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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사람]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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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3-10 09:57 조회2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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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1. 가족 이야기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

안 상 헌

 

‘가치 전도’의 철학자 니체.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남자는 가치를 전도하는 것’. 이것이 삶의 최고 과업임을 선언한 철학자. 니체는 생명을 낳아 생명답게 양육하는 일과 가치를 전복하는 일이 인간이 다시 ‘커다란 건강에 이르는 길’이라 말한다. 바로 이 니체와 함께 ‘모든 가치 전도’를 위한 실험적인 삶의 길을 탐구해보려 한다.

먼저 ‘가족 문제’에서 출발한다. 현대인에게 가족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삶의 공간’인가? 아니면 생명의 힘을 빼앗는 ‘삶의 무덤’인가? 가족이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현대인의 큰 관심사이다. 잘살고 못사는 기준을 나누고, 여기에는 각각 그의 가족력이 작용했을 거라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이 나의 삶을 결정한다고 믿고 가족과 관련된 온갖 것을 끌어와 한 사람의 잘살고 못사는 것의 원인을 말하길 좋아한다. 잘난 사람은 부모, 나아가 조상을 잘 만나고 잘 닮아서 이렇게 잘났고, 못난 사람은 부모와 조상을 잘못 만나 이렇게 못났다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또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통념을 깨는 니체의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가장 적게 닮는다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닮았다는 것은 그의 비천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징표이다보다 고귀한 본성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근원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에 갖는다이러한 근원은 그들을 향해서 가장 오랫동안 모이고 절약되고 축적되어야만 했다위대한 개인들은 가장 오래된 인물들이다.(니체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이 사람을 보라박찬국 옮김아카넷, 2022, 36~37)

 

사람은 자기 부모를 가장 많이 닮고, 다음은 할아버지, 그다음은 증조할아버지, 또 그다음은 고조할아버지를 닮는 것(아니면 격세유전이든)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생각을 뒤집는다. 뿐만 아니라 고귀한 본성일수록 자기 부모에게서 나오지 않고,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옛날에 그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모이고 절약되고 축적된 결과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어쩌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문명권에서 가장 큰 힘을 발현한 조상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시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모를 닮아가는 삶 vs 문명의 근원을 찾아 가장 큰 힘을 발현한 인물을 닮아가려는 삶! 니체는 이 둘을 대비하고 후자를 통해 전자의 비천함을 극복하려 한다. 이 시도는 니체 삶의 후반기에 저술한 자서전적 글에서 밝힌 것이기에, ‘가족 문제’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사유를 풀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현대인들에게는 가족이라는 것을 지탱하는 하나의 강력한 신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조상을 잘 만나야 훌륭한 가족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체 가족이 온전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니체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 부모를 가장 적게 닮고, 많이 닮을수록 비천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토록 잘난 부모를 바라고 있을까? 또 인간의 고귀함은 자신이 속한 문명권의 근원적 힘을 얼마나 압축하여 발현하느냐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하지도 않은 현재의 완전체 가족을 갈망하는 것일까? 니체의 가족 관련 사실들에 비춰 하나씩 풀어가 보자.

 

조상을 잘 만나야 잘산다?

