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을 하더라도 광대는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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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5-12-31 21:22 조회6,944회 댓글1건본문
단식을 하더라도 광대는 되지 말자
- 바람에 저항하면 늑대가 되어 돌아온다.
김지혜(목요감성)
어설픈 첫 만남, 나의 정체.
나는 이번 에세이에서 내가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히 「단식광대」의 결말에 중점을 두었다. 요약해보자면, 「단식광대」는 단식이라는 기예를 전문적으로 하는 광대의 이야기이다. 과거에는 단독으로 공연을 열어도 밤낮으로 구경꾼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세상의 관심이 변했다. 심지어는 혐오하기도 한다. 늙은 단식 광대에게는 예전부터 보통의 단식기간인 40일을 넘어서까지 단식을 해보고픈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기 의지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이제야 정작 세상을 제대로 놀라게 해주겠노라고”(카프카, 단편전집, page296) 말하면서 단식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커다랗고 볼거리 많은 서커스의 구석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단식을 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에 겨우 발견된 그는 “저는 단식을 할 수밖에 ...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하는 수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찾아냈다면, 저는 결코 세인의 이목을 끌지는 않았을 테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가 부르게 먹었을 것입니다.”(카프카, 단편전집, page300)라는 반전 고백을 하고 죽는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표범이 들어온다. 단식광대와 너무도 대비되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는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표범이 등장했을 때에 나는 단식광대가 환생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그런 것이기를 빌었다. 그가 드디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고 행복해지겠구나! 이대로 끝나는 것은 너무 슬프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곧 나는 실망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넘치는 생명력을 가졌어도 철장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표범은 단식광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표범에게서 뿜어져 나와 이야기 속의 관중과 나를 매료시켰던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퇴색해버렸다. 이제 나에게 그것은 철장에서 나올 길이 없는 일개의 짐승으로, 먹이를 받아먹는 굴욕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인간과 달리 철장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궁리할 수도 없기에 미래에도 영영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 안에서 한탄의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왔다. “철장이라도 조금 더 넓었더라면 그나마 지내기가 나을 텐데!!” 그 목소리를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채운선생님의 강의 중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에 대한 부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원숭이는 인간들이 신봉하는 “사방으로 열려진 자유”(카프카, 단편전집, page 261)란 결국 더 큰 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개념은 카프카가 꼬집은 근대인의 자유에 대한 개념과 꼭 닮았다. 탈출방법을 궁리할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가 동물의 것보다 나을 거라는 추측은 또 어떠한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으며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것은 “이성”때문이라는 것은 근대인에게 매우 익숙한 의견이다. 또 먹이를 받아먹기 때문에 굴욕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지점을 살펴보자. 나는 먹이를 받아먹는 다는 것을 즉, 의존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나는 “의존”은 나약하고 비겁한 생존방식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다. 나에게 의존이 부끄러운 방식이라면 그 반대의 당당한 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 힘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 아무에게도 도움도 받지 않고 민폐도 끼치지 않는 삶?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들만큼 버는 직장이 있거나 혹은 안정된 가정에 속해있거나 아니면 무슨 저작권이 있어서 저작권료가 따박따박 들어와서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산다... 정도일까? 내가 언제부터 당연히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과 습관적으로 욕망하는 자유는 몹시 근대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단식광대를 통해서 들여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안에는 근대가 가득하다. 또는 내가 서있는 곳은 근대의 안쪽이다. 아직은.
두 번째 만남, 출구에 대한 환상을 벗어나서 막다른 길로.
그렇게 내 안의 근대를 슬쩍 보여주었지만, 내게 「단식광대」는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가득하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했다. 나와 「단식광대」는 이렇게 실망스러운 기억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지난 의역학의 마지막 수업, 장금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단식광대의 결말이 다시 반짝하며 새로운 뜻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과거에는 고립된 개체에게 책임이 부과되었으나, 새로운 타당성에서는 ‘체계(system)'에게 부과되었다. ... 이런 이유일 수도 있고 저런 이유일 수도 있다. 사회경제적 체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한 우리에게 유기체는 언제나 체계이다.” (파울 U. 운슐트, 의학이란 무엇인가, page373)
"체계로 설명되는 한 유기체는. ... 체계에 묶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박장금, 목성 의역학 12/10 강의안, page 11)
내가 철장이라는 한계에 집착하고, 그 한계를 탓하느라고 묶여버린 걸까? 나는 출구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다시 텍스트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단식광대가 표범으로 환생한 것이라는 가정은 여전히 유지하며 읽었다. 철장에 대한 나의 우려와 달리, 단식광대는 무언가를 했고 그래서 출구가 없어도 새로운 영토를 찾아내어 표범으로 환생한 것이라면? 철장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날 「단식광대」를 복사해서 출근할 때에 가져갔다. 일할 때에 입는 가운의 주머니에 맞게 접어서 틈틈이 읽었다. 무의미한 대기시간이 스릴 넘치고 참된 시간이 될 줄이야 ! 베어하우스의 나경언니가 세 개의 학기 동안 에세이 철이 올 때마다 “텍스트 하나를 잡아서 파고 들어야해”라고 조언해 주시던 것을 4학기가 되어서야 어설프게 해보았다.
