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상 터전이었던 연구실을 정리했다. 새로운 길 나섬을 위한 채비다. 난 이곳에서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음악을 듣고, 도시락과 간식을 먹었다. 그야말로 내 일상이 녹아 있는 방이다. 또 나의 반려인 책들이 숨쉬는 곳이다. 이 공간은 편하고 안온하다. 이 방은 방문자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심신이 지친 학생들이 연구실에 찾아와 웃고 울다, 밝은 표정이 되어 나가는 뒷모습도 이 방에서 지켜보았다.
이제 익숙함과 정겨움을 버리고 미지의 길로 떠난다. 아니 이미 길을 나섰다. 주변 정리는 떠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먼 길 위에서 거치는 하나의 스치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머물러 있으면서 하는 정리는 재미가 없다. 그것은 청소이지 정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과 책들을 요리조리 보면서, 그 기억에 빨려 들어가, 감상의 우물에 퐁당 빠지기도 했다. 때문인지 출발 준비로 한 정리는 나를 무겁게 했다. 그래서 난 망설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길을 나섰고, 그 길 위에서 하는 정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몸과 마음이 명랑해지고 콧노래까지 나왔다.
길을 나선 이에게 물건은 어떠한 것이든 짐이 된다. 책 또한 짐이다. 길을 위한 나침반이 되는 책 만을 동행하고 다른 책들과는 이별을 했다. 책들과의 이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별리 만큼이나 가슴이 아려 왔다. 그 이별은 아프지만 그러나 새로운 만남과 인연으로 가는 발판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