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0 강감찬 고전학교 시즌 렉쳐 쓰기 / 문영순 02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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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영순 작성일24-06-29 22:41 조회2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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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0강감찬 고전학교 시즌4 2학기 렉쳐 글쓰기 24. 7. 3 ..수. 문영순
장자와 남편의 죽음
장자는 춘추전국시대,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생명의 보존’을 출발점으로 철학을 시작했다. 장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의 활력을 잃지 않고 일상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늘 노병사의 고통과 만나며 살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남편의 죽음이 가져온 마음속 고통이 장자의 가르침과 만나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깊은 변화를 느꼈다, 장자의 가르침이 아득히 먼 도의 세계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022년 7월 20일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입원 한지 딱 한 달 만이다. 두어달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했었다. 병원에 갔더니 치료불가 진단이 났다. 20 년 전부터 발견된 간경화가 치료 불가 상태로 된 것이다. 남편도 가망 없다는 기미를 알아 차렸다. 얼마 후 그는 나를 앉혀놓고 “ 난 괜찮아.”라고 말하며 옛날 이야기를 시작 했다, 20대에 월남 참전 시 함께 타고 있던 전우 세 명은 죽고 자기만 살아났다고 했다. 그 후 열심히 살아서 후회 없다고. 그리고 “ 내가 가면 당신이 억울 할꺼야.”라고도 했다. 결혼 40여 년 동안 생활비 부담, 그밖에 경제 난국들을 내게 짐 지운 사과의 말이었다. 내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빨리 나아서 집으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편안히 잘 보내기 위한 간호에만 집중했다. 마지막 날 밤 2시간에 걸친 지독한 통증으로 인한 울부짖음만 없었더라면 그는 더 편안하고 고요한 임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도 혈압이 떨어지며 고통도 끝나 고요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갔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시골로 이사와 산 지 20년. 함께 가꾸던 정원은 온갖 잡초가 키만큼 자라 폐가 같았고 집안에는 주안 잃은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보였다. 함께 살아 온 일상이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 찬 나홀로 일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격렬한 슬픔은 유품을 정리하며 조금씩 갈아 앉았지만 여전히 우울했다. 2년 후 집이 팔렸다. 은행빚도 정리했다. 그때 까지도 어디 가서 사나 하는 막막함 뿐이었다. 함께 마을을 이루자는 지인의 권유로 바다가 가까운 새 땅으로 이사를 했다. 컨테이너에 짐을 정리하고 임시거처로 농막을 마련했다. 농막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어둠과 적막이 날 더 힘들게 했다. 다음 날부터 가까운 바닷가로 갔다. 2km 남짓 거대한 갯벌이 있었다. 매일 그 곳으로 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갔다. 몇 달이 지나서인가 나는 살아 있어. 나도 죽을 거야. 어떻게 살지? 하는 말이 계속 들려 왔다.
그즈음 감이당에 왔다. ‘친구가 있고 지혜가 있다. 수요일 오후 시간 있으신 분 오세요!’ 6080 고전학교 광고 문구가 날 끌었다. 장자를 만났다. 1학기 낭송대회에서 자래의 말을 낭송했다.
대저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지.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을 수밖에.
오강남풀이 장자 297쪽
장자는 자래를 통해 삶과 죽음은 자연 변화의 한 단계이며 자연이 준 운명에 순종하면 삶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늙음이 편안하지 못했고 삶이 좋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렉쳐를 준비하면서 남편의 죽음에서 온 슬픔을 사라지게 한 글이 있었다. ‘장자 아내의 죽음’이었다.
아내는 본래 삶이 없었어 삶도 없었어.형체도 없었어.
기도 없었어.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기가 되고 형체가 되고
삶이 된거야.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거야.
오강남풀이 장자 371쪽
그래서 울기를 멈추었다고 울고불고하는 것은 운명을 모르는 일이라 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살던 삶만을 돌이켜보며 남편의 부재를 슬퍼하기만 했던 거다. 자래의 부인과 아이들이 울었던 것처럼 3년 동안 울기만 했다. 남편도 괴산 국립묘지 납골당 항아리 속 보다는 절 뒷산 소나무 아래 땅 속에 뿌려지기를 바랬다. 그도 자연순환의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나 보다. 아! 그랬구나! 그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담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도 소나무 아래 ‘큰 방’에 누워 있는 셈이었다. 장자의 아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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