단식광대는 전에도 단식을 했다. 변화가 생긴 것을 보니 이번에는 단식을 했다는 것 말고도 무언가를 다르게 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큰 서커스에 합류했다. 그는 40일을 넘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했다. 시대도 변했다. 아무도 그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는다. 그토록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프카가 살아있을 때, 그의 글쓰기는 관중 또는 대중의 갈채를 받지 못했다. 어쩌면 단식이 의미하는 것은 글쓰기일지 모른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돌아와서 밤에 글을 썼던 것을 40일을 넘어서 단식을 한 것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밤마다 갈채를 받지 못한 단식광대와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카프카도 갈채를 받고 싶었나? 흠.. 어딘가 미심쩍다.
「단식광대」는 예전에 단식으로 (허울만 좋은) 영광을 누리며 갈채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때에 카프카가 글쓰기로 영광과 갈채를 받은 적이 있나? 그의 생애를 다룬 책을 찾아 읽기에는 에세이 마감 날이 너무 가깝다. 또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은 도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영토에 이르는 것은 표범이 되어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가 되는 건데, 표범은 어떠한가? “당직자들은 오래 생각해보지 않고도 그것의 입에 맞는 먹이를 가져다주었다.”(카프카, 단편전집, page301) 표범은 그 음식을 이미 알고 먹는다. 그것과 생명력은 직결되는 것 같다. 단식을 극단까지 해서 넘어간 새로운 영토에서는 또 음식을 먹는다고? 여기서 나는 완전히 막혔다. 이럴 때는...
샛길로 잠깐 새기, 사실은 집과 바람이 주인공인 이야기.
여기에서 조금 엉뚱하지만 다른 이야기의 도움을 받았다. 이 익숙한 동화가 새롭게 보인 것은 채운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선생님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인간의 문명에 대한 착각을 유머러스하게 꼬집고 있다는 설명과 카프카의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스위트홈이 무슨 의미로 등장하는 지를 설명하실 때쯤이었을 것이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이야기는 아기돼지들이 부모님의 집을 나와서 독립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는 게을러서 대충 볏단으로 움막을 지어놓고서 빈둥거린다. 둘째는 조금 나아서 나무집을 짓지만 대충 짓고서 빈둥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셋째는 아주 현명하고 성실하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가 그만 놀고 쉬라고 말해도 흔들리지 않고 꼼꼼하게 벽돌집을 다 지을 때까지 쉬지 않는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나서 거센 입김을 불어서 첫째와 둘째의 집을 날려버린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잡아먹혀버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셋째의 집으로 도망을 친다고도 한다. 중요한 것은 벽돌집은 늑대의 거센 입김으로 일어난 바람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가 벽돌집 덕분에 살아남는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 부분이다. 마지막에 입김을 불다가 불다가 지쳐서 늑대가 죽어버린다는 결말도 있고 또는 삼형제가 사이좋게 벽돌집 안에서 음식을 해먹는데 어리석게도 굴뚝으로 침입하려는 늑대가 떨어져서 불에 타죽는 결말도 있다.
예전부터 이 동화에 탐탁치가 않은 점이 있었다. 먼저, 가장 나이가 많은 첫째 돼지가 가장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둘째가 좀 더 낫고 셋째가 가장 현명하고 능력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꼭 내가 삼남매 중의 맏이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이 부분이 채운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도중에 인류의 문명사를 단선적인 진화와 진보의 역사로 보는 시선과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기 돼지들은 다름 아닌 집을 짓는다.굳이 설명하자면 첫째돼지의 움막은 구석기 시대의 주거형태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중세 즈음 되려나? 셋째의 벽돌집은 근대의 주거형태를 닮았다.