니체라는 한 인간의 삶에서 그의 가족은 실제로 어떠했고, 니체는 어떤 사유를 했을까? 니체의 가족 계보를 살펴보면 “우선 니체의 조상은 16세기까지 추적해볼 수 있다. 알려져 있는 2백 명이 넘는 조상들은 모두 독일인이다. 그들 중 몇몇은 소작농이거나 농부였고(귀족은 한명도 없다), 대부분은 모자 장수, 목수, 푸주한과 같은 소상인이었다.”(홀링데일, 『니체-그의 삶과 철학』, 김기복·이원진 옮김, 북캠퍼스, 2017, 16쪽) 또 “니체의 선조들은 대사원이 있는 나움부르크 일대에서 도살업과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색슨족의 후예였다. 니체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니체는 목사가 되면서 신분을 높였고, 부주교의 딸인 에르트무테 크라우제와 결혼해 신분을 한 단계 더 높였다.”(수 프리도, 『니체의 삶-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진정한 삶』, 박선영 옮김, Being, 2022, 21쪽) 이렇게 니체의 조상들은 모두 독일인이고,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상인의 신분에 자족하지 않고 신분 상승의 욕구가 높았다. 경제적으로 살만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매우 성실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제적 조건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는 목사가 되어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 애쓴 집안이었다. 우리 시대로 말하면 니체의 할아버지 대(代)에 와서는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간략한 니체의 족보를 가지고 우리 시대의 가족 문제로 돌아와 보자. ‘할아버지를 잘 만나야 잘 산다.’ ‘할아버지를 잘 만나야 최고의 사교육을 받을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간다.’ 등등. 부러움을 품고 현대인들에게 회자되는 말들이다. 그것도 살만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이 말은 더욱 자주 들린다. 부자 할아버지로 상징되는 조상은 그 자체로 좋은 스펙과 뒷배가 되어 후손들이 이 배경 때문에 잘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날로 강해진다. 실제로 할아버지가 부자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제적인 고민 없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 수준의 외국어, 악기, 운동, 여행, 문화 체험을 한다. 남들이 보기에 유별나다고 할 정도이다. 그 할아버지가 대기업 총수 혹은 주요 임원이고 고위 공직자라면 그 돈과 권력의 출처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극소수만이 체험할 수 있는 유별난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중고등학교부터 미국이나 유럽의 최고급 학교를 다니고,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 다르고, 예체능의 최고 전문가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는 등. 이들은 참 많은 것을 누린다. 그러니 모두가 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니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누림’이라는 것이 삶에서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무한한 ‘누림’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나요? 삶을 남과의 비교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타인에 대한 갑질의 기회 측면에서 보면 이 ‘누림’은 분명 많고 클수록 좋다. 하지만 한 생명이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어떻게 축적하고 활용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삶을 본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이 ‘복됨’과 ‘누림’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너무 소모적이다. 이들은 타고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다. 이것은 생명을 건강하게 양육하기보다는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니체는 이를 ‘가짜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 일갈한다. 니체 당시 생명의 본성에 반하는 속물 교양인들의 교육과 문화 행태를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비판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 현재에도 ‘태어나니 할아버지가 누구였더라’라는 손주들의 경우 그 삶이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삶이란 것이 ‘단 한 걸음이라도 자기 힘으로 걸어가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이들이 누리는 많은 좋은 조건들이 실제로는 삶에 ‘독’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힘을 하나하나 발현하는 방향으로 양육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 어떤 것도 삶의 건강성을 키워가는 데 좋지 않다. 외적인 화려함을 위해 내면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생명의 차원에서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니체에게 그것은 나쁜 방향으로 전도된 삶이기에 다시 그 가치를 전도하는 것이 인간의 과업이다. 그러니 니체에게 조상을 잘 만났다는 삶의 조건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내 힘으로 하지 않은 것이 내 삶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자신의 감각으로 넓은 세상과 깊게 소통할 기회를 박탈당할 확률이 그만큼 높다.

그렇다면 조상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관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혈통 문제를 언급하면서 “나는 나쁜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고 독일 피는 거의 섞여 있지 않은 폴란드 귀족이다.”(니체,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한다. 니체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니체가 가족과 삶을 어떻게 사유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데 중요한 메시지가 담긴 말이다. ‘평범한 소상인의 가족 계보’, ‘억지로 올라간 사회경제적 신분’, ‘갑자기 무너진 가족이라는 울타리’. 이것을 니체가 몰랐을 리 없다. 그는 현대인들이 흔히 믿고 있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물려받아 안정된 조건에서 사는 삶, 이를 바탕으로 더 높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삶을 비천한 삶이라 일갈한다. 대신 니체의 철학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고귀한 삶을 추구하는 니체에게 당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훌륭한 조건을 갖춘 조상은 장애 요소였다. 현실적으로 또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안정되고 편안한 조건들은 인간의 고귀함을 갉아먹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당대 이러한 현실을 새롭게 사유한 것이 니체 철학의 출발점이다. 혹자는 니체의 철학을 역사적 현실을 잘 모르는 순진한 철학이라 비아냥거린다. 그렇지 않다. 니체가 왜 현실을 몰랐겠는가. 니체가 사유했던 것은 훌륭한 가족이라는 환상 속에서 누리는 특권이 과연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이들이 누리는 특권이라는 것은 니체가 진정 키우고자 하는 생명력의 발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은 대가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다. 바로 이 이유에서 니체는 ‘가치 전도’를 자신의 과업으로 설정한다.

완전체 가족에서 온전한 삶이 가능하다?

