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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지금, 최선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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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5-23 09:19 조회2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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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최선의, 결정

윤 유 선(감이당)

도대체가 더디고 흐리멍덩해서 견딜 수가 없다. 불교를 만나면서 진리의 방향타를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할수록 일상의 판단은 오히려 주저하게 되고 모호해진 느낌이다. 공부의 의미는 일상에서 바른 결정과 판단을 내리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고, 그것이 곧 내 공부 발전의 가늠자일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 생활에서 진리에 가닿는, 바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아직도 그 바른 결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무슨 공부를 어떻게 더 해야 그 경지에 갈 수 있는지, 절실하게 알고 싶어 답답하다.

나의 구도 공부는 아직 이런 질문과 답, 다시 질문이 오가는 단계다.

내 마음이 곧 부처이니 편착되지 않은 온전한 그 자성자리를 찾아라

어떻게요?…

느낌과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이 일어났구나하고 알아 차려라탐심진심치심인 줄로 알아라…’

그러면그러한 느낌과 감정을 알아차린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면

정말 최고의최선의 결정이 되는 겁니까?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결정입니까확실합니까?

 

나는 결정에 있어 우유부단하지는 않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자기 결정을 남에게 미루거나 자기 일을 여기저기 오랜 시간 묻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한심하다. 하지만 그게 또 내 모습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상사의 지시사항을 기준 삼아 나랑 생각이 같으면 그냥 하고 생각이 다르면 욕을 하면서 그냥 하면 되었다. 지금은 결정권이 내게 있는 상황인데, 모든 결정을 할 때 주변 상황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느낌이어서 직원들을 닦달하게 되고, 내가 하는 지금 이 결정이 정말 모두를 위해 최선의 결정인 것일까를 끝없이 생각하며 늘 불안해 한다. 물건을 살 때 지구 반대편까지 가격 비교를 마치고 포인트 돌려받을 것까지 고려해서 가장 싸게 산다고 확신이 드는 순간까지 쇼핑사이트를 떠나지 못하고 눈이 퀭해져 있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인생이나 업무의 결정에는 가격 비교로 똑 떨어지는 그 확신의 순간도 없다. 내 결정의 여파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연구해 놓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 누군가 내게 이게 맞다고, 이게 최선이라고 점을 찍어주길 바란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가

절대적이고 불변의 원칙이 있어 그걸 알아내어 따르기만 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누군가 내게 세상을 사는 절대 법칙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3200년 전에 조로아스터가 처음으로 선(good)과 악(evil)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종교를 탄생시켰다. 약탈자(evil)에 대응하는 질서를 잡는 자(good)들의 치열한 聖戰. 성전이 끝나면 질서 잡힌 선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세계관은 지금도 서구 종교 정신의 근간이다. 이 세계관에서 선은 정의로운 것이고 선악은 확실히 구분되고 그에 따라 시비가 가려진다. 심판의 날이 되면 악은 궤멸될 것이다. 우리네의 권선징악도 같은 정서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박노해 시)’

 

지금 내 수준에서는 내 마음이 편하려면 조로아스터 시대나 박노해의 시대처럼 선악이 극명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 같다. 혹은 욕망이 끼어들 틈 없도록 예의범절로 개인의 역할을 정교하게 질서 잡아놓은 유교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도 같다. 나는 여전히 질서 잡힌, 선명하고 확실한, 최고의 불변의 법칙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선악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나에게 좋고 싫음(惡好)다. 善이라는 객관적 보편성은 없으며 생각이 발동하면 선악(나에게 좋고 싫음)이 생기는 것이다. 사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 선이다. 정할 때 무선무악이고, 동할 때 능선능악이다.’ 이것이 양명학과 불교의 선악에 대한 핵심이다. 동양사상에서 善은 서양종교의 악(evil)에 대비되는 게 아닌 것은 확실하다. 뭔가 이것이 더 고차원적이고 진리에 가깝다고 느낌은 오는데 실생활에 어떻게 접목해야 하는지는 더욱 안개 속이다. 재색 명리·탐진치·한가한 생각과 잡념이 모두 사욕이며, 이를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 선이라고 하는데, 도대체가 이런 생각을 버리고 하는 결정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가 말이다. 내 마음은 여러 겹이어서 내 결정에 사욕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다 보니 결정하는데 마음이 오히려 복잡해졌다.

원칙적으로 받을 수 있지만 꺼림칙한 돈을 거부하면서 재물을 탐하는 마음은 벗겨냈지만 사람들이 나를 청렴하다고 여기기 바라는 마음, 나를 보고 배우라는 마음이 한 꺼풀씩 더 있다. 나는 분명 이 절차를 바꿔 조직을 개선시켜야 될 것 같은데 직원들은 현 상태에 만족하고 있어 끌고 가기 답답하고 나만 조급하다. 나는 분발심을 낸 것이지만 그 마음을 벗겨보면 아만심으로 나 혼자 잘났다는 마음이 있다. 공정하게 처리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자연스레 감정으로 먼저 구분되고 이유를 논리로 덧댄다.

이런 사사로움이 있는 마음으로는 무엇도 결정하지 말라는 것인가. 설마, 오직 외부 자극에만 무심으로 반응할 뿐 내 스스로 뭔가를 짓지 말라는 것은 아닐 게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결정이 나의 자유의지가 발현된 최선의 결정이라는 것일까. 칸트는 무조건적 윤리(정언명령)가 신탁과 같이 절반만 말해진 것일 뿐 내용은 주체적으로 내가 채우는 것이며 외적 조건을 핑계 삼지 말고 자유로우라고 한다. 나는 아직 그 자유가 두렵고, 그 혼돈을 견디는 힘이 부족해서 아직도 눈이 퀭해지도록 절대적 확신의 순간을 찾아 헤맨다.

그래도 진보는 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일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태반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체득해 가면서 모호함과 혼돈을 견디는 마음이 한 뼘은 자라고 있다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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