“결국 근대의 역사에는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과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단 하나의 평면만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평면을 이끌어가는 척도가 바로 진보다. 미개와 진화, 야만과 문명의 차이는 결국 시간적 차이를 지칭하게 된다. ... 그런 기준에 따르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은 앞의 시기가 뒤의 시기보다 열등한 것이고, 달리 말하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성숙해지는 수직적 위계를 지닌다. ” (고미숙, 계몽의 시대, page66)
건축기술보다도 집을 짓는 삼형제의 태도와 그 집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의 차이가 중요하다.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의 “게으르면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부지런히 집을 지어라!”는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여 미리 성실하게 노동하고 축적하라!”는 근대문명 자본시스템의 구호와 꼭 닮았다. 카프카의 소설에는 집, 가정,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소설 속에서 스위트홈은 결코 스위트하지 않다. 집도 아버지도 결국 기존 사회의 영토에 정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코드와 명령에 순응해야 가능한 일이다. “근면하게 노동하고 정착하여 축적하라!” 카프카의 시선으로 본다면 주인공이었던 아기돼지들보다 집이 더 중요해진다. 집 즉, 스위트홈은 근대문명의 홈 패인 공간에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한다. 돼지들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욕망의 대리자일 뿐. 아기돼지보다도 집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두자 동화에 대한 의문점이 흥미로워졌다. 또 다음 의문점에 대한 실마리도 얻었다.
다음 의문점이란 왜 늑대가 입김을 불어서 바람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늑대가 보통 무리생활을 하며 전략적으로 사냥을 한다는 점을 동화에서 똑같이 살릴 필요는 없다고 치자.아무리 그래도 바람은 너무 생뚱맞다. 날카로운 이빨을 쓰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부셔버리는 것도 아니다. 이 지점에서 실마리가 힘을 발휘했다. 아기돼지보다 집이 더 중요했듯이 늑대보다 바람이 더 중요하다면? 집이 문명에 대한 것이라면 그에 반대되는 바람은 자연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거센 바람을 불어대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같이 거센 바람”인 거라면?
안주하고 싶은 욕망에 집착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라는 자연의 이치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게 된다. 바람은 우리에게 때를 알려주려고 자연이 보내는 신호다. 계절이 바뀔 때, 인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때, 마음을 접어야 할 때. 그리고 정착했던 집을 나서서 길로 떠나야 할 때 등등. 그러나 우리가 돼지의 집에 숨어서 바람에 저항하기로 할 때 바람은 늑대처럼 매섭고 난폭한 존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진보했다는 착각에 빠진 셋째 돼지들이 잊은 것이 있다. 자연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다는 것. 돼지는 집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집이 견고해지고 자연과 멀어질수록 그렇게 열심히 지키려고 했던 자신으로부터 멀어져서 궁극적으로는 영영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면 늑대의 일시적인 난폭함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내가 산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이 이상적으로 그려준 인생을 흉내 냈을 뿐이었고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때의 공허함이란.
그 공허함에 제대로 맞고 행동패턴을 바꾸기 전에는 나에게 바람이란 언제나 무시무시한 늑대와 같았다. 다만 내 삶을 돌아보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매서웠다. 그 바람은 지치지도 않고 불어왔다. 그럴 때마다 두려워서 또는 방법을 몰라서 바람을 따르지 않고 저항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생긴 결과와 후회는 고스란히 자기비하가 되어 돌아왔다. 내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자체가 결함같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바람의 존재도 모르고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데 나는 왜 계속 비슷한 바람에 괴로워하는 지 원망스러웠다. 나는 어쩜 항상 쓸모없는 것에 끌리는 건지, 어떤 결함을 타고 났기에 현실적이고 똑 부러진 누구누구처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할 수 없는 건지 답답해하고 속상해하며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찍어 내렸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나름 해석한 맥락에서 본다면, 바람(변화하고 싶은 욕망)에 돼지(홈 패인 공간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가 저항할 때마다 내 안에는 자기비하라는 난폭한 늑대가 들끓었던 셈이다. 돼지가 더 높고 튼튼한 집을 지을 때까지.
