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 3학기 7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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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보리 작성일24-08-25 23:25 조회19회 댓글0건본문
# 1교시는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를 함께 낭송하고 그 의미에 대해 서로 얘기 나누는 시간이다.
우리끼리 잘 해석되지 않는 부분은 수영샘의 도움을 받아 그 의미가 이해될 때까지 질의응답을 통해 배운다.
이번 주에 읽은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라고 생각했던데 반해,
니체는 ‘인간도 기계’라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데카르트가 신체라는 차원에서만 보면 인간도 기계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동물과 달리 기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니체는 인간의 영혼, 의지도 사실은 기계적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얼핏 보면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운 것처럼 인식되지만,
잘 들여다보면 욕망과 수없이 많은 조건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니체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불완전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흔히 인간의 특성을 얘기할 때면 사유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 말은 결국 신체와 사유는 다르다는 생각이고
이런 관점에서는 사유와 신체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을 상정할 때,
사유하는 존재로 먼저 보지 말고 행동하는 존재로 먼저 접근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행동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걸음을 걸을 때면 ‘어떻게 걸을지’를 미리 고민하지 않고 그냥 걷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인간은 신체에 ‘이미 장착되어 있는 본능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고유성’을 ‘사유’라고 보았다면,
니체나 베르그손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행동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인간도 기계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일종의 <동물행동학>적 관점으로, 동물계에서 인간만을 예외적인 존재로 여겨온 그간의 흐름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2교시의 교재는 <신의 역사>다.
“시작하는 장의 제목이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임에도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에 대한
설명이 책에 적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다.
그 내용을 설명해 줬으면 이 책은 정말 멋진 책이 됐을 텐데......”라는 얘기로
강의의 포문을 연 수영샘은 설명을 이어가셨다.
그리스도는 이미 성취된 기정 사실이다. 그것은 ‘신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과거형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의 자기희생이 유일무이한 사건이다’고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에 대한 설명이 책에는 쓰여있지 않다.
바울은 ‘왜’ 예수의 자기희생을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보았을까? 이 질문을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바울의 관점과 더불어 기독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한편,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의문을 가져 봐야 할 지점들이 또 있다.
유대의 신만 있어도 됐을 텐데, 왜 신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옮겨가야 했을까? 그 변화는 뭘까?
여기서 예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또 뭘까?
이런 신의 움직임을 인류의 역사적 운동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이어지는 고정된 실체로 볼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단일성육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이것을 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는가? 왜 이런 이야기에 환호하고 열광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랍비였을 뿐인데, 왜 이런 이야기들이 받아들여져서 이후 인류의 정신사를 지배하게 된 것인지?
헤겔같은 경우, 그 해석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데, 이 현상을 운동으로 보았다.
하늘에 있던 초월적인 신이 예수로 나타났(내재화 되다)다가 죽는 과정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은 ‘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정신의 운동 과정(의식의 바깥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을 통해서만
인간에게서는 정신적 성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차이의 반복(운동)을 통해서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왜 그리 중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보기에 예수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었고 그가 예수를 그렇게 새로운 인간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예수되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사상의 핵심이 들어있는데도 책에서는 이 점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비교종교학자의 글을 철학자의 시선으로 읽어간다는 것은 참신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과정이다.
# 3교시 세미나. 지난 주에 이어 욥기의 나머지 부분을 가지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이어지는 친구들의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독백에 야훼께서 직접 대답하시라며
맞짱을 뜨던 욥은 정작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야훼의 음성을 듣고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라며 곧바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니, 야훼께서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 주셨다.’로 끝맺는다.
토론을 끝내는 과정에서 한분의 제안으로, 다 함께 욥기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질문들을 뽑고 그중에서
서로 관련되는 것들을 몇 개의 항목으로 분류해서 이번 학기 렉처의 주제로, 나누어 준비하기로 하고 수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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