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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시련 (1) 과제] 비전과 실존이 함께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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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6-03-09 12:14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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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3.5/ 종교인류학 1차시 과제(미로의 시련1)/ 박서영

  

비전과 실존이 함께 하려면? 

 

내가 성화된 상태로 존재할 때 다른 모든 것들이 성스러움이 나타나는방식으로 존재하는 비일상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p100)

나는 젊은 시절에 사()가 아닌 생()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를 사는 생()이면 사()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며, 존재의 기원과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생()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찾고 싶었고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란 바람과 달리 현실에서는 자꾸 그 길에서 벗어나 사()를 사는 것 같아 괴로웠다. 노후에 대한 걱정이나 현실에서 당면하는 문제에서 생기는 어려움과는 다른 차원의, 정체모를 불안감이었다.

감이당에 접속해서 공부하면서 존재의 기원과 뿌리를 찾고 싶은 열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뿐 몸과 자연, 마음과 우주의 연결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러한 연결성 위에서 각자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삶의 비전을 갖는 것이며, 스스로 삶의 비전을 가졌을 때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공부하면서 앎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는 동시에 명상을 통해 내 의식의 저변과 잠깐씩 만나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예전에 가졌던 불안감은 많이 줄었다. 나와 우주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정진하리라는 비전으로 한걸음씩 걷고 있지만 문득, 어쩌면 이러한 시선 또한 여전히 위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찾아가는 대상과 방향만 바뀌었을 뿐 실존의 차원에서는 비전과 얼마만큼 일치하고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 것일까?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앎이란 만물과 자기 자신의 관계의 장 내에서 펼쳐질 수 있고 펼쳐져야만 한다.”(p268)고 하면서 헬레니즘 철학에서 나타나는 관계적 앎을 제시했다. 유기쁨 선생도 애니미즘과 현대세계에서 선물을 주는 세계와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하는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고(p340), 바타유는 이러한 관계를 저주받은 몫에서 자기소진으로 표현했다. 위의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일상의 시선을 갖는 것에 대해 이번 텍스트에서 엘리아데는 성화된 실존’(p93)이라고 표현했으며, 인도적 개념으로는 생해탈의 존재양식’(p105)이라고 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영적인 차원에서 고대와 현대가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전통종교를 이해하면 알게 되므로, 시간 속에서 동일하게 내재해 있는 기원을 일상에서 체험하려면 전통종교를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p103). 그리고 그러한 지성적 활동과 더불어 일상을 성례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가꾸어 가야 한다고도 했다(p93). 종교적 탐구라는 지성적 활동과 일상을 성례로 바꾸는 실천적 행위가 맞물려 돌아감으로써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화된 실존의 상태로 존재하려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것이 먼저일까, 종교학과 애니미즘 공부를 하다 보면 시선이 아래로 향하게 되는 것일까? 성례적인 체험은 일상에서 어떤 형식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내용들이 알 듯 말 듯, 지금은 난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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