내가 바람에 저항하고 근대 안쪽에 머무르겠다고 선택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세 번째 만남, 표범이 돌아왔으니 서커스를 끝내보자
내 안에서 부는 바람도 그리고 돼지까지도 결국 모두 욕망이다. 욕망!! 만약에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도 욕망이라고 보면 어떨까? 더 자세히 보자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았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고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진정한 욕망을 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행합일? 자기배려의 윤리? 표범의 생명력이 다시 빛을 발하며 돌아오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단식의 의미가 다시 보인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건 욕망을 찍어 내리고 참는다는 것이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려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단식광대는 단지 카프카 한사람의 자전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카프카가 자기의 독신자 생활과 글쓰기의 고됨에서 오는 비참함, 외로움을 하소연하려고 쓴 게 아니었단 말이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단식은 ‘기예‘다. 숙련된 기술이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참는 일종의 단식기예를 배우는 곳이 학교다. 더 높은 학교에 가서 더 숙련된 단식의 기예를 익힌 단식광대들이 더 높은 우대를 받는다. 그런 단식광대를 우리는 “지성인, 정상인, 교양인”과 같은 말로 부른다. 과중한 사회의 의무를 다 하려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은 욕망이나 입맛에 맞는 음식과 같은 욕망은 찍어 내리는 수밖에 없다. 누가 더 단식을 잘해서 더 많은 의무를 하며 사는지 경쟁한다. 그러다보니 단식만 할 줄 알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마음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인지는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거나 알아내서 처리해줄 사람을 고용한다. 반면에 표범이라는 동물을 보라. 그냥 태어난 그대로 자신으로 있기에 주변에서도 그것이 무엇을 먹을 지를 바로 알 정도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 척하느라 입맛에 맞는 음식을 모르거나 잊는 일 따위는 없다. 이제 누가 누구보고 우월하다고 하는지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보자 눈여겨보지 않은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단식광대가 동물우리근처에 놓여있기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오죽 냄새가 나고 시끄러웠으면 하고 그냥 넘어갔다. 특히 “마음을 짓누른다."(카프카, 단편전집, page298)는 표현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진정한 욕망을 단식하는 기예”라는 관점에서 보자, 동물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에 영향을 받아 그의 내면에 바람이 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바람에 비하면 관중의 갈채를 받지 못하는 당시의 처지가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자신이 사실은 음식을 찾지 못해서 단식을 했을 뿐이라는 반전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이미 사회의 규정인 40일(이것도 마치 계속 일을 하게 하려고 주는 휴가제도들과 겹쳐 보인다)을 넘겨보는 열망을 따라서 가는 참이었다. 그는 돼지의 집에 숨어있기를 그만두고 바람을 따라서 가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안팎의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그저 어쩔 도리가 없었을지도.
그런데 「단식광대」의 이야기 속에는 단식기예를 하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바로 ‘관중들’. 그들이 표범을 보면서 “기분전환”을 한다. “표범의 목구멍 속에서는 삶의 기쁨이 어떤 강렬한 격정과 더불어 흘러나왔는데, 관중들에게는 그것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견뎌냈고, 그 우리로 몰려들어 주위를 에워싸고는 전혀 떠나려 하지 않았다”(카프카, 단편전집,page301) 이는 자신의 욕망을 단식하여 속이 공허한 자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광대로든 관중으로든 서커스 같은 이 시스템에 참여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좋은 딸, 성실한 일꾼이란 “허울 좋은 영광”(카프카, 단편전집, page294)을 얻으려 자신의 욕망을 단식하는 광대로 살다가 지치면 대중매체를 보면서 자신의 공허를 망각하는 관중으로 그리고 다시 단식광대로. 쇼를 하고 쇼를 보고의 무한반복. 쇼비지니스 세계에는 유명한 말이 있다. "THE SHOW MUST GO ON."(무슨 일이 있어도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해도(그런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정상인으로는 살아야한다. 성실한 광대이자 분수를 아는 관중으로. 이 거대한 서커스는 계속 되어야하므로.
네 번째 만남, 환상을 걷어내고 낯선 영역에서 만난 것은 삶의 예술가.
만약에 나의 바람과 달리 단식광대가 표범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글을 다시 읽는 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흐려진 눈에는 더 이상 자랑스럽지는 않더라도 확고한 확신이 여전히 담겨있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단식을 하리라는 확신이.”(카프카, 단편전집, page300) 아이고, 이제 보니 카프카가 분명하게 단식광대는 계속해서 단식을 하리라고 말했건만 나는 해피엔딩을 바라느라 그 문장을 자체적으로 검열해버린 모양이다.
