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토요주역 1학기 주역 글쓰기 - 3조 공미진 (택풍대과) > 토요 감이당 주역스쿨

토요 감이당 주역스쿨

홈 > Tg스쿨 > 토요 감이당 주역스쿨

2026 토요주역 1학기 주역 글쓰기 - 3조 공미진 (택풍대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엠제이 작성일26-04-23 15:29 조회33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스며드는 물 대과(大過)를 건너는 법

 

 

1학기 5주차 택풍대과괘 발제로 신강한 임자일주 사주와 방향성을 잃어서 멈춰버린 양들에 대하여 글쓰기를 하였다. 담임 선생님의 피드백은 이론을 넘어선 나의 개인적인 사건을 가져와 쓰라는 것이었고 조별 모임에서 구체적인 사건들을 떠올리며 얘기하다 보니, 그 날이후 나의 모든 상황 일상을 대과괘의 렌즈로 보게 되었다. 대과괘는 속은 그득하게 양효로 꽉 차 있는데, 위 아래로는 약한 음효가 아슬아슬하게 묶어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나의 사주는 壬子日柱壬寅月庚子時로 비겁으로 가득한 신강한 사주이다. 임수(壬水)는 거대한 호수이자 바다인데 겉으로는 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해 보이지만, 일지에 놓인 子水는 수기의 제왕지라 안으로 응축된 힘과 내면의 견고한 자의식은 대과괘의 용마루처럼 불룩하게 솟아 있는 모습과 닮아있다.

대과괘의 양효들은 구이(九二), 구오(九五)가 이미 을 차지하고 있는데 다시 삼효(三爻), 사효(四爻)에도 양들이 터를 잡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멈춰있다. 왕부지에 따르면, 건괘·쾌괘·구괘도 양효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양의 지나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양의 힘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대과괘에서 그 양의 지나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구삼효(九三爻)이다. 구이와 구오는 바로 이웃하고 있는 초육·상육과 사귀고 있고, 구사는 음의 자리와 상괘의 제일 아랫자리여서 그나마 흉함을 면하였는데, 구삼은 양의 자리에 양을 더하고 있고, 하괘의 제일 윗자리에 있으니, 양의 지나침을 그대로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발동이 걸리면 내 안에서 자가발전하며 생각을 키우고 주변의 우려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고집대로 해버리는 것이 대과괘의 구삼효 그대로의 모습이다.

최근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조직장인 나의 직속 상사를 제치고 나에게 직접 조직 변화 전략 수립을 주문하는 일이 있었다. 직속 상사는 내가 만든 조직 변화 전략서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견대로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수정할 것인가를 두고 몇일을 고민한 끝에 결국 수정 없이 원안대로 보고를 진행하였다. 조직에서 상사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과 상사의 의견이 내 주장의 근거를 부정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를 찾았고 나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그래도 고민을 하던 며칠 동안 주역점을 쳐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주역점 조차도 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내 결정과 행동을 확신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뒤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대과괘의 상황에 내가 구삼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고, 다르게 대응할 수는 없었을까 곱씹어보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최고 경영자가 상사를 건너뛰고 직접 지시를 내린 그 상황 자체가 이미 긴장이 가득한 대과의 상황이다. 그리고 상사의 반대 의견과 주변의 절충 권유는 아마 대과괘 위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음효들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행동 중 가장 구삼효 같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주역점을 치려다가 결국 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상황과 이치가 명확해서 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점괘가 나올까봐 원천 차단한 것이었다. 주역점을 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확실성 앞에서 나를 열어두는 것이라 양이 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 일텐데, 그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닫아버린 것이다. 점을 치지 않은 그 순간, 움직이지 않겠다고 이미 답을 정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구사(九四)의 방식이라면 그 과정이 어떠해야 했을까. 구사(九四)는 양이면서 음의 자리에 앉아있다. 자신의 강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음의 자리에 맞게 눌러 담아서 위에 있는 구오(九五)라는 군주의 자리를 받쳐 들어올리는 것이다. 여기에 유타린(有它吝)’이라는 조건이 따라 붙는데, 이는 그 받쳐 올리는 것을 구오의 자리를 넘보거나 초육과 사사로이 통하려고 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九四처럼 생각했다면 상사의 반대 의견을 단순히 묵살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우려를 언급하고 그 대응책까지 넣어서 보고서를 수정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것은 원래의 핵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보강하는 방식으로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 경영자의 지시도 받치고, 상사의 우려도 받치고, 보고의 원래 목적도 받쳐서 棟隆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주역점은 어쨌든 쳤어야 했다! 아직은 내가 한 선택이 인지 無咎인지는 그 결과는 모르는 상황이다. 다만 그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과 마음가짐은 확실히 이었다. 지금이라도 그 과정들을 돌아보며 곱씹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로, 양강한 자리에 앉은 굳은 생각이 조금씩 음의 자리로 내려가고 있다는 의미이길 바래본다.

지금까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九三爻처럼 살아왔다. 강한 자리에 앉아 더 밀어붙이고 더 증명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은 맞지만, 대과괘는 그 방식으로는 대들보가 버티지 못하다고 말한다. 임수(壬水)의 커다란 물이 방향성을 잃고 그대로 견고해지면 단단한 얼음이 될 뿐이고, 얼음은 아무것도 길러내지 못한다. 같은 양이라도 음의 자리에 앉을 때 비로소 길할 수 있다는 것이 대과괘가 내민 답이다. 강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강함이 향해야 할 자리를 바꾸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은 九四爻의 방식으로 쓰고 싶다. 내가 해온 것을 증명하는데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직 피어나지 못한 주변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받쳐주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먼저 내밀지 않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방식으로. 점괘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올 가능성까지 미리 열어두는 방식으로. 임자일주의 깊고 강한 물이 그 깊이를 자랑하지 않고 대지 아래로 스며들어 뿌리를 적실 때, 비로소 마른 버드나무에서 새싹이 돋게 된다. 나의 강함이 고집이라는 얼음으로 굳지 않고 주변을 적시는 물길이 되어 흐를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갈 바를 두고, 삶의 대과(大過)의 순간들을 형통()의 여정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