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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4학기 4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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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셍게 작성일24-10-18 17:10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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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시> 신의 역사

어느덧 <신의 역사>는 중반을 넘어, 종교개혁가의 신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 있다.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에게 15, 16세기는 위기의 시기였다. 오스만 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리스를 정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 1492년! 1492년에는 에스파냐 그라나다 함락으로 무슬림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됐다. 이슬람 세력의 멸망은 유대인에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유대인은 개종 위협을 받게 되고, 개종을 한 유대인도 많았다. 이때 유대인에게 신비주의가 생기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슬람의 정통은 수니파였으나, 이때에는 시아파가 국교가 된다. 

인도에서는 관용을 강조했는데, 지배적인 이슬람 사조인 수피즘과 팔사파의 원리를 수용해 시크교를 만들기도 했다. 관용이 무굴제국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자, 시크교에 반기를 들었고 곧 종교 갈등이 격화된다.

유대 카발리즘이 영웅 루리아에 의해 대두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492년 에스파냐의 세파르디 추방은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추방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추방의 과정에서 생존자는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들만큼의 죄책감을 경험했다. 생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던 것. 

16세기, 세파르디가 새로운 신 개념을 만든다. 카발라다. 이들이 받은 추방의 굴욕을 어떻게든 치유해야 했던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더 직접적인 신 체험을 갈망했고, 그래서인지 성적인 강렬함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핵심은 유대인이 추방된 사건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신도 추방된, 모든 것이 뒤틀린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페드의 새로운 카발라는 순식간에 엄청난 호응을 받게 된다. 

이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 이삭 루리아다. 루리아는 “어떻게 완전하고 무한한 신이 악에 물든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했고, 아인소프의 줌짐 개념을 만들어냈다. 아인 소프(숨겨진 신)가 세계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한 영역을 비웠는데, 이것을 스스로 추방된 것으로 본다. 아인 소프는 사랑(헤세드)과 심판(딘)을 만들었는데, 그 빈 공간에 분노와 심판(딘)을 넣어버렸다. 결국, 신에게서 심판을 제거했지만, 딘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신성한 빛의 가는 줄기가 뚫고 들어가, 최초의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아.. 뭔말인가 싶을 수 있다. ^^;;) 한 마디로, 유출 과정에서 약해진 것이 새롭게 구성되며 재통합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왜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했는가이다. 신비적 요소가 중요해진 유대인에게 메시아의 출현과 같은 역사적 사건은 필요하지 않았다. 신이 스스로 겪어야 하는 신비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신도 유대인이 필요하다. 유대인은 신을 재형성하고 그를 새롭게 창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가진 것이다. 

추방된 유대인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으로 위안을 삼은 것이다. 유대인의 추방을 신의 추방과 같은 맥락에서 사유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처음 바빌론에서 추방당했을 때 유대인은 위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수영샘은 위안을 바랄 때 인간은 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없다고 보았다. 마취제로서 신을 만나게 되는 격이라는 것. 유대인은 고통을 겪다가 약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루리아의 신화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유대인 전체가 나약해졌다는 뜻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유대인은 새로운 희망을 얻었고,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신을 행복 지상주의, 쾌락주의로 소비하는 것이 신에 대한 올바른 태도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3교시> 토머스 머튼

3교시에는 <토머스 머튼의 일기>를 함께 읽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토머스 머튼이 종교인이면서 작가였다는 사실이다. 문학작품을 쓰는 족족 출판사에 보냈지만 퇴짜를 맞아 작가가 되지 못했던 머튼이, 사제가 되어 <칠층산>을 쓰면서 작가라는 감투를 쓰게 된다. 일약 스타가 되어 평정심을 잃게 되는 자신을 바로잡는 모습이라든지, 작가의 길이 자신의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며 고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수행으로써의 글쓰기를 하게 된다. 

이 책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 재치 있는 기교는 발휘되었지만 읽기가 어렵다. 깊이 때문이 아니라 구두점 찍는 법도 잘 모르고 사고 전개가 엉성하고 문맥이 꼬여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 (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시간』, 바오로딸, 120쪽)

자신의 글을 통해, 자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문장을 엉망으로 쓰는 것, 구두점을 제대로 찍지 않는 것 등이 다 그 증거다. 문장을 통해 자기 성찰로 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은 글쓰기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외에도 미사, 사제, 독거, 침묵과 고독, 사랑, 연민 등 머튼이 고민했던 키워드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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