단식광대는 죽었다. 즉 자신을 극복하고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단식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이건 무슨 말일까? 아직도 자신의 욕망을 모른다는 말일까? 카프카는 결혼하고 싶은 욕망과 결혼하고 싶지 않은 욕망 사이에서 계속 갈등했다고 한다. 그가 충분히 생각하지 않아서 자신의 욕망을 몰랐다거나 솔직하지 못해서 갈등이 계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욕망이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어렵다는 뜻일까? 오래된 욕망이 새로운 모습으로 올 때마다 다시 마음을 살피고 “결심”(카프카의 다른 단편까지 다르게 보인다. 히히 재밌다)을 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어렵사리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알아내도 현실에서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 살아가자면 욕망의 단식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다. 인간의 사회엔 출구가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고 살아있으니까 단식을 계속하리라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극복했으므로 전과는 달리 갈채를 위한 단식이 아니라 자신으로 살기위한 단식을 할 것이다. 마치 카프카가 그 고된 삶을 끌어안고서 아무런 조건 없이 글쓰기를 계속했듯이 말이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카프카식의 결론은 더 이상 내게 슬프거나 의미 없지 않다.실망과 절망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결론을 그의 식으로 받아들이니 익숙하지 않고 낯선 지점까지 올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전직)단식광대는 이제 자신을 위해서 단식하는 삶의 예술가로 표범 못지않게 빛난다고 느껴진다. 자유나 성공의 환상을 넘어 끝없는 실패에 개의치 않고 계속 시도하는 삶.
결론 :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요번 의역학 수업들에서 얻은 문장 중 하나가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이 되지 않는다.”이다. 질병도 일종의 바람이다. 자신의 몸과 맺는 관계를 바꿀 때라는 신호의 바람. 건강이라는 기준에 집착하며 마주칠 때 질병은 저주와도 같고 병자는 게으른 죄인이 된다. 질병의 모습으로 찾아온 바람에 저항을 하게 되니 늑대와도 같이 난폭하게 느껴지고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은 이중삼중이 된다. 그러나 원래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법이라고 질병은 단지 나의 일상패턴의 변화를 주라는 신호라고 생각하면 질병과의 마주침은 저주가 아니다. 이번 학기의 책들의 주제인 “길과 질병”이 에세이의 주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되는 지점을 나는 이렇게 보았다. 우리가 길, 질병과 어떻게 마주칠지를 미세하게 명령하는 근대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르게 마주치며 살아가자 ! 어떻게 마주치느냐에 따라서 길과 질병은 우리 삶에 너무도 다르게 온다.
내 식으로 바꾸면 “욕망에 저항하지 않고 인정하면 늑대가 되지 않는다.” 또는 “단식을 하더라도 광대는 되지 말자.” 이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겨우 답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삶의 길목에서 “출구 없음”들과 마주칠 때마다 카프카처럼 계속 나아가고 싶다. 그것이 단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모습을 하고 있을 근대의 욕망들과 마주쳤을 때 예의 습관적인 순응이 아닌 다른 관계를 맺고 싶다.그들이 나를 돕는 상생의 기운이 될 수 있도록. 그러려면 근대 밖의 방식으로 마주쳐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금의 내게 그것은 (두려움과 무거움으로 계속 늦어지고 있는데) 집을 나와 공동체생활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할 수밖에....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하는 수가 없습니다." (카프카. 단편전집. page300)
댓글목록
애독자님의 댓글
애독자 작성일
텍스트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시도때도 없이 읽었다니... 도대체 에세이가 뭐길래!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고행을 사서 하다니, 이 글이야말로 단식광대의 기이한 투쟁이로군요!
틀지워진 삶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흔히 모범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아기돼지 삼형제 중 셋째 돼지의 삶이 사실은 스위트홈의 환상-근대의 홈패인 공간에 안주하는 반자연적인 삶이다. 이렇게 사회적 표상에 자신을 맞춘 삶에서는 억압된 자연의 본성이 늑대처럼 거센 바람으로 휘몰아쳐 자신을 파괴하려고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셋째 돼지처럼 바람에 안전한 집을 다시 지을 것인가? 단식광대처럼 모든 성공과 실패의 표상 너머 바람과 함께, 바람이 되어, 다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인,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유라는 환상 너머, 하나의 출구가 될 것인가?
텍스트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뒹굴 때마다 내 안에서, 또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텍스트의 이면을 보게 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부디 에세이 대박나서 <저작권료가 따박따박 들어와>야 할 텐데 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