가족에 대한 또 하나의 맹신적 신화가 있다. 특히 핵가족이 특징인 현대사회에서는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완전체 가족이 있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완벽한 가족의 모습. 어느 것 하나라도 망가지면 삶이 송두리째 훼손되었다고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럴까? 니체의 가족은 어떠했을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니체의 가족은 완전체는커녕 완전히 망가진 가족이다. “니체의 아버지 루트비히는 목사 집안 출신이며, 스스로 목사를 지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목사의 딸이었다. 그 점에서 니체는 독일 정신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전형적인 가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미시마 겐이치, 『니체의 생애와 사상-가면과 고독』, 남이숙 옮김, 한국학술정보, 2023, 25쪽) 중산층 집안 출신의 아버지 루트비히는 자연스럽게 목사가 되었고, 또 다른 중산층 출신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다. 루트비히는 “서른 살이 되던 1843년 10월 10일, 프란치스카와 결혼식을 올리고 어머니가 집안을 휘어잡고 있던 뢰켄 목사관으로 그녀를 데려왔다.”(수 프리도, 『위의 책』, 23쪽) 당시 예순넷이었던 니체의 할머니 에르트무테는 과부였고, 그때까지 시집가지 않은 딸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고집 세고 보수적인 할머니와 노처녀 둘. 이들의 힘이 여전히 센 집안으로 시집온 니체의 엄마 프란치스카. 마음고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다행히 결혼 이듬해 프란치스카는 니체를 낳았고, 맏아들 니체의 출생으로 꽉 막힌 시집살이에 약간의 숨통을 트게 되었다.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에 태어났다. “루트비히 목사는 프로이센의 당대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이름을 따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2년 뒤인 1846년 7월 10일에는 니체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알텐부르크에서 가정교사로 지낼 때 가르쳤던 공작 딸들의 이름을 따서 ‘테레즈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라고 지었다. 사람들은 그냥 엘리자베스로 불렀다. 2년 뒤 2월에 태어난 또 다른 남자아이는 공작의 이름을 따 요제프라고 지었다.”(수 프리도, 『위의 책』, 24쪽) 장남의 이름은 왕의 이름에서, 딸의 이름은 공작의 딸들의 이름에서, 차남은 공작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부모의 마음이 재미있다. 자식의 삶은 자기보다 더 높은 신분으로 상승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족에 대한 또 하나의 맹신적 신화가 있다. 특히 핵가족이 특징인 현대사회에서는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완전체 가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 가족의 목가적 평온함은 여기까지였다. 니체의 아버지가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고 이듬해 죽으면서 이 목가적인 생활은 끝이 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신앙심이 깊고 애국심이 강했다. 그리고 자상했다. 하지만 신경질환에 자주 시달렸다. 1848년 가을, 서른다섯밖에 되지 않은 그는 결혼한 지 불과 5년 만에 병석에 누워 사실상 모든 사회 활동을 멈추고 말았다.”(수 프리도, 『위의 책』, 25쪽) 1849년 7월 30일, 결국 그는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1850년 1월 4일에는 남동생이 죽었다.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은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맞이한 운명! 가혹하다면 가혹했다. ‘다섯 살, 남자아이’에게 자상하고 지적인 아버지, 그리고 함께 놀 수 있는 남동생이 있는 가족. 이것은 분명 좋은 성장 조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이 두 가지 환경을 갑자기 박탈당한다. 니체의 어린 시절 상당한 결핍감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이를 극복할 다른 무언가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니체는 이후 여자들만 있는 집(어머니, 여동생, 할머니, 고모들, 하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니체 집안의 모든 여성은 니체를 애지중지했다. 그들에게는 니체가 전부였다. 니체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우월한 작은 신사가 되어 이에 보답했다. 니체는 학교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집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니체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길을 걸을 때 언제나 다섯 걸음 정도 앞에서 걸었다. 진흙이나 물웅덩이 같은 위험이 없는지 살펴보았고, 개나 말이 나타나면 몸으로 막았다.”(수 프리도, 『위의 책』, 41쪽) 어린 여동생과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는 소년 니체의 모습을 재미있게 상상할 수 있다.

니체는 결혼하지 않았고, 당연히 아버지가 되지도 않았다. 니체는 안정적인 삶의 토대를 제공해 줄 수도 있는 가족을 일구는 일에 그리 애쓰지 않았다. 어쩌면 니체는 자신을 특정한 곳에 묶어 둘지도 모를 구속을 마치 본능에 따르듯이 애써 외면했다. 니체는 “1899년 금치산자 선고를 받았고, 어머니가 후견인이 되었다.”(베르너 슈텍마이어, 『니체 입문』, 홍사현 옮김, 2022, 86쪽) 이상은 니체라는 한 사람이 맺은 가족관계의 주요 내용이다.

