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주역 3학기 에세이_4조 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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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산댁 작성일24-09-05 14:56 조회28회 댓글0건본문
만남은 이끌림
澤山 咸. 初六, 咸其拇.
나는 요즘 인생 후반부 삶에 대해 관심이 많다. 여태까지는 삶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홀리듯 살아왔으니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아차리고, 돈도 현명하게 쓰고 싶다. 그래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일단 내후년에 미국으로 안식년을 다녀오고 나서 마지막 2년을 더 재직한 후 교수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그 이후에 군산이라는 지역에서 나의 전공을 살려 노년층을 대상으로 힐링과 공부가 결합된 웰빙 사업을 해보리라는 꿈을 꾸고 있다. 사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은 되지만 주역이라는 막강한 세계관을 차용, 아니 내 몸에 내재화시켜서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현재의 방식을 전환해서 미래에 요구되는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막연히 방향만을 잡았지, 현재의 삶을 구체적으로 전환해줄 비전이 당최 떠오르질 않는다. 따지고 보면 미래에 아무것도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해놓고 부가적인 계획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맘이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줄 청사진이 미리 나와 주길 바라는 급한 마음만 지닌 채로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학기 동의보감 스토리텔링 때 나는 정·기·신 중 ‘신’에 대해 발표하면서, ‘신’이 삶의 방향성을 추동하는 것이고, ‘물질을 움직이는 무형의 벡터’로서 인간의 감정과는 구별되는 상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신은 어디서 오나? 결국 오장육부에서 체험하는 감정의 구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란 단순히 감정 자체가 아닌, 그 속에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한 줄기 빛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여야 하는데, 오장육부의 작용에 따라 저절로? 만들어지는 저차원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신’은 감정보다 상위의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순간 스토리텔링의 결말이 흐지부지되고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었다. 나는 왜 자꾸 거창한 상위의 무언가를 찾아 올려 세우려 하는 것일까?
지난 날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라는 심리학책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심리적 교감의 방식을 ‘접근과 회피’ 로 설명하였는데, 그 당시 나는 고차원적 인간 심리 작용을 원생동물의 그것으로 환원시킨 것 같아 기분 나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인간은 그저 단세포동물이 아니라 천지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고등한 존재이므로 단순한 화학적 신호전달이 아닌, 훨씬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교류하며 연결되는 것이어야 했다. 작가의 이론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주역에서는 인간 교류의 상황을 澤山 咸 괘로 구현하였는데, 初六 효에서, 남녀의 연결을 咸其拇, 즉 발가락에서 감흥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만남의 시작은 대뇌와 가장 먼 말초 부위인 발가락의 터치에 의해 이끌려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본능적으로 좋고 끌리는 대로 반응한다. 이것이 원생생물들이 주위 존재들과 관계 맞는 화학적인 감흥 방식과 사실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창한 비전이나 세계관 따위는 교류대상과의 감흥 단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나도 별 탈이 없다. 그게 오히려 옳은 방식이다. 삶이란 것도 결국 사람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한 사건의 전개 과정이니 만남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삶은 부딪쳐 가면서 살아내는 과정이지, 계획한 대로만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진지하게 보내면서 인생을 채워나가는 것이지, 청사진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늘 일탈이 생길 수밖에 없다. 咸其拇 효를 떠올려보면, 대상과 즉각적이고 화학적인 공감이 이루어져 접촉과 회피 여부를 재빨리 결정하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서 다른 세포와의 교류를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는 반복적이면서 단순한 움직임이 떠오른다. 그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고민하는 점은 아마도 시행착오가 없이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순간순간의 적극성으로 부딪쳐보자는 배포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불확실한 내 삶을 완벽하게 구성해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럴듯한 계획에 집착했었다. 이 때문에 늘 생각이 많고 행동은 굼떴다. 생각에 생각을 얹어 삶에 무게를 점점 더해가는 방향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좀 내려놓고 그때그때의 느낌을 따라가면 될 것을. 가능성이 열려있는 미래의 삶의 틀을 미리 짜놓으려는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니 집중력이 떨어져 이번 학기에 주역 암기도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앞에 놓인 공부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먼 미래의 모습만 빠르게 성취하고자 하는 섣부른 기대만 잔뜩 키워나갔구나 하는 자책이 되었다. 일이든 사람이든 만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대응하면 될 일이다. 처음 감이당을 만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이상한 단체 같기도 했지만 이끌림에 의해 등록을 하고 그러다 2년차에 접어든다. 이끌림을 피하지 말고 화학적으로 공감해보는 것, 내 앞에 당면한 공부부터 적극적으로 감흥해보는 것을 잊지 말자.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가 참 해맑다고 생각한다. 해맑다는 말에는 좀 ‘모자라면서 단순하다’라는 나쁜 의미가 부각되기도 하지만, 나는 정말 그 친구가 해맑아서 좋다. 그 친구는 늘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하고, 군더더기가 없고 꼬인 구석이 없다. 그래서 그 친구가 혹시 감정 상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순수하게 받아주니깐. 나도 그 친구처럼 그냥 가볍게 살아가고 싶다. 느낀 대로 반응하고, 생각의 군더더기를 버리고, 가볍게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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