 이후엔 영화관에 가는 게 영 낯설어진 탓이다. 해서 이번엔 600만명을 통과할 즈음 직관을 감행했다. 눈치챘듯이, <파묘> 이야기다.

일단 오컬트 장르라고 하는데, 별로 무섭지 않았다. 풍수와 음양오행, 무속 등 동양의 오래된 서사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기괴한 일들을 수시로 겪다보니 웬만한 충격에는 덤덤해진 탓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공포와 전율을 쥐어짜기 위해 쉼없이 몰아치는 서양식 오컬트와는 꽤 달랐다. 그래서인가. 개봉 초부터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MZ무당, 항일코드, 세키가하라 전투 등등.

내가 설정한 테마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귀신’ 자체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전지적 ‘귀신’ 시점!

귀신은 삶과 죽음의 ‘사이’, 곧 중음천을 떠도는 원혼들이다. 그럼 이들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친일파라서? 사무라이라서? 당연히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위로, 백(魄)은 아래로 가서 흩어지는데 혼백이 워낙 무겁고 탁해서 흘러가지를 못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갈망과 집착 때문이다.

먼저 친일파 귀신의 경우,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밑도 끝도 없이’ 부자가 된 인물이다. 그렇게 부귀영화를 다 누리다 죽었으면 여한이 없어야 하지 않나? 한데, 왜 구천을 맴돌면서 후손들을 괴롭히고 있는 거지? 아마도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건 다 자식들을 위해서라고.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부와 귀를 향해 질주할 때 흔히 내세우는 명분이다. 하지만 다 허튼 소리다. 그냥 돈과 권력에 미쳤을 뿐이다. 그것으로 누리는 건? 오직 식욕과 성욕뿐! 그러니까 이 귀신은 친일 이전에 쾌락에 중독된 아귀다. 무덤에 묻힌 다음에도 얼마나 ‘지'랄’을 했는지 ‘묫바람’까지 일으킨다. ‘악지’에 누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아귀가 누워 있으면 그곳이 바로 ‘악지’가 된다. 그가 관을 탈출한 뒤에 하는 짓을 보라. 미친 듯이 먹고 토하고, 며느리와 ‘야한’ 댄스를 즐기고, 손자의 명줄을 끊는다. 그러니 정말로 자식들의 행복을 바란다면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사방에 흩어라. 그러면 자식들이 가는 곳마다 인복을 누리게 될 것이니. 자식들 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신의 저주를 벗어나려면 타인들의 ‘피·땀·눈물’로 범벅이 된 유산을 탐하지 말라. 아귀는 바로 거기에 머물기 때문이다.

다음, 사무라이 정령 오니. 닥치는 대로 죽이는 귀신계의 ‘사이코패스’다. 만명의 목을 딴 전쟁광임에도 정작 자신은 몸에 대한 집착이 어찌나 지독한지 쇠말뚝을 몸으로 삼고 도깨비불이 되어 싸돌아다닌다. 이름하여 ‘불’을 품은 ‘쇠’! 그런 정령이 일본 파시즘의 영적 베이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목적도 대상도 없이 전쟁 자체를 갈망하는 광기, 그것이 곧 파시즘이다. 그 결과 그는 500년 전의 시공간에 갇혀 버렸다. 아직도 다이묘들이 각축하던 ‘전국시대’라 여긴다. 오, 이 못 말리는 ‘올드 보이’! 근데, 왠지 좀 익숙하다. 특히 게임광고에서 종종 접하는 괴물 캐릭터들과 많이 닮았다. 화려한 피지컬, 과한 패션, 격렬한 전투력을 뽐내지만 ‘청동기 시대’에 갇힌 존재들. 왜 현대인은 이런 ‘올드 보이’들에게 열광하는 걸까? 참 궁금하다.

아무튼 그런 주제에 사찰의 탑묘 앞에서 예경을 드리고 <금강경>을 오백번도 더 왼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무계한’ 장면이다. 쇠말뚝을 몸으로 삼는 처지에 ‘모든 상(相)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을 담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했다고? 이거야말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게다가 ‘겁나 험한’ 짓을 마구 저지른 대가가 고작 은어와 참외다. 아무리 그게 그 시절 최고의 진상품이라 한들 그래봤자 먹거리다. 결국 ‘은어 먹방’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해서 무섭다기보다 좀 딱하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음양오행론’이다. 파묘를 하는 것도, 오니를 퇴치하는 원리도 다 거기에 입각한다.

대단한 비방처럼 보이지만 이치는 실로 단순하다. 운동과 순환! 자연은 생성하고 변화한다. 이 흐름을 거스를 때 귀신이 되고, 또 귀신에 씌인다. 그 집착과 원한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것을 흐르게 하라. 부도 영광도, 몸도 마음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 <금강경>의 ‘벼락’같은 가르침이다.

 

경향신문_고미숙의-명심탐구_파묘-00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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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미경님의 댓글

조미경 작성일

*파묘*느낌 찌찌뽕요
선생님 글로 보니 정리가 쾌하게 되네요
감사모닝요

파>파보자구
묘>묘한 지금 여기를 ..그럼 흐른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