‘중산층을 완성한 할아버지와 부모’. 그 속에서 누린 ‘짧은 목가적 생활’. 그러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가족의 붕괴!’ ‘여자들에 둘러싸인 환경’, ‘10년 이상의 병치레’. 이런 니체에게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그 속에서 니체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가족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통념에 따른다면 니체의 삶은 ‘힘듦’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떤 것 하나도 현대인이 기대하는 좋은 가족의 특성은 없다. 이 정도면 니체는 청소년기부터 삐뚤어지거나, 아니면 조상에게 물려받은 신분 상승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독하게 공부하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여가는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가진 완전체 가족 관련 코드이다. 현대인들은 후자의 경우가 성공하였을 경우 그 사례를 칭송한다. 하지만 니체의 삶에서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니체는 가족이라는 삶의 조건이 망가진 것에 대해 절망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자신이 성공해서 사회경제적으로 흔들리는 가족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도 않았다. 대신 니체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것도 삶을 긍정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니체의 어린 시절을 서술해 놓은 각종 평전을 읽으면서 눈에 띈 특징 하나로 이 질문에 답해보자. 니체는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일곱 번의 자서전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일기도 잘 쓰지 않는 나에게는 정말 특이한 내용이었다. 니체 자서전 전문을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자서전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관찰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니체의 모든 글은 자기 관찰을 바탕으로 한다. 니체의 이 자기 관찰력은 망가진 가족에 망연자실하거나 이러한 가족을 재건하려는 분투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았다면 키울 수 없는 자질이다.(*니체의 자기 관찰력은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이후에 자연스럽게 논의될 것이다.) 그는 이 힘든 조건에서 온전히 자기를 관찰하는 힘을 키웠다. 그 힘으로 니체는 삶을 해석하고 긍정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유를 메모하고 글을 썼다. 그 결과 오늘의 니체로 남아있다. 역으로 아버지가 오래오래 살아계시고, 할머니는 자상하게 손자·손녀들을 돌보고, 여동생은 장남인 오빠 말을 잘 듣고, 남동생도 건강하게 잘 자라서 니체만큼이나 똑똑하였다면. 니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니체라는 이름과 참 안 어울린다. 이들 조건에서 장남 니체는 어떤 삶의 무게를 느꼈을까? 또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았다면 니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스위스 혹은 독일의 평범한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니체는 없다.

가족과 삶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있을까? 자식 마음대로 존재하는 부모가 있을까? 아무리 애써봐도 조상과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잘 자라서 세상에 자리를 찾는 자식은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마음에 쏙드는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가족에 집착해 왔고, 그 집착은 여전하다. 이들에게 가족이 삶의 무덤이 되지 않고 생명을 낳고 키우는 관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삶’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정립해야 하는가?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조상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면 지금 내 삶의 조건과 현실에서 내가 만들면 된다. 니체가 폴란드 귀족을 자신의 조상으로 만들었듯이. 어차피 위대한 조상들은 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성가신 일이라면 조상은 별로 신경 쓰지 말고 살아가면 된다. 나아가 현재의 가족 때문에 힘들다고 자기 삶을 그 속에 가둘 필요도 없다.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자식이 성인이 되는 순간부터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선언하고 관계를 새롭게 만들면 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순간 가훈을 ‘각알(각자 알아서)’로 정하고 가정은 최소한의 베이스캠프면 충분하다. 그 순간 각자의 삶이 보일 것이다. 훌륭한 조상과 완전체 가족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아버지, 혹은 엄마가 병들거나 일찍 죽으면 어떻게 하나? 결혼하지 않아 혼자 살면 어떻게 하나? 부부 중 누가 먼저 죽어서 독거노인이 되면 어떻게 하나? 등등. 그 어떤 것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걱정한다고 이런 일이 없어진다면 이미 다 없어졌을 것이다. 그 어떤 변화도 이제 진정 자기 삶을 살아갈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일 뿐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조상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면 지금 내 삶의 조건과 현실에서 내가 만들면 된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훌륭한 부모와 완전체 가족을 바라는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에는 내 삶의 조건들이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삶이란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사유한 철학자이다. 니체를 ‘생(生)철학자’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사유하면서 일상의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과정, 이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가장 본원적인 과업이다. 이들에게는 결과가 아니라 시도와 과정 자체가 삶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갖춰줄 능력이 있는 부모와 완전체 가족은 인간이 가진 생명력의 발현을 오히려 방해한다. 니체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 철학자이다.(*그것이 그의 허무주의 철학이며, 차후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대신 니체가 요구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 그 자체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이 사유에 이른 니체에게 가족이 처한 이러저러한 조건들은 그저 현대인들의 눈을 가려 스스로 삶을 왜소하게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부모든 자식이든, 서로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완전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버리자. 어떤 부모 자식이든 서로의 인연으로 만나 지지고 볶는 오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이제 훌륭한 부모와 완전체 가족을 위해 쏟았던 에너지를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탐구로 전환해보자. 이 전환은 곧 우리 모두를 각자의 고귀함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삶으로 이끄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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