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아시타 선인에게로 가보자. 신들에게 빅 뉴스를 전해 들은 아시타 선인은 한달음에 아기왕자에게 달려갔다. 과연 “불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체처럼 맑으며,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의 태양처럼 밝은 왕자”였다. 떨리는 손으로 왕자를 품에 안은 선인은 이 작은 아이의 몸에 담겨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시타 선인은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그는 단박에 이 아이가 자라 장차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최고의 가르침을 펼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은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타의 눈물,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역설한다. 아시타 선인처럼 진리를 알아볼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해도 간발의 타이밍 차로 눈앞에서 문이 닫히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시타의 간절함 만큼은 절대 무화되지 않았으니, 만약 세속적인 욕망에 정신을 쏟고 사는 우리의 마음 저 밑바닥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불씨가 희미하게나마 살아있다면, 그것은 아시타 선인이 눈물로 전하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싸끼야 족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우리 왕자에게 무슨 위험이 닥칩니까?” 아시타 선인은 눈물을 거두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 왕자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가장 으뜸가는 청정을 보고,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고 많은 사람을 애민히 여겨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삶은 널리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수명으로는 그 뛰어난 가르침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왕자의 앞날을 두고 두 가지 길을 예언했던 다른 현자들과는 달리, 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 왕자의 미래는 스승으로서의 외길뿐이라고 명쾌하게 단언했다. 전륜성왕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렸을 쌰끼야족 사람들로서는 아시타의 예언이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만.
쌰끼야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궁중에서 물러난 아시타 선인은 서둘러 조카 날라까를 불렀다. 아직 젊은 조카라면 장차 싯다르타 왕자가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펼칠 때 찾아가 가르침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숙부의 가르침을 따라 그날부터 공덕을 쌓고 감각적 쾌락을 절제하며 붓다의 출현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그리고 3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날라까는 숙부의 예언대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35년 전 흘렸던 아시타의 눈물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 진리를 아쉬워하는 마음이 간절한 기다림을 만들고, 그 기다림은 다시 진리의 말씀을 흡수할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붓다를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그 순간 날라까의 마음을 잠시 상상해보자. 신들의 환희, 아시타의 눈물, 날라까의 마음. 이토록 깊고 진한 마음을 우리는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붓다의 말씀은 창백한 진리가 아니라 이러한 마음의 동조와